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주강현
상부상조 없이는 불가능하던 벼농사
조선시대 농민들은 서로 돕고 사는 생활 속에서 두레·황두·소겨리·품앗이·수눌음·접·계 등의 다양한 형태의 조직으로 생활을 꾸려왔다. 그들 공동노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레다. 두레는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으로 김매던 고유의 풍습으로, 조선시대 농촌 어디서고 쉽게 눈에 띄던 대표 풍습이었다.
두레는 조선 후기 이앙법의 확산과 농업경제력의 성장에 힘입었다. 소농경영의 조밀한 농법을 행하던 조선 후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벼농사 인력을 공동으로 해결하던 풍습에서 기인한다. 자연마을 단위의 유일한 노동조직으로 조선 후기의 농촌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단순한 공동노동조직에 국한되지 않고 마을공동체문화를 배양시켰으며, 21세기까지 이어지는 풍물굿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김매기가 집중되는 여름철은 매우 더운 절기고, 뙤약볕에서 한꺼번에 많은 논을 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두레꾼은 풍물을 꾸려서 악기를 치고 신명을 내며 논두렁으로 들어갔다. 농민문화의 중심을 풍물굿이라고 하거니와 두레는 그 굿의 뿌리였다.
두레는 농사짓는 농민과 지배층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다. 소농경영의 조건에서 양반, 양민 할 것 없이 두레와 같은 강력한 노동조직 없이는 벼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 향약이 보급되기 시작해 후기로 오면서 강화되었고, 향약에서는 상부상조하는 동민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인구가 늘면서 자연마을이 확대되어 나갔고, 지배층 입장에서는 동계를 중심으로 마을 단위를 적절하게 묶고자 했다. 마을 운영에는 마을이나 문중의 공동소유재산을 관리하고, 공동으로 벼농사를 수행하고, 상례나 혼례를 치르는 관혼상제 기능이 중요했다. 두레 같은 공동노동조직은 마을 단위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조직으로 인정되었으며, 두레꾼들은 마을 다리 보수·공동 풀베기 등도 관장했다. 두레꾼들의 풍물은 농촌 문화생활의 근간이 되는 등 두레는 공동체의 자치적 성격을 분명히 하여 촌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했다.
조선시대 농민문화의 핵심은 두레문화
두레에는 농사두레와 길쌈두레가 있었다. 농사두레는 초벌·두벌·세벌 김매기의 김매기 두레, 풀을 공동으로 베는 풀베기 두레 등이 대표적이다. 대개 두레라면 김매기 두레를 뜻하며 지심두레라고 부른다. 김매는 횟수에 따라 초벌(아시매기·애벌매기)·두벌(이듬매기)·세벌(만물·만두레)로 나뉜다. 만물은 대개 세벌에 행하나 네벌에 가서 만물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만두레는 특별히 날을 잡아서 하는 경우가 많다.
두레꾼들은 두레의 최대 제축적 행사인 호미씻이를 백중(음력 칠월 보름)에 열었다. 그리하여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호시절을 만나 더운 여름철을 만끽했다. 개장국을 끓이고 씨름도 즐기며 들돌을 들어 힘자랑도 하면서 술 푸념으로 모처럼의 여가를 즐겼다. 백중이나 칠석은 그야말로 농민의 잔치였다. 백중의 본래 뜻은 힘겨운 여름 농사를 끝내고 발에 묻은 흙을 씻어낸다는 의미다.
백중놀이를 즐기면서 부르는 노동요에는 농민의 고통이 잘 드러난다. 백중놀이에는 한 해 농사를 중간 마무리하는 농민들이 힘겨운 삶의 애환을 풀어내는 한의 세계가 서려 있다. 백중놀이는 바로 그 한을 딛고서 신명으로 풀어내는 농민의 제축이며, 한여름의 가장 시끌벅적한 놀이판이다.
기세배, 두레싸움 따위도 널리 행해졌다. 농기 혹은 두레기는 대단히 큰 기구여서 마을에서도 가장 힘센 장정들만이 들 수 있었다. 두레농사를 지으러 나갈 때는 물론이고 두레패가 이동하는 곳에도 으레 두레기가 따라다녔다. 형두레와 아우두레, 선생두레와 제자두레 식으로 서열을 정해 마을 세력권을 형성했으며, 자기 마을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다부지게 두레싸움을 벌였다. 두레끼리 인사하는 예법인 기세배도 즐겼다.
논둑에서 두레밥을 나누어 먹는 푸짐하고 정겨운 정경도 빼놓을 수 없다. 한솥밥 공동체로 묶인 농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한 생활의 밑바탕에는 농민의 순박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있다. 두레놀이는 가난하고 힘들던 농민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미풍양속이었으며, 상부상조하는 기풍으로 마을공동체의 단결과 화합을 이끌었다.
