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융조
사진 제공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쌀은 인류가 가장 먼저 가꾼 곡물(먹거리)이다. 옥수수, 밀과 함께 세계인의 3대 식량 작물로 꼽히며, 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 그리고 아시아 인구 90% 이상의 주식인 식량 자원이다. 쌀이 인류에게 곧 생명이자, 문화를 만드는 역동적인 핵심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중요한 쌀의 기원을 찾는 연구는 UN의 산하기관인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IRRI, 필리핀 로스 바뇨스 소재)를 중심으로 미·일 학자들과 특히 중국 학자들이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는 1910년대에 조사된 김해 조개더미(패총) 유적에서 출토된 쌀이 보고된 이후, 1970년대 서울대학교 박물관 임효재 교수가 주관한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지 조사에서 3000년 전의 쌀(탄화미)을 발굴하여 벼농사의 기원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에 선사시대 곡물(벼) 연구에 새로운 서막을 연 것이 바로 ‘고양 가와지유적’이다.
가와지유적은 우리나라 최초 산업화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는 ‘제1차 신도시 건설’에 앞서, 일산 신도시 문화유적 조사단(단장 손보기 교수, 당시 한국선사문화연구소 소장)의 충북대학교(이하 충북대) 팀(책임자 이융조)이 발굴한 유적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철기시대까지 3시기의 볍씨가 우리나라 쌀-볍씨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허허벌판 논에서 찾은 볍씨
필자가 충북대에 새로 개설된 고고미술사학과와 선사문화연구소를 이끄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의 개척자이자 나의 스승이신 손보기 교수의 연락을 받았다. 일산 신도시 문화유적 조사단에 필자를 중심으로 한 충북대 팀을 넣겠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논바닥 밑 토탄층土炭層1)을 발굴하는 작업으로, 총 3개 지역 중에서 충북대 팀은 ‘일산 2지역’ 조사를 맡게 되었다. 충북대 고고미술학과 재학생 30여 명 등이 참여한 조사단은 1991년 5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총 102일 동안 2차례의 조사를 통해 1440㎡(435.6평) 면적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5월 8일, 처음 조사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마을에 있던 집들은 다 철거되어 없었다. 황폐한 벌판에 겨우 집 한 채만 남아 있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다 어디서 지낸단 말인가? 외딴집 주인 김수원 님을 만나 발굴의 중요성과 현재의 입장을 사정하여 겨우 방 두 칸을 빌렸다. 여학생들은 빌린 방에서 그 집 딸과 같이 지내기로 하고, 남학생들은 헛간과 천막 아래에서 자야만 하는 긴급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발굴에 필요한 장비조차 둘 데가 없는 허허벌판이었는데, 멀리 빈집 하나가 눈에 띄어 장비를 임시로 넣어놓았다. 다음 날, 한 학생이 “저 집은 상엿집입니다”라고 알려주어 깜짝 놀라 장비를 허겁지겁 꺼낸 기억도 있다. 결국 천막 옆에 별도의 비닐하우스를 쳐서 창고로 쓰기로 했다.
그러나 열악한 숙소나 창고 문제는 별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넓은 논바닥을 어떤 방식으로 발굴하여 토탄을 조사할 것인지 영 막막하였다. 측량팀이 만든 긴 구덩이에 남녀 구별 없이 매달려 아침저녁 삽질하는 신체적인 작업이 열흘 넘게 이어졌다. 발굴을 착수한 지 2주일쯤 지났을까. 한 학생이 “까만 흙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1) 토탄층: 땅속에 묻힌 시간이 오래되지 않아 완전히 탄화하지 못한 석탄이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
천막에서 급히 뛰어나가 보니 논바닥으로부터 약 1.5m 밑에 까만 토탄층이 보였다. 이를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긴 구덩이를 만들어 조사를 서둘렀다. 며칠 후, 토탄층에서 뉘어져 있는 가래나무 기둥을 찾아냈다. 나는 조사단의 사기를 북돋고자 “우리나라에서 발굴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니 정밀하게 발굴하라”고 당부하였는데, 여기에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조사에 10여 년을 참여한 김기용 님이 볍씨 한 톨을 찾게 되었다. “아, 우리도 드디어 볍씨를 찾았구나!” 발굴을 시작한 지 40일째 되는 날의 일이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평소 “쌀 한 톨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다음 날, ‘모아놓은 토탄더미 속에 볍씨가 더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조사단원들과 논의 끝에 플라스틱 목욕통에 논물을 받아서 체질하기로 하였다. 얼마 후 까만색으로 변한 물속에서 토탄 찌꺼기와 함께 노란색을 약간 띠고 있는 볍씨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여 11톨의 볍씨를 더 찾아 모두 12톨의 볍씨를 확보하게 되었다(고양 가와지볍씨 Ⅰ호).
우리는 볍씨의 이름을 직접 짓기로 하였다. 조사단이 발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준 김수원 님의 댁 당호가 ‘가와지家瓦地’라는 점에 착안하여 ‘고양 가와지볍씨’라는 이름을 지었다. 집을 통째로 빌려주었던 분의 넓은 아량과 은혜에 보답하는 뜻이 함축되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흐뭇한 마음이다. 이렇게 하여 ‘고양 가와지볍씨’가 탄생하였다.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김수원 님은 현장에 자주 들러, 우리와 차를 나누는 시간도 갖게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 6·25 전쟁 때 토탄을 캐서 땔감으로 썼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사단은 그 지점을 2지구(당시 대화4리 299-2번지 일대)로 지정하고 포클레인을 동원하였다. 중장비로 약 2.5m를 파낸 지점에서 토탄층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이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볍씨를 발굴하였다(고양 가와지볍씨 Ⅱ호).
