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진남현
‘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지난 호 필자 이영민 씨에 이어 진남현 씨가 ‘다채롭게 즐기는 농(農)’을 주제로 쓴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내가 선택한 처절한 자유
그때는 몸이 참 가벼웠다. 중요한 옷과 짐은 등산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고, 재산을 모아봐야 100만 원이 전부인 시절이었다. 잃을 것은 없고, 더할 것만 있었다. 가방 하나와 100만 원, 26살의 젊음. 2016년,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전북 완주군으로 내려왔다.
농사를 지으면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고 생각했다. 먹으면 살 수 있고, 살아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보이는 모든 어르신에게 인사하고, 들어오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6개월쯤 지나니, 완주라는 공간이 어렴풋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전 재산은 3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나는 모든 재산을 투자하여 20년 넘은 중고 트럭을 하나 장만했다. 트럭이 생기니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늘었다. 견문이 빠르게 늘었고, 나에게 맞는 농토는 무엇인지, 어디에 가면 얻을 수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완주로 내려와 1년이 흘렀다. 직접 와서 부딪쳐보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눈치 보지 않고, 쫓겨날 걱정 없이 살 땅이었다. 목표가 명확해지면 삶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해 겨울,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고산면 율곡리에 있는 산골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산 너머 골짜기라 부르는, 사람은 살지 않는 산짐승들의 낙원이었다. 처음 그 땅을 보았을 때가 아직 생생하다. 멀리 보이는 산,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 계단처럼 이어진 논, 밭. 이곳이라면 가세를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싶었다. 산속 농토는 어르신들에게는 경작하기 힘든 땅이다. 마침 내 눈에 딱 맞는 그 땅을 살 기회가 생겼다. 물론 대출로 산 영광이었지만 귀농 2년 차에 지주가 되었다.
산골에서 살기 위해 처음 필요했던 것은 비바람을 막아줄 방 한 칸이었다. 농사만 산에서 짓고 집은 마을에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밭이 멀어지고, 눈칫밥 셋방살이는 계속될 것이었다. 시간이 걸려도 내 손으로 집을 짓는 기술을 익히면, 그것이 재산이 되리라 믿었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절단기와 엔진 톱을 장만했다. 산속에 쓰러진 나무들을 잘라 오고, 흙과 짚단을 모아 초막을 하나 지었다. 두 달을 힘써 지은 방 한 칸에 누우니 발바닥이 벽에 닿고, 머리가 맞은편 벽에 스쳤다. 보잘것없어도 고단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몸을 누일 방이 있어 좋았다. 그즈음에 비로소 땅도 만족스럽게 경작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막에서 불을 지피며 1년을 살았다. 이곳에서는 눈치 볼 일이 없었다.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웠고, 여름에는 땀이 마르질 않았다. 지붕에는 쥐가 살고, 화장실에서는 뱀이 나왔으며, 밤이 되면 뒷마당에서 멧돼지 숨소리가 들렸다. 온갖 벌레에 물어뜯기며 이름 모를 열병으로 앓아눕고, 피부에선 진물이 나오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며 버텼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물러설 곳을 몰랐다. 여기서 또 자유를 잃어버리면 망가진 몸과 구속된 삶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버텼다. 방을 한 칸씩 늘려 지으며, 2년쯤 버티니 부족해도 살 만해졌다.
혼자 살 수 없다
농사는 사업이다. 땅에 종자를 사서 심고, 퇴비와 비료, 농약을 사서 때에 맞춰 뿌려야 작물을 거둔다. 그런데 방 한 칸 없는 인생에 투자가 웬 말인가. 비료나 농약은커녕, 씨앗 살 돈도 없었다. 자연히 돈이 들어가지 않는 농사에 관심이 생겼다. 고산면에는 기계도 쓰지 않고, 화학비료도 농약도 주지 않고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게 무슨 농사냐 물어보니 ‘자연농업’이라고 했다. 그들의 집에는 종자를 담은 포대들이 여러 자루 쌓여 있었다. 자연농업으로 농사짓는 데는 토종종자가 좋다고 했다. 토종종자는 한 번 심으면 씨앗을 받아서 다음 농사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토종종자와 자연농업, 무일푼의 농군이 선택할 수 있는 농사는 이것뿐이었다.
아무리 생태농업이라도 무턱대고 흙에 씨앗만 뿌려서는 저절로 싹이 돋지 않는다. 농사에는 심고 거두는 때가 있고, 쉽게 일하는 꾀가 필요하다. 자연농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동네 어르신들의 농사를 눈동냥 하며 때와 꾀를 배웠다. 처음에는 따라 하는 게 제일이다. 마을에서 들깨를 심으면 따라서 심고, 벼를 거두면 같이 거뒀다. 몇 년이 흐르니 농사의 때는 얼추 몸에 익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농사는 쉽지 않았다. 혼자 넓은 농장을 경작하는 것은 고되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하다못해 담소라도 나누면서 호미질해야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혼자 삽질하다가는 10년이 흘러도 제자리에 있겠다 싶었다. 같이하자. 처음에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일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와주러 오는 벗들에게 의존하는 것도 한두 번이다. 나와 뜻을 맞춰 평생을 함께할 사람,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맨몸으로 산에 들어와 방 한 칸을 만들고, 그 한 칸들이 모여 집이 되고, 집이 옥답을 만들고, 옥답은 식구를 들였다. 초막이 나무집으로 바뀌던 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살림을 합쳤다. 이듬해 처음으로 보리를 심어, 보리가 익어가던 오월 밭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식을 올렸다. 아내와 함께 산속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단칸방에서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자식을 낳아 기르니, 농사의 이치도 더 쉽게 다가왔다. 그래서 옛말에 농사 중 농사는 자식 농사라고 하나보다. 그 뒤로도 작은 방에서 아궁이를 지펴가며 5년을 살았다. 누추하고 고단했지만 행복했다.