두레의 유형과 두레꾼 조직 방식
제초제가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풀베기가 별 의미가 없지만, 손노동으로 풀을 제거하던 조선시대에는 농사일 대부분은 ‘풀과의 전쟁’이었다. 풀은 호미로 매거나 손으로 뽑았다. 호미가 가장 중요한 손노동 도구였다. 집약농법의 조밀한 노동조건에서 한국의 호미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호미 하나에 농사일의 모든 무게가 달려있던 조선의 생활이었다.
두레는 원칙적으로 성인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행하는 소동두레도 따로 있었다. 주로 남부지역에 있었는데 아이들은 심부름하거나 소를 돌보는 역할, 풀 베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들은 소동두레를 통해 농사일을 배워나갔다.
소년이 성장하면 들돌들기 같은 힘겨루기를 통과해 성인 노동력으로 대접받았다. 정자나무 밑에 모여 들돌을 들어 힘을 겨루고 장사를 뽑는다. 들돌들기를 통과한 일꾼은 상일꾼으로 인정받았다. 마을에 따라서는 공동노동조직인 두레의 숫총각을 뽑는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임금을 갑절로 받게 되는 척도도 되었다. 지금도 농촌 정자나무 밑에는 조선시대부터 사용하던 둥근 들돌이 더러 남아 있다.
두레는 원칙적으로 자연마을 하나에 하나씩 조직된다. 이에 반해 합두레는 여러 자연마을이 합동으로 두레를 짠다. 붙어있는 마을들이 뭉쳐서 하나의 두레가 된다. 합두레는 두 가지 경우에 조직한다. 첫째, 넓은 들판처럼 농경지를 공유하는 경우에 이웃 두 마을이 하나의 합두레를 짜는 사례가 간혹 있다. 두 마을의 힘이 대등할 때다. 통상 합두레라면 이 경우를 말한다. 둘째, 자연촌의 규모가 독립적인 두레를 조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구 수가 적을 때, 본 마을의 두레에 편입되어 함께 두레를 조직한다.
두레는 원칙적으로 풍물굿이 따라온다. 풍물굿이 없는 두레는 두레가 아니다. 두레가 소멸되기 직전 두레의 공동체성은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되, 풍물이 없는 두레가 잠시 이어지기도 했는데, 풍물이 없는 두레는 벙어리두레·소리 없는 두레·품앗이두레 따위로 불렸다. 두레 소멸 직전의 과도기적 존재였다.
조선 후기 여성들도 여성만의 길쌈두레를 조직했다. 모시두레·삼두레·두레길쌈·삼둘계·공동적마라고도 부른다. 공동작업과 민요, 공동회식은 곧바로 농사두레와 다를 것이 없다. 두레가 남성 위주인데 비해 삼두레는 여성 위주의 두레다. 그런데 남자도 삼굿에 참가해 도움을 준다. 이와 비슷하게 두레미엉(무명·명두레)도 있었다.
광범위하게 일상생활에 수반된 품앗이
두레 이외에도 다양한 공동노동관행이 있었다. 품앗이는 품을 ‘앗이’ 하는 노동관행이고, 품팔이는 품을 ‘팔이’ 하는 노동관행이다. 둘의 기원은 전혀 다르다. 품앗이류에는 일반 의미에서의 품앗이, 소를 중심으로 한 소겨리, 제주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수눌음, 길쌈에서의 길쌈두레 따위를 망라한다. 품앗이·소겨리·수눌음·길쌈두레는 각각 다른 노동형태 같지만, 내용은 똑같이 품을 주고받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중부이남 지방에 강고한 조직체인 두레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나머지 지역은 두레보다는 품앗이류 조직으로 묶여 있었다. 품앗이는 전국에 고루 분포된 노동관행으로, 밭농사 지대에 더욱 요긴한 방식이었다. 품앗이는 각 지역 사정과 작업의 성격, 시기 등에 따라 지극히 다양하다. 남쪽에서는 대개 품앗이라고 불렸지만, 함경도에서는 품들이, 평안도에서는 품바꿈이란 말도 쓰였다.
품앗이는 가족노동이 모든 노동방식의 기초가 되던 소농경영의 현실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타인과의 노동력 차용, 교환으로 해결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필요한 노동력을 타인에게서 빌어다 쓰고 이에 대한 답례로 응분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력 교환의 장이 마련되었다. 소농경영의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풍습이었고, 상부상조하는 생활 기풍으로 더욱 권장되었다.
품앗이는 모든 종류의 농경작업에서 행해지고 있으나, 농사에 쓰이는 품앗이와 농사일 외에 쓰이는 품앗이로 가를 수 있다. 품앗이의 작업대상은 매우 넓다. 파종·밭갈이·논갈이·모내기·가래질·논매기·밭매기·퇴비하기·피사리·보리타작·추수하기 같은 농사일 품앗이는 물론이고 지붕 헤잇기, 집짓기와 수리, 나무하기 같은 생활상의 품앗이, 염전의 소금일·제방 쌓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아무런 조건 없이 활용된다.
