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이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하여

김대립 청토청꿀 대표
(제33회 대산농촌상 농업경영 부문 수상자)

  온통 하얀 메밀꽃으로 산허리가 덮여 있던 추정리 된내기골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이곳에서 부지런히 산과 들을 오가며 꿀을 모은 토종벌들은 월동 준비가 한창이다. 김대립 씨가 조심스레 벌통 뚜껑을 열자, 서로 몸을 맞댄 채 ‘붕붕’ 소리를 내는 벌들이 보였다. 보송보송한 솜털을 단 이 토종벌이, 해마다 들꽃을 피워내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토종꿀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다.

토종벌은 산과 들을 오가며 다양한 들꽃에서 꿀을 모은다.  ⓒ대산농촌재단

토종벌의 매력에 빠지다
  ‘토종벌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대립 씨는 충북 청주시에서 3대째 토종벌을 사육하는 농민이다.
  “벌통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외출하면, 아버지가 뒤를 이어 벌통을 지켰어요. 그러면 저는 아버지를 흉내 내면서 빈 벌통으로 소꿉놀이를 했죠. 아버지가 9살 생일 선물로 진짜 벌통을 줬는데,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고등학생 때는 학교 옥상에 벌통을 가져다 두고 벌을 돌보기까지 했던 그는 날이 갈수록 토종벌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가까이 있으면 좋고, 안 보이면 궁금하니 매일같이 벌을 들여다봤어요. 그게 나중에 보니 관찰이었더라고요. 벌의 생리, 생태를 연구한 건 아니었지만 다 알 수 있었어요.”
  40여 년간 벌을 돌보고 관찰하다 보니, 토종벌의 특색을 살린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토종벌이 계절마다 다양한 들꽃의 꿀들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을 보고, 벌집을 세로로 잘라 다채로운 색상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벌집이 무지개처럼 다른 색을 띠고 있다고 해서, ‘무지개 꿀’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품화하기도 했다. 매년 7~8월이면 토종벌이 양벌과 땅벌에 당해 꿀을 잃는 것을 관찰하고는, 벌통의 출입문에 미로를 단 다기능 벌통을 제작하기도 했다.

토종벌 교육을 받는 농민들. 김대립 씨는 30년간 농민들에게 토종벌 사육 기술을 전파하고 있다.

인공분봉, 토종벌 생산 기반을 넓히다
  토종벌은 1년에 한 번, 새로운 여왕벌이 나오면 기존의 여왕벌이 전체 일벌 중 일부를 데리고 떠나 새 군집을 만드는데, 이를 ‘분봉’이라 한다. 이전까지 토종벌 농가들은 벌들이 분봉하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벌들이 산으로 날아가기 전에 잡아서 새로운 벌통에 넣는 방식으로 토종벌 개체수를 늘려왔다.
  “어렸을 때, 분봉을 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다 나와서 하루 종일 벌을 기다렸어요. 누군가 ‘벌 나왔다!’ 하면 물을 뿌려서 잡고, 흙을 뿌려서 잡고……. 그렇게 잡아넣으면 또 도망가 버리고, 나중에는 벌이 다 망가져요. 양봉 농가에도, 벌에게도 힘든 일인 거죠.”
  김대립 씨는 토종벌이 갑작스럽게 하늘로 날아오를 경우 벌통으로 돌아오는 회귀성이 사라진다는 특성을 활용해, 벌의 이동을 제어하는 ‘인공분봉법’을 개발했다.
  “어떤 사람은 ‘벌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수준’으로 효율성이 높다고 해요. 자연분봉이 어렵기도 하지만, 성공하더라도 70~80%가 산으로 날아가 버렸거든요. 인공분봉을 하면, 농가는 안정적으로 좋은 토종꿀을 생산할 수 있고, 토종벌의 종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죠.”
  이렇게 개발한 인공분봉 기술은 30년간 현장 교육과 기술 전수를 통해 약 7000여 농가에 보급했다. 온라인 사이트를 개설해 모든 기술과 비법을 공개하고, 혹시라도 섣불리 시도하는 농가가 벌을 잃을까 봐, ‘잘 모르겠으면 농장으로 찾아오라’는 글까지 남겼다.
  “양봉 산업 구조도 생태계와 똑같아요. 어느 한 명에 의해서만 움직이면 건강한 게 아니죠. 꿀벌이 먹을 만큼 꿀을 따고 나머지를 사람과 나누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듯이, 공유는 곧 힘이 있는 거고, 아름다운 거예요.”

