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경철
지난 2019년, 대산농촌재단에서 ‘협동과 연대로 전환하는 동아시아의 농農’이라는 주제로 해외연수를 실시했다. 나는 현장지도교수의 신분으로 연수에 참가해 연수생들과 함께 대만과 중국의 남방지역을 둘러보며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농업과 농촌 현장을 체감했다. 종교단체가 주도하는 대만의 유기농업, 생태문명에 눈을 뜬 젊은이가 주도하는 중국의 향촌건설 등 나라와 지역은 다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연수는 이듬해 발생한 코로나19로 중단됐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나에게 많은 생각과 과제를 던져줬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농업과 농촌 현장은 지난 세기 동안 빠른 산업화, 도시화, 개방화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지금은 생과 사의 중대한 갈림길에 들어선 것 같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공통으로 식량자급률의 급격한 저하, 농촌인구의 급격한 감소, 도시와 농촌 간 격차 확대, 도시보다 심각한 생태환경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되었는가. 이것은 나의 문제인식이기도 하고 많은 학자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중국 삼농 문제 권위자인 원톄쥔溫鐵軍 교수는 중국의 삼농 문제가 심각한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세기 동안 자본주의체제든 사회주의체제든 관계없이 정부 주도로 일관되게 추진해온 경제성장 지상주의, 즉 ‘백년의 급진’을 지속해온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사회주의 시기 추진해온 많은 정책들, 예를 들어 합작사(협동조합)운동, 대약진운동, 하방下放운동 등은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한 정책노선이라기보다 경제쇠퇴 시기 농촌의 희생을 통한 산업자본과 도시자본의 육성이었고, 이러한 정책은 중국의 여건을 충분히 감안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서구의 경제성장 논리의 맹목적 수용의 과정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정부든 보수정부든 농업과 농촌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요즘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말보다는 ‘지속 가능성’ 자체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이 대두되고 있다. 즉,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사회가, 우리 농촌이 멸절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가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기후위기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각종 재난과 재앙,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 문제만 보더라도 인류가 얼마나 초라하고 우매한 존재인가를 절감한다.
내가 1993년 장학생으로 인연을 맺은 후 지난 30년 동안 지켜본 대산농촌재단은 우리나라 어느 농업·농촌 관련 단체나 조직보다 선구적으로 전환의 시대, 새로운 농업과 농촌을 추구해왔다. 재단 설립 초창기에는 낙후된 농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산업주의 농정을 이끌기도 했지만,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농업과 농촌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연대와 협동을 기반으로 한 농의 지속성을 도모해 왔다. 정부에서는 도외시한 흙과 생태를 살리고, 생태를 중시하는 중소농의 자립과 연대를 통해 지속 가능한 생명공동체를 갈구해 왔다. 이는 동아시아 농업과 농촌이 가지고 있는 생태자립적 소농경제의 가치와 협동을 미래적 가치로 복원하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대산 신용호 선생께서 돈이 없어도 온갖 희생을 통해 자식들을 가르치려 했던 우리 부모들의 희원을 사업에 접목해 큰 성과를 이뤘듯이, 대산농촌재단도 당장의 경제적 가치로는 환원되지는 않지만 이를 지키지 않으면 미래도 담보할 수 없다는 사명으로 새로운 농을 희원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교육하고 이들 간 연대를 통해 우리 사회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 대산 선생께서 없는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며 갔듯이 대산농촌재단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대산 선생의 뜻을 농촌 현장에서 실현해 가고 있는 대산농촌재단과 그 길을 동행할 수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걸어온 길보다는 걸어야 할 길이 더 멀고 험하기에, 대산 선생 영면 20주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본다. 대산농촌재단과 다양하게 인연을 맺은 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힘을 모으고 연대해 나가길 기대한다.
필자 박경철: 충남연구원 연구위원
대산농촌재단 2기 장학생으로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농촌사회, 농촌개발, 중국 농촌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농農과 생명, 그리고 기본소득을 토대로 한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 풍요로운 농촌을 꿈꾼다. 2023년에는 연구년을 맞아 현재 베이징대학에서 중국의 향촌진흥정책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