구성 인원은 적으면 2인부터 3인, 5인, 10인 이상, 혹은 20인 이상에 이른다. 네다섯 명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하는 게 보통이었다. 품앗이는 자연마을 내에서 행해지며 친소관계, 동족관계, 계층관계, 지역적 인접성 등에 의하여 결정된다. 품앗이 대상에서 상대방과 노동력을 1:1로 교환하는 관행은 마을민의 관습법에 의한다.
품앗이의 일종인 소겨리는 소牛를 ‘겨리’한다는 말이다. ‘겨리’는 ‘결結’이 연음화된 것으로서 소를 결합한다는 뜻이다. 강원도의 소개리·소제리, 함경도의 밭갈이제리 등이 있었다. 소겨리에 참가하는 것도 겨례든다·소품에 든다·권에 든다 등 지방마다 여러 가지로 불렸다. 소 가진 집과 소 없는 몇 집으로 조직하는 소겨리를 보통 소겨리라고 했으며, 겨리라고도 했다. 소겨리 분포는 밭농사가 지배적인 중부 이북지대인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일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부분적으로 중부이남의 일부 산간지대에도 보급되었다.
수눌음은 제주도 특유의 풍토에서 만들어졌다. 제주 풍토는 참으로 거칠다. 바람 많고, 돌이 많은 만큼 살기 어려운 땅이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힘든 노동은 역시 김매기로, 검질맨다고 한다. 제주도 속담에 ‘집안 식구가 모두 호밋자루를 잡을 줄 알아야 집안 살림이 넉넉해진다’는 말에서 제주도 농경에서 제초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제초를 공동으로 행하는 수눌음이 존재했다.
연자매와 말방애접도 중요했다. 연자매는 말방이·말방에·말가레 등으로 부른다. 자맷간은 마을의 중심거리에 세웠으며, 말방이집·말방에집·말가레집 등으로 불렀다. 연자매는 한 마을에 여러 개가 있었다. 번쇠(번우)도 일종의 수눌음이다. 봄 또는 조 파종이 끝난 여름에는 우마 사역이 필요 없기 때문에 우마를 초지에 방목한다. 우마를 이웃끼리 한데 모아 소관 목야지에 방목하는데, 그 임자들이 순번제로 이를 감시하는 것을 번쇠라고 한다.
제주도는 지표가 화산토로 덮인 까닭에 비가 내려도 모두 지하로 빠져 밑으로 흐르다가 해안에 이르러서야 용출한다. 따라서 중산간 마을에서는 공동으로 용수를 관리했으며, 마을은 용수를 관리하는 몇 개의 공동집단으로도 나뉘었다.
공동체 정신과 나눔의 정신은 길이 이어가야
두레의 소멸은 한국 공동체문화의 소멸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에 보편적이던 두레 관행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제초제의 등장으로 소멸했다. 인력으로 풀을 제거하던 공동노동에서 제초제로 대체된 것이다. 두레농사의 소멸은 생태농법의 퇴장을 의미했다. 두레가 소멸되자 임노동적 고지 같은 삯노동이 그 빈자리를 차지했으며 오늘날은 임금노동으로 완벽하게 대체되었다. 농촌에는 그나마 인력이 부족하여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빈칸을 채우는 실정이다.
농사일은 매우 힘든 노동이다. 그러나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체를 이어가는 풍습은 그 고통을 뛰어넘게 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삭막한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의 정신과 노동 유풍이 재인식되고 있다. 임금노동에 의한 철저한 노동방식이 강화될수록 공동체의 사회적 긍정적 기능은 살려나가야한다. 인간사회란 철저한 경쟁으로만 점철되는 것 같지만 인간 본능 안에는 상호 부조하는 심성도 함께 공존한다. 그 선한 정신이 두레 내에 존재한다.
오늘날도 두레는 많은 사회단체, 영농단체 등의 이름에 그 족적을 남기고 있으며, 두레풍물은 농악패에 그대로 유전되는 중이다. 농민문화가 쇠퇴한 오늘날 시점에서 두레가 뜻하였던 공동체노동과 나눔의 정신은 길이 이어가야 할 것이다. 농민문화의 지속 가능성을 두레정신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필자 주강현: 고려대 아세아연구원 연구위원, 전 제주대 석좌교수
농업민속학 전공자로 ‘두레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어업으로까지 연구를 확장하였다. 역사민속학을 개척하였으며 다양한 분야의 융복합연구를 진행해왔는데 농업·농민문화에 관심이 많다. 책 《농민의 역사 – 두레》를 펴냈으며, 현재 농민신문에 ‘주강현의 신농사직설’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