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보이는 것들

[크기변환]44

손연규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연구관
(제31회 대산농촌상 농업공직 부문 수상자)

  손연규 연구관을 따라 토양 조사 연구실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 올려진 수십 장의 지도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가까이서 보니, 지형도 위로 구불구불한 곡선이 새롭게 그려져 있었다. 어떤 토양이 분포되어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토양도’를 제작하는 과정이다. 약 1만 8000장의 국내 세부정밀토양도(1:5000)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는 아침이며 주말이며 틈날 때마다 지도를 그린다고 했다. 그가 웃으면서 덧붙인 농담에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국이 제 땅이니까요.”

토양도를 그리고 있는 손연규 연구관.
토양도를 그리고 있는 손연규 연구관.

토양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도록
  그는 1995년 농촌진흥청에 입사하여 30년 가까이 토양 조사에 힘쓰고 있다. 현지에서 토양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료를 채취하여 분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토양도를 제작하여, 토양을 어떻게 활용할지 해설하는 것까지 그의 역할이다.
  “도사가 되면 안 보고도 알아야죠. 땅을 파면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기서 어떤 흙이 나올 것 같다, 눈으로 먼저 찾아내요. 단순히 넘겨짚는 게 아니에요. 주변에 있는 식물도 보고, 지형도 보는 거죠.”

'흙토람(soil.rda.go.kr)’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토양 정보. 재단이 위치 한 신설동은 보리를 재배하기 적합한 땅으로 나와 있다.
‘흙토람(soil.rda.go.kr)’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토양 정보. 대산농촌재단이 위치한 신설동은 보리를 재배하기 적합한 땅으로 나와 있다.

  오랜 경력과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토양 정보 구축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토양환경정보시스템 ‘흙토람(soil.rda.go.kr)’의 데이터를 고도화하여, 농민들이 토양의 특성에 맞는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자료를 전산화하는 것도 토양 조사의 영역이에요. <아이언맨> 같은 영화를 보면 허공에 손을 대고 화면을 확대하고 축소하잖아요. 컴퓨터에서 토양도를 그렇게 볼 수 있도록 작업하고 있어요.”
  전산화된 토양도는 농업과 농촌뿐 아니라, 정부 각 부처와 기업, 교육계 등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어떤 생명이 살 수 있는 흙인지, 전선을 묻을 수 있는 땅인지, 탱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인지, 모두 토양도를 보고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통을 조사하고 있는 손연규 연구관. ⓒ농촌진흥청
독도통을 조사하고 있는 손연규 연구관. ⓒ농촌진흥청

우리 땅, 독도
  “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말소리는 듣지 않고, 저건 어떤 암석일 것이다, 이것만 쳐다보고 있어요. 모든 생각이 그쪽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 특별한 기회가 찾아오더라고요.”
  그는 2009년 독도에서 ‘독도통’을 발견한 순간을 떠올렸다. 독도통은 우리나라에서 391번째로 등록된 토양통이다.
  “독도에 가기 전에 울릉도 토양을 공부했어요. 초봉통, 사동통, 남양통 등 13가지 토양통이 있더라고요. 독도는 울릉도랑 묶여서 ‘초봉통’으로 분류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독도에 갔더니 뭔가 다른 토양이 보이는 거예요. 아, 이거다! 싶었죠.”
  새롭게 발견한 흙은 화산암 종류의 바위가 깎여서 만들어진 모래 성질의 토양으로, 독도 전체의 16.7%(10.5ha)와 울릉도 전체의 11.1%(808ha)를 차지하고 있었다.
  “2009년에 우리나라에서 동남아시아 토앙비료학회 행사가 열렸어요. 일본, 중국 등 10여 개 국가가 참여한 국제학술대회에 ‘독도통’을 발표한 거예요. 다음 해에는 한국토양비료학회에 논문을 냈죠.”

