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를 먹던 날

‘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지난 호 필자 노석미 씨에 이어 조두진 씨가 ‘농촌에 관한 단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쓴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글·사진 조두진

ⓒpixabay

아침저녁으로 돼지죽을 날랐던 친구
  나는 농촌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돼지 한 마리, 닭 여러 마리가 있었다. 다른 집들도 비슷했다. 주민들 대부분 집에서 돼지, 소, 닭을 몇 마리씩 길렀고, 가정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채소를 재배했다. 벼, 배추, 무처럼 주요 재배 채소가 있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작물을 조금씩 재배하는 ‘작은 농사’였다. 요즘도 농부들은 판매용 주력 작물 외에 집에서 필요로 하는 작물을 심지만, 옛날보다는 그 종류가 줄어든 듯하다.
  우리 마을에서는 어떤 집에서 잔치나 제사를 위해 돼지를 잡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돈을 주고 사서 먹는 방식은 드물었고, 이번에 내가 고기를 얻으면, 다음번에 우리 집에서 돼지를 잡을 때 돌려주는 식이었다. 아니면 잔치나 제사상을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도와주고 고기를 받기도 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잔치나 제사상 차리는 것을 돕는 것은 아니었다. 옛 시골집의 대소사에는 멀리서 찾아오는 친인척들이 많았고, 마을 손님들도 많았다. 차려야 할 음식은 많은데, 요즘처럼 전문적으로 집안 행사를 도와주는 업체는 없었다. 그래서 누구 집에 대소사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으레 도왔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 날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을 어느 집에서 돼지를 잡는 날 먹었다.
  채소나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에도 여름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요즘과 달리 내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사람들은 여름에는 여름 과일을, 가을에는 가을 과일을, 봄에는 봄 채소를, 겨울에는 겨울 채소를 먹었다.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급에 따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때때로 부족함이 있었지만 생활방식은 느긋했고, 삶은 자연 흐름에 가까웠다.
  돼지고기가 저녁 밥상에 올라오면, 나는 누구네 돼지가 오늘 삶을 마감했는지 알았다. 그 돼지에게 아침저녁으로 돼지죽을 챙겨 준 친구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로 그날 돼지를 잡았으며, 돼지를 잡는 일에 동네의 어떤 아저씨들이 수고했는지도 알았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성인이 된 뒤에도 나는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 아들이 열 살쯤 됐을 무렵까지 먹었던 돼지고기 총량은 내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먹었던 돼지고기 총량보다 많았을 것이다. 고기가 흔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들이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아들은 나보다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지만, 나만큼 돼지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녁 밥상에 오른 돼지고기를 보며 나는 한 생명의 죽음과 동네 어른들의 수고, 어떤 집의 잔치나 제사 같은 대소사를 생각했다. 아침저녁으로 돼지죽을 날랐던 내 또래 아이의 비통해 할 얼굴도 떠올렸다. 우리 집 돼지를 잡던 날, 나도 오래 슬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아들에게 식탁에 오른 돼지고기는 엄마가 돈을 지불하고 마트에서 사온 상품이었고, 돼지고기 요리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생명도, 수고도, 추억도, 미안함도, 고마움이나 아쉬움도, 슬픔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의 아이들이 돼지고기를 먹을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타인의 수고를 알고, 눈물 글썽한 소년의 눈망울을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느낌도, 고마움도 모른 채 고기를 먹고, 야채를 먹고, 자동차를 타고, 품질 좋은 옷을 입고, 따뜻한 온수를 쓰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구시 교육청과 매일신문사가 공동으로 운영한 ‘대구도시농부학교’ 전경. 필자 는 이 농부학교를 2013년 7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운영했다.
대구시 교육청과 매일신문사가 공동으로 운영한 ‘대구도시농부학교’ 전경. 필자는 이 농부학교를 2013년 7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운영했다. ⓒ조두진

여러 가지 일을 할 줄 아셨던 아버지
  고향에 살던 시절, 내 아버지는 일과 중 많은 시간을 논과 밭에서 보내셨지만 5일마다 시장(오일장)에 나가 당신이 재배한 쌀, 무, 배추, 시금치, 감자를 파셨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사오셨다. 돼지와 닭을 기르고 잡는 일도 아버지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농부이자 축산가였고, 상인이었으며, 생산자이고 동시에 소비자였다. 웬만한 농기구는 직접 만들고 수리하셨다. 황토와 짚을 섞어 황토벽돌을 만드셨고, 매년 겨울 끝 무렵이면 짚으로 이엉을 엮어 창고와 헛간 지붕을 새로 이으셨다. 덕분에 내 아버지는 여러 분야의 일을 아셨고, 여러 사람의 일과 그들의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이해하고 계셨다. 특별히 영민하셔서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일을 통해 그들의 삶에 공감하신 덕분이었다.
  기술발달과 전문화, 세분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덕분에 우리는 편리하고 안전한 생활을 누린다. 자동차 제조공정에 참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고, 부품 하나 갈아 끼울 줄도 모르지만 차를 편리하게 이용한다. 내 전문 분야에서, 내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기만 하면,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상품을 얼마든지 구하고 그 편리를 누릴 수 있다. 사실은, 다른 분야를 알려고 들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내 전문 분야에만 집중해 전문 지식과 기술을 심화할수록, 내가 전혀 모르는 다른 분야의 생산물을 더 많이, 더 편리하게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그 방향을 지향하고, 매일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 살기 좋은 세상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전문화와 세분화, 효율성과 대량생산으로 풍요를 누리는 대신 우리는 무언인가를 잃어버렸다. 내 전문 분야 외에 다른 분야를 쳐다볼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민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시간에 내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득이다. 사람이 마치 부품처럼 기능하는 셈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타인의 생산활동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멀어졌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타인의 일과 수고는 정서적인 면에서 ‘무’가 되었다. 나는 오직 비용을 지불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타인의 삶도, 존재도 점점 ‘무’가 되어 간다.
  농사의 목적은 먹고 살기 위해서다. 그러니 전문성과 효율성에 바탕을 둔 대량생산을 결코 멀리할 수 없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나라에서 농사는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양식 생산’ 너머의 또 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농사를 통해 이웃을 바라보고, 타인에게 공감하고, (부품적 역할에서 벗어나) 어떤 일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농사를 통해 ‘양식’, ‘돈벌이’ 너머의 가치를 찾자고, 모두가 농부가 되자는 말은 아니다.

