텃밭과 오두막

‘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지난 호 필자 송이 씨에 이어 노석미 씨가 ‘농촌에 관한 단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쓴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글·사진 노석미

  근질근질 실룩실룩 스멀스멀… 봄이 오면 만물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동안 너무 추웠다. 그동안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동안 너무 꼼짝없이 견디느라 고생했다. 이젠 괜찮아! 봄이 왔다고!

땅에서도 나무에서도 새순이 돋고 있다.
땅에서도 나무에서도 새순이 돋고 있다. ⓒ노석미

  3월의 어느 날, 아직 정확히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곧 봄이 올 것을 아는 시기가 오면 온 세상이 설렘으로 가득하다. 곧 새롭게 태어나는 많은 것들과 만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꽁꽁 얼었던 땅이 녹아 드디어 흙을 만날 수 있다. 흙 위로 작은 초록들이 기운을 내서 튀어 올라온다. 아직 잎이 나진 않았지만, 나뭇가지들도 수분을 머금어 채도가 높아진다. 쓸쓸하기만 했던 먼 산의 풍경은 어느덧 뽀송한 따스함을 품고 부피가 커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겨우내 실내생활만 했던 나도 텃밭을 향해 난 문을 열고 정원에 나가기 시작한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그런다. 아! 자꾸만 밖이 궁금하다. 아직 뾰족이 할 일도 없으면서 정원과 밭을 어슬렁거린다. 달라진 공기를 느끼며 기분이 좋아진다. 해마다 오는 봄인데 해마다 놀라고 해마다 궁금해한다. 해마다 새롭다니! 봄의 힘은 대단하다.

나의 정원은 나무와 꽃, 작은 텃밭으로 꾸려져 있다.
나의 정원은 나무와 꽃, 작은 텃밭으로 꾸려져 있다. ⓒ노석미

텃밭, 내겐 가장 아름다운 정원
  나의 정원은 몇 그루의 나무들과 화단을 가진 잔디밭과 함께 작은 텃밭으로 꾸려져 있다. 봄이 올 때마다 어슬렁거리며 머릿속으로 그해의 정원과 텃밭 가꾸기 계획을 세우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가 언제나 이상적인 텃밭의 크기라고 생각하며 텃밭의 규모와 상태를 매해 점검한다.
  사실 점점 텃밭을 줄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텃밭을 꾸려온 지도 15년이 넘어가는데, 그간 텃밭을 꾸리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누리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 정원과 텃밭은 내게 그동안 많은 대가를 요구해왔다. 나는 정원가도 농부도 아니라는 자각, 타협을 해야만 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나의 텃밭은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해 초라하다. 튼실한 작물들이 그득한, 전문적인 농부라 불릴 수 있는 이웃들의 윤기 나는 큰 규모의 밭과 비교해 내가 키워내는 채소들이 엉망이라며 투덜거리면 “에이, 그냥 사 먹는 게 싸게 먹히는데 뭐 하러 그 고생을 하쇼”라며 다 쓸데없다는 태도로 충고해주는 이들도 많다.

밭에 물 주기. 봄이 오면, 나는 어떤 채소와 화초를 심을까 고민하며 텃밭을 꾸민다.
밭에 물 주기. 봄이 오면, 나는 어떤 채소와 화초를 심을까 고민하며 텃밭을 꾸민다. ⓒ노석미

  하지만 나는 텃밭을 아예 포기하지는 못한다. 텃밭에서 나오는 귀한 먹을거리들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텃밭은 내겐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한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해 봄이 오면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채소를 어떤 화초와 함께 심을까. 고민한다. 그 조화로움을 생각하며 종류와 규모를 정하고 화단을 가꾸듯 텃밭을 꾸린다. 우리가 먹는 채소는 대체로 꽃이 피기 전에 수확해서 먹기 때문에 채소와 꽃을 구분하는 것이지 채소도 그대로 두면 꽃이 피고 열매를, 씨앗을 맺는다. 어느 해인가 무를 심고 수확하지 않자 (너무 바빠 게을러서 방치한 것이지만) 나의 정원 한 부분이 아름다운 연보랏빛 무꽃으로 가득 차서 감탄을 한 적도 있다. 심지어 쑥갓 같은 경우는 먹기보다는 꽃을 보기 위해 씨앗을 파종한다고 할 수 있다. 쑥갓꽃이 해님처럼 피어나면 마음도 같이 활짝 환해진다. 먹을거리가 곧 아름다운 볼거리가 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기다란 텃밭 고랑을 가진 이웃들이 나의 정원에 오셔서 반듯반듯 작은 구획을 가진 텃밭을 보고 한 소리 하신다. “아유~ 애들 장난하듯 밭을 가꿨네. 예쁘네,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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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오두막이 있는 정원. ⓒ노석미