논·밭 유형별 토양 단면 등 토양 조사 및 분류에 관하여 살필 수 있 는 토양자원관.
논·밭 유형별 토양 단면 등 토양 조사 및 분류에 관하여 살필 수 있는 토양자원관.
토양자원관 앞에는 ‘한반도 토양의 기원’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나라 지역별 대표 암석을 볼 수 있다.
토양자원관 앞에는 ‘한반도 토양의 기원’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나라지역별 대표 암석을 볼 수 있다.
토양자원관 안에는 약 2000개의 토양 시료가 보관되어 있어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다
토양자원관 안에는 약 2000개의 토양 시료가 보관되어 있어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다.

경계를 뛰어넘다
  국제 협력 차원에서 추진하는 업무에도 큰 힘을 쏟고 있다. 요즈음 그는 세계토양분류체계(WRB, World Reference Base for Soil Resources) 책자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10월 완성을 기점으로, WRB에 크게 기여한 토양 과학자 피터 샤드Peter Schad 박사를 초청하여 학술회의를 열고, 이틀에 걸쳐서 현장 조사도 진행할 예정이다.
  “아시아농식품기술협력협의체(AFACI) 차원으로, 토양 조사가 덜 되어 있는 나라들의 지도를 그리는 큰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베트남의 커피 주산지에 대한 토양 조사를 우리가 할 수도 있는 거죠.”
  또한, 네덜란드에 이어 대한민국에도 세계토양정보센터가 설립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국내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토양통을 찾기 위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제 머릿속에 새로 발견할 수 있는 토양이 1000개가량 있어요. 실제로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니까,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죠. 퇴직까지 얼마 안 남았거든요. 일주일 간격으로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면서라도 해내려고 합니다.”

왼쪽부터 이단비 연구원, 손연규 연구관, 고우리·서병환 연구사. 손 연구관과 함께하고 있는 든든한 후배들이다.
왼쪽부터 이단비 연구원, 손연규 연구관, 고우리·서병환 연구사. 손 연구관과 함께하고 있는 든든한 후배들이다.

길을 잇기 위하여
  손오공처럼 머리카락을 뜯어 분신술을 쓸 수는 없더라도, 그는 자신의 길을 이어갈 후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양 분류는 토양 지질학에 가깝거든요. 지구 물리학, 지사학, 지형학을 다 알아야 하는데 이게 또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쪽에 오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의 아이디어로 2015년부터 농촌진흥청과 한국토양비료학회가 함께 ‘전국 대학(원)생 토양 조사 경진대회’를 열어 학생들의 토양 조사, 분류, 해설 능력을 배양해 왔다. 연구자들이 직접 이론과 실습 교육을 하고, 우수자에게 국제 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제공하는 등 토양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담긴 행사다.

전국 대학(원)생 토양 조사 경진대회 실습 교육 현장. ⓒ농촌진흥청
전국 대학(원)생 토양 조사 경진대회 실습 교육 현장. ⓒ농촌진흥청

  이날,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토양비료과 서병환 연구사는 2017년 경진대회에서 1등을 했던 수상자다. 그는 손 연구관과 함께 일하면서 “박사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저는 땅을 파봐야 어떤 토양인지 아는 사람이거든요. 박사님은 주변 환경만 보고도 어떤 토양인지, 어떤 상태인지 아세요. 토양뿐 아니라 전체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앞으로 제가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느껴요.”

  농촌진흥청에는 전국 곳곳에서 모인 약 2000개의 토양 시료를 보관하는 토양자원관이 있다. 그 앞에 세워진 세계토양학대회 기념비에는 “토양은 우리 발밑에 있는 더러운 흙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소중한 삶의 기반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람이 밟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서, 손 연구관이 살펴보는 삶의 기반을 상상해 본다. 누군가 먹고살기 위한, 누군가 뛰어놀고 싶은, 누군가 다시 돌아갈, 우리의 땅. 그가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구나, 싶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