벼농사의 기원을 밝힌 5000년 전 볍씨
고양 가와지볍씨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손보기 교수는 볍씨 출토지점에 있던 숯을 다른 시료들과 함께 미국의 저명한 베타Beta 연구소에 보내 연대측정을 의뢰하였다. 고양 가와지볍씨는 5020년 전(MASCA 이론으로 계산한 연대)으로 측정되어, 우리나라 볍씨 연구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되었다. 그동안 여주 흔암리 출토 볍씨를 근거로 벼농사의 기원을 청동기시대로 봤지만, 5000년 전인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벼의 육종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 박태식 박사(1948~2013, 농촌진흥청 연구관 겸 충북대 선사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는 당시 외형적인 형태 관찰과 크기 비교 등에 머물러 있던 벼 연구를 넘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고양 가와지볍씨를 해석했다. 1994~1995년 그와 함께 진행한 공동연구 내용을 소개하면, 가와지유적 1지구에서 발견된 약 5000년 전 볍씨(고양 가와지볍씨 Ⅰ호)들은 장립형(indica)과 단립형(japonica)으로 분류할 수 있고, 2지구에서 출토된 약 3000년 전 볍씨(고양 가와지볍씨 Ⅱ호)들에서는 점차 단립형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5000년 전보다 3000년 전에는 단립형을 더 선호하였고, 이러한 경향이 지금까지도 계속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박태식 박사는 호주국립대(ANU) G. B. Thompson 박사의 이론(1992)에 따라 재배벼와 야생벼의 소지경小枝梗2) 상태를 전자주사현미경(SEM)으로 비교 검증한 결과, 야생벼의 낟알이 자연적으로 잘 떨어지는 매끄러운 탈립성의 소지경과는 다르게, 사람이 목적을 갖고 수확한 거친 재배벼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게 5000년 전과 3000년 전의 고양 가와지볍씨 모두가 ‘재배벼’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농업고고학의 큰 학자인 안승모 교수는 “일산의 고대 벼 자료는 고고학자와 자연과학자의 학제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고, 한국의 고대, 특히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입형 그리고 유전자의 벼가 재배되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평했다(2001).
2) 소지경: 벼 줄기와 낟알을 연결하는 꼭지 부분.
‘고양 가와지볍씨’ 발견, 그 후
고양 가와지볍씨를 ‘재배벼’로 증명하는 일을 마치고, 이에 관한 내용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박태식 박사와 필자는 《성곡논총》(1994), 《농업과학논문집》(1995, 농촌진흥청)에 볍씨의 고고학적 특징과 육종학적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 내용은 일본의 주요 신문인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1면과 12면에 크게 보도되어, 아시아의 주요 선사시대 볍씨 연구자료로 소개되었다.
1996년에는 볍씨 가운데 가장 양이 많은 청동기시대의 볍씨 13톨을 세계 쌀 연구의 총본산인 국제미작연구소 박물관에 전시하여 고양 가와지볍씨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렸다. 또한, 1997년 10월에 중국 강서성 남창시에서 열린 ‘제2회 농업고고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고양 가와지볍씨를 외국의 큰 국제회의에서 발표하고, 강서성TV에 출연하여 이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고양 가와지볍씨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하여 지자체도 큰 힘을 실었다. 2013년, 고양시는 ‘고양 600년 기념’을 맞이하여 고양 가와지볍씨와 관련한 학술회의와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농심테마파크 전시관’을 리모델링하여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필자를 명예관장으로 위촉하였다. 5년 동안 박물관 팀의 많은 노력으로 아시아에서 유일한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는 영광도 갖게 되었다(2019).
고양시 농업기술센터와 경기도 농업기술원은 2017년 ‘가와지 1호’ 육성 업무협약을 체결하여 고양 가와지볍씨를 재현했다. 고양시 특화 품종인 가와지 1호가 서울 롯데백화점에 출시되고 미국에 수출되기까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모든 분들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볍씨 연구에 큰 획을 긋는 업적이라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한편, 고양 가와지볍씨는 그 뒤로 충주 조동리볍씨(1996·1997·2000년 조사, 8000년과 3000년 전)와 청주 소로리볍씨(1997~1998·2001년 조사, 1만 5000~1만 7000년 전) 발굴 등에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하여 큰 연구성과를 얻게 되었다. 우리나라 볍씨 연구의 발달계통도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고양 가와지볍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고양 가와지볍씨 역할의 중요성을 크게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의 오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유적과 유물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을 만듦에 강경례 선생((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의 큰 도움이 있었기에, 이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필자 이융조: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아시아구석기학회 명예회장, 고양 가와지볍씨박물관 명예관장, 고양특례시 명예시민. 한평생 농부였던 아버지께서 “쌀 한 톨의 의미를 알거라” 하시던 말씀을 학자로서 되새기며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