처자식이 생기니 천장이 높아지고, 집이 넓어졌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니 경작하는 농토도 늘었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모아 방을 늘리고, 경험이 쌓여 농토는 점차 그 형상을 갖췄다. 귀농 후 4년쯤 흐르자, 드디어 가족이 먹고도 남는 작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팔아 돈을 벌었다. 농사로 생계비가 생기자, 산 아래 내려가 하던 일들을 줄여 갔다. 조금만 더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흐르면, 이렇게도 살아지겠다 싶었다.
무너진 마음을 채워준 것은
오만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 징후를 감지한 것은 대출로 산 땅의 원금을 갚기 시작하던 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첫째 딸은 말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옹알이가 3년 넘게 이어졌다. 그때부터 전국의 병원을 돌며 온갖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유전자가 결손되어 일어난 발달장애라고 하였다. 치료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몸의 고통은 의지로 이겨내지만, 마음이 무너지면 일으켜 세워줄 힘이 없다. 하루하루 마음에서 불같은 화와 끝을 모르는 우울함이 밀려오고, 무력함이 모든 날을 채웠다.
자연농업으로 경작하던 2000여 평의 땅은 풀밭으로 변했다. 사람이 손을 놓은 시골집이 망가지는 데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집 주변에 풀이 자라고 땔감은 젖어 불이 붙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봄에 심은 작물을 가을에 거두지 못했다. 지나가던 이장님은 왜 나락을 거두지 않는지 답답해했다. 방치된 논 앞에서 이장은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며칠 뒤 이장님이 마을회관 앞을 지나가던 우리 가족을 불러 세웠다. 그곳에는 마을 경로당의 수장, 노인회장이 트럭에 걸터앉아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는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100만 원이 들어있었고, 마을 어르신들의 이름과 각출한 금액이 적혀있었다. 병원비에 보태라고 하였다. 괜찮다고 고사하였지만 노인회장은 단호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을에서 힘을 모으는 것이니, 이럴 때는 받고 잘 살면 된다고 했다.
무너진 마음은 다른 이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인가. 이대로 주저앉으면 마을 길을 지나며 인사하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다시 논을 갈고, 밭을 일구며 살아갈 용기가 났다. 잘 사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무너지지 말고, 가족이 흩어지거나 배곯지 않으면 충분했다.
농장에는 자연농업에 더불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유기농업을 도입했다. 여유를 만들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자는 생각이었다. 유기농업을 시작하자 마을에 놀고 있는 농지들을 경작할 기회가 생겼다. 농지가 5000여 평으로 늘었고, 중고 농기계를 들였다. 자연농업만 고집할 때는 만날 수 없었던 많은 농부를 만났다. 그들에게 새로운 농사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니 농장의 풍경은 또 다르게 변해갔다.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때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마을에 대한 관심으로 자라났다. 내가 사는 마을이 궁금해지면서, 어르신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오갔던 마을 길은 눈이 오면 어르신들이 나와서 정리하고, 풀이 자라면 각자 암묵적으로 맺어진 구역을 정리하였다. 농촌 풍경의 정갈함은 할머니의 호미와 할아버지의 낫에서 나왔다. 폭우로 산이 무너지고, 둑이 터지면 각자 농기계와 삽을 들고 나와 길을 뚫고 방죽을 보수했다. 지금껏 내 땅만 보느라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보였다. 나도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있구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마을 덕분에 지금껏 버틴 것이었다. 알면 알수록 빚 중에 제일이라는 마음의 빚이 쌓인다.
농촌에선 사람이 제일 귀하다. 오래도록 버려진 농토도 다시 경작할 수 있고, 허물어진 집도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사람이 빈 곳은 다시 채우기 쉽지 않다. 요즘 들어 시골길을 가다 보면 이가 빠진 농토들이 보인다. 잘 정돈된 논둑 사이로 풀이 우거진 논밭이 그것이다. 마을에서 일익을 담당하던 건실한 어르신의 자리다. 내가 그의 빈자리를 운 좋게 메우고 있다. 그러나 내가 전 주인처럼 땅을 제대로 가꾸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의 전답을 보면 차이가 크다. 언젠가는 나도 1인분을 하는 농군이 되길, 그래서 언젠가는 마을 풍경의 한 귀퉁이라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시골 사람이길 바라본다.
필자 진남현: 너멍굴 농장 대표
전북 완주군, 산 너머 굴 같은 골짜기 ‘너멍굴’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산속 생태계 순환을 추구하는 유기농업으로 토종농산물을 키운다. 저서로는 《나는 너멍굴을 선택했다》(시대의 창,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