사랑스러운 나의 오두막
  그리고 텃밭 한구석엔 나의 자랑인 오두막이 있다. 몇 년 전에 오랜 구상 끝에 직접 지었다. 나는 집은 못 짓더라도 오두막은 꼭 직접 짓고 싶었다.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작은 조립식 오두막을 파는 곳들이 꽤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하나같이 그 생김이 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개월에 걸쳐 직접 짓게 되었다. 오두막 옆엔 멀쩡하게 높다란 천장을 가진 건물, 작업실(나는 이곳에서 살고 있다)이 있지만 나는 피스 하나하나 내 손으로 박아 넣은 이 작고 소박하고 귀여운 건축물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래서 나의 집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에게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오두막을 꼭 들러볼 것을 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을 읽다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도 오두막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버나드 쇼는 런던에서 북쪽으로 70㎞ 정도 떨어진 곳에 집과 정원을 꾸리면서 작은 오두막을 지어 집필실로 썼다고 한다. 그 집필실의 이름을 ‘런던’이라고 붙였다. 원치 않는 손님이 오면 “런던 가셨습니다”라고 둘러대게 했다고. 공교롭게! 나의 집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대략 70㎞ 정도 떨어져 있고, 나의 오두막과 버나드 쇼의 오두막이 거의 비슷한 크기(2평이 채 안 됨)라니! 급격히 혼자 친밀감을 느끼며, 그렇다면 나는 오두막 이름을 ‘서울’이라고 붙여 볼까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해 보기도 했다.

굿모닝 해님, 정원에 밝아오는 아침.
굿모닝 해님, 정원에 밝아오는 아침. ⓒ노석미

  나의 오두막은 버나드 쇼의 오두막과는 크기만 비슷할 뿐 사실 많은 면에서 다르다. 일단 나의 오두막의 용도는 농사에 쓰이는 각종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놓인 창고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버나드 쇼처럼 집필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이름도 갖지 못했고, 버나드 쇼의 개인적 용도의 오두막과는 사뭇 다르게 손님들이 오면 둘러보며 사진 촬영을 해대는 포토존이 되고 말았다. 그 귀여운 크기로 인해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마치 동화의 한 장면이 되어버려 찾아오는 나의 지인들(물론 대부분 농촌에 환상을 가진 도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가끔 오두막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는 부슬부슬 비가 내릴 때이다. 오두막에 유리창을 달고 그 아래 조그만 의자를 가져다 놓았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그곳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비오는 소리를 듣는다. 매우 작은 실내가 주는 안온함을 느끼려고 하는 짓거리랄까. 나의 오두막은 아름다운 ‘밭뷰’를 가진 소중한 1인 전용 건축물이다.

  나의 텃밭과 오두막에 봄이 당도했다. 오두막 문을 열고 각종 농기구를 꺼내고 지난해 들여놓았던 호스도 꺼내 수도와 연결을 한다. 이제 막 올라온 새싹들에게 물을 준다. 세상의 표피가 수분으로 촉촉해짐과 동시에 내 마음도 촉촉해진다. 분주하지만 즐거운 정원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노석미필자 노석미: 화가, 작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산이 보이는 작은 정원이 딸린 집에서 고양이와 함께 살며 화가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그린다는 것》, 《좋아해》, 《나는 고양이》, 《먹이는 간소하게》, 《매우 초록》, 《굿모닝 해님》, 《귀여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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