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농민들이 함께 산, 들, 바다를 지킨다

[크기변환]44

이백연 전 산들바다유기농업영농조합법인 이사
(제30회 대산농촌상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를 둥글게 에워싼 해안도로를 따라서,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변산면으로 향했다. 서쪽 끝자락에 닿기 전에 운전대를 돌려, 산들바다유기농업영농조합법인(이하 산들바다공동체) 입구에 도착하니, 멀리서도 선명하게 ‘꿈’이라고 보이는 솟대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산들바다 사람들의 꿈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솟대가 등 뒤에 숨겨둔 봄물결 이는 들판을 지나니, 마중하러 나온 이백연 씨의 환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산들바다공동체를 지키는 솟대 한 쌍. 산들바다공동체는 부안군에서 유기농을 실천하는 농민들이 직접 만든 조직이다.
산들바다공동체를 지키는 솟대 한 쌍. 산들바다공동체는 부안군에서 유기농을 실천하는 농민들이 직접 만든 조직이다.

쌀 한 톨에 농부의 땀 일곱 근
  변산에서 나고 자라 50년간 꾸준하게 농사를 지어온 이백연 씨는 자신을 “뼛속까지 농민”이라고 소개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서 농사를 지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어른들 하는 농사일도 다 따라서 했어요. 소년 시절에는 다른 애들처럼 도시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었죠. 그래도 지역에서 열심히 농사짓는 어른들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어요.”
  청년 시절에는 서울에서 귀농한 부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속이 꽉 차는 결구배추를 키우는 법과 수박, 참외를 포트에 접목해서 심는 법 등 새로운 농사기술을 배웠다. 또한, 지역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농약과 비료 대신 효소로 만든 토곡(흙누룩)을 땅에 뿌리는 ‘효소농법’을 익히게 되었다.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고추 모종. 이백연 씨는 “일흔 살까 지 농사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고추 모종. 이백연 씨는 “일흔 살까지 농사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유기농을 부분적으로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농업이 더욱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었어요. 사람들이 먹는 농산물을 건강하게 키워내는 것이 농사꾼인 내가 할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유기농에 필요한 자재도, 기술도, 인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농사짓는 일은 힘에 겨웠다.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가 나니 ‘빚살림’을 이어가야만 했다.
  “논 한 마지기(200평)를 빌리면 임차료로 쌀 한 가마니(80㎏)를 줘야 해요. 그런데 쌀이 그만큼도 안 나오는 거예요. 잡초와의 전쟁이니까 온 동네에서 일꾼들이 열몇 명씩 와서 풀을 매야 했고요. 우리 어머니가 논에서 무릎을 꿇고 김매다가 땅을 치면서 펑펑 운 적이 있어요. 남들처럼 고추 한번 재밌게 따보고 죽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는데, 그걸 못하고 돌아가셨네요. 식구들만 생각하면 참 죄스러운데도, 유기농을 포기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이백연 씨와 아내 정복자 씨. 이백연 씨는 아내에 대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모든 것을 200% 해낸 대단한 사람”이라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이백연 씨와 아내 정복자 씨. 이백연 씨는 아내에 대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모든 것을 200% 해낸 대단한 사람”이라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이백연 씨가 놓지 못한 희망의 끈을 함께 잡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1992년, 그를 비롯한 부안 지역의 유기농민들이 전주 지역 소비자들과 함께 ‘사람과 땅을 살리자’는 취지로 ‘한울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농민과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일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당번이 농산물을 쫙 걷어서 전주로 가는 거예요. 아파트를 돌면서 미리 주문받은 것들을 내려주면, 그쪽 당번이 정리해서 각 집에 나눠주고요. 처음에는 고추장을 어떻게 팔았는지 아세요? 찜통에 고추장을 잔뜩 담아서 비닐에 한 국자씩 담아서 줬어요, 하하. 우리가 생산한 걸 알아주는 사람들과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가 컸어요. 우리를 참 귀하게 생각해주고, 아주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그는 특히, 서로의 자녀들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이 도시에 가면 소비자들이 재워주고, 다음날에 동물원에 데려다줬어요. 소비자의 자녀들이 농촌에 올 때면, 우리는 모내기 같은 다양한 농촌 체험을 준비했고요. 그때마다 아이들이 참 좋아라 했어요.”

2022년 기준, 산들바다공동체에 소속된 19개 농가는 19만 5000 평에서 농사짓고 가공하여, 총 30억 원 정도의 매출을 냈다.
2022년 기준, 산들바다공동체에 소속된 19개 농가는 19만 5000평에서 농사짓고 가공하여, 총 30억 원 정도의 매출을 냈다.

서로 기대 사는 농민들
  2002년, 한울공동체는 재정비를 위하여 발전적 해체를 하고, 2년간 준비하여 2004년 산들바다공동체로 재창립했다.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면 3년 안에 유기농으로 싹 바꿔야 해요. 문턱이 엄청 높은 거죠. 나중에 보니까 그게 굉장히 득이 되더라고요. 아, 저기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봐주시니까요.”

이백연 씨가 생산한 돼지감자. 산들바다공동체는 다품목 소량 생 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백연 씨가 생산한 돼지감자. 산들바다공동체는 다품목 소량 생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산들바다공동체는 주로 소비자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약정을 맺고 농사를 짓는데, 경력과 관계없이 약정량을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여기서는 농사만 잘 지으면 100% 출하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젊은 후배들에게 욕심을 내보라고 하거든요. 앞서 농사지었던 사람들이 경험을 축적해놨기 때문에 실패율이 낮으니까요.”

차를 만들기 위해 작두콩을 가공하는 모습. ⓒ한살림
차를 만들기 위해 작두콩을 가공하는 모습. ⓒ한살림

  이백연 씨는 회원들이 서로의 농가에 방문하여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점검하고, 필요에 따라 품목별로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경쟁사회라고 하지만, 협업과 연대는 작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뜻이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죠. 우리 공동체는 누구 한 명이 유난히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함께했어요.”

  그가 ‘함께’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할 때, 산과 들과 바다를 함께 지키고 있는 작은 농민들의 꿈을 헤아려보았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동료들과 계속해서 농사지으며, 건강한 먹거리의 가치를 아는 소비자들과 끈끈하게 연결되는 것. 그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이진선

절임배추는 산들바다공동체의 대표 품목이다. 배추 재배부터 가공까지 공동체에서 직접 진행한다. ⓒ한살림
절임배추는 산들바다공동체의 대표 품목이다. 배추 재배부터 가공까지 공동체에서 직접 진행한다. ⓒ한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