토종벌의 해결사가 되다
  2009년, 일명 ‘토종벌 에이즈’라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이 발생했다. 2년 만에 전국에서 토종벌의 약 90%가 폐사했다. 김대립 씨는 ‘앞으로 양봉을 못 하는 한이 있더라도, 벌을 살리고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토종벌 농가들과 ‘토종벌지킴이’ 단체를 꾸려 각종 연구와 실험에 나섰다.
  “제일 먼저 병이 창궐했다는 중국도 가고, 일본에 전문가가 있다고 하면 거기도 가보고, 좋다고 하는 약재가 있으면 제일 먼저 써봤어요.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면서 농민이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다 해봤어요. 그러면서, 이전에는 힘을 못 쓰던 해충들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환경이 바뀌면서 벌통에 침범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는 감염 매개였던 명나방애벌레, 수중다리좀벌의 침입을 막는 벌통과 바이러스 전염원인 애벌레를 줄이기 위한 산란 억제 기술을 전국에 배포했다. 7년간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온 토종벌 농가 현장의 결실이었다. 2019년, 꿀벌의 공익적 가치 보호를 위한 ‘양봉산업육성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바이러스 저항성 품종 ‘한라벌’의 증식을 위해 3년간 전남 완도군의 소안도·보길도에 머물렀다.
  “섬으로 들어가기 전 벌통 세 통을 딱 받았어요. 이걸 가지고 건강한 벌 200군집을 확보해야 하는 거예요. 3년 동안 육지와 떨어진 곳에서 바이러스에 강한 벌을 길러내서 내륙으로 보낸 거죠.”
  10년간 이어진 토종벌 복원 노력으로 농가 안정을 찾은 이후에도, 그는 겨울마다 제주도에서 한라벌 일벌을 증식시키는 작업에 나선다.
  “얼마 전 제주도 곶자왈에서 벌을 치고 있는데, 어떤 초등학생 형제가 지나가다 벌을 보고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한대’라고 하더라고요. 이 가치가 꽃가루같이 예쁘게 퍼져 나가고 있구나, 그때 느꼈죠. 이제는 꿀벌의 중요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그 가치를 알게 된 거예요.”

연간 10만 명이 찾는 추정리 메밀꽃밭. 2026년부터는 이러한 청정 밀원을 2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김대립

48-3메밀꽃밭, 벌과 사람의 명소로 
  5월과 10월, 추정리 된내기골엔 샛노란 유채꽃과 눈꽃 같은 메밀꽃이 만개한다. 김대립 씨가 토종벌이 건강하고 다양한 꽃꿀을 딸 수 있도록 조성한 청정 밀원(蜜源)이다.
  “꿀벌이 건강하기 위해선 결국 좋은 밀원이 있어야 해요. 이왕 심는 거, ‘벌도 좋고 사람도 좋은 곳으로 만들자’ 해서 농업의 디자인을 적용했죠. 하얀 메밀꽃밭에 해바라기 하나만 둬도, 토종벌은 골고루 먹으며 건강해지고, 사람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는 거예요.”
  약 4ha 규모로 조성된 추정리 메밀꽃밭은 연간 1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2024년에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협동조합 ‘천년추정’을 설립했다. 2026년부터는 밀원지 규모를 2배 이상 늘릴 계획이다.
  “벌들이 산속에 사람들을 불러들인 거예요. 일종의 꿀벌 플랫폼이죠. 밀원으로 꿀벌에게 좋은 생태계를 만들어주니 벌들이 응답하는 거예요. 오염되지 않은 환경, 다양한 꽃이 피는 곳, 건강한 세상이죠. 꿀벌이 살기 좋은 세상은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기도 해요.”

김대립 씨는 “꿀벌이 살기 좋은 세상에 농촌의 미래가 있다”고 강조한다.

  김대립 씨의 꿈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저희 아버지는 늘 벌을 만지기 전에 이 산골에서 가장 깨끗한 샘물로 손을 씻고, 혹여라도 농약을 묻혀 올까 마을도 잘 나가지 않았어요. 이곳은 할아버지 대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지켜온 땅이에요. 제가 하는 일은 이 땅과 토종벌을 지키는 것이고, 나머지는 뜻이 있는 분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거죠.”
  서로 몸을 맞대 겨울을 나는 토종벌처럼, 김대립 씨와 함께 모여 ‘꿀벌과 사람이 같이 사는 세상’을 일구는 이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글·사진 조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