대구시 수성구 고산도서관의 ‘도서관 밖 도서관’ 텃밭 프로그램. 2022년 11월, 어린이들이 수확한 배추를 옮기고 있다. ⓒ조두진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말 거는 이웃들
  꽤 오랫동안 텃밭 농사를 지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마당’이다. 내 고향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당이 있었다. 마당은 각자 주인이 있는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조금은 공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 누구라도 이웃집 마당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올해 농사에 대해, 날씨에 대해, 마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이웃이 내 방으로 불쑥 들어온다면 내 공간을 침범당했다는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밭으로 일하러 나가던 이웃이 내 집 마당에 불쑥 들어와도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텃밭 농사가 그렇다. 낯모르는 사람의 텃밭 언저리에 서서 “배추가 아주 잘 자랐네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텃밭 농부는 온갖 이야기를 서슴없이 늘어놓는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보면 “맛 좀 보실래요? 조금 드릴까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조금의 의심도 없이, 채소 가꾸는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기뻐한다. 공동 텃밭에 나가보면, 이른바 경력이 좀 된 텃밭 농부들이 열심히,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초보 농부에게 농사법을 전수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텃밭은 전문화, 세분화, 대량생산에 쫓기는 현대인에게 비전문, 전체 조망의 재미와 가치를 선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은 면적에 이 작물, 저 작물을 동시에 기르니 작물 제각각의 자람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계절의 미묘한 변화, 낮과 밤 길이 차이를 여러 종류의 채소들이 민감하게 감지해서 알려준다. 면적이 작으니 살충제 대신 손으로 해충을 잡아낼 수도 있다.
  규격화된 채소 생산이 목표가 아니니,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작업하는 대신 스스로 궁리해서 작업하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간단한 농기구도 직접 만들어보고, 철물점에서 파는 농기구를 나의 필요에 맞게 변형하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제품 생산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던 사람들이 작업 전체 과정을 조망하고,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잉여를 활용하는 즐거움도 있다. 텃밭 채소는 나오는 시기도 크기도 들쭉날쭉하다. 솎아낸 어린 채소는 다 자란 채소와 달리 그 특유의 맛이 있고, 쓰임이 있다. 햇빛을 충분히 받아 익은 토마토는 그 맛이 유통과정에서 컴컴한 상자 속에서 익은(이른바 숙성된) 토마토와 비교할 수가 없다. 가뭄 속에 오랜 시간 느리게 자란 상추의 쓰고 질긴 맛은 바쁘게 자란 ‘물컹 상추’와는 전혀 다르다. 가을 끝에 한꺼번에 수확한 무는 무청 따로, 무 뿌리 따로 갈무리해 시래기로, 무말랭이로, 무차로 먹을 수 있다.
  열 평(33㎡) 텃밭 농사만 지어도 한 가족이 먹고 남을 만큼 채소가 쏟아지니, 이웃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 아파트 공동 현관에 수확한 상추를 여러 봉지에 나눠 담아 ‘누구든지 가져가세요. ◯◯◯호 텃밭 농부’라고 써 놓으면 끝이다. 처음엔 우물쭈물하던 아파트 주민들이 이내 단골손님이 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멀뚱멀뚱 딴 데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이웃이 된다. 도심 텃밭이 ‘시골집 마당’으로 변하는 셈이다.
  21세기 한국인이 1960년대, 1970년대 농촌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도시인들이 모두 귀농, 귀촌할 수도 없다. 하지만 도심에서도 농촌에서 누리는 가치를 누릴 수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작은 농사’, 즉 텃밭 가꾸기라고 생각한다. 텃밭을 가꾸다보면 도시 이웃뿐만 아니라 낯모르는 시골 농부의 수고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조두진필자 조두진: 소설가, 텃밭 농부
지은 소설은 《도모유키》, 《능소화》, 《몽혼》, 《아버지의 오토바이》, 《북성로의 밤》, 《결혼면허》, 《마라토너의 흡연》, 《진실한 고백》 등이 있다. 지은 농사책으로 《텃밭 가꾸기 대백과》, 《소농의 공부》가 있다. 2013~2020년 대구도시농부학교를 운영했고, 2022년부터 ‘도서관 밖 도서관(대구시 수성구 고산도서관)’ 텃밭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