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짓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명의 필자가 집필한 에세이를 이어서 소개하는 코너로, 지난 호 필자 임재양 씨에 이어 김성신 씨가 ‘농촌에 관한 단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쓴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글·사진 김성신
중학생 시절에 소설 《상록수》를 만나고, 30대에 헬렌 니어링의 책을 읽으면서, 농촌에서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며 살았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마침 봉화에 비어있는 땅이 있어서 두 친구와 주말마다 열심히 밭을 만들고 작물을 심으며 3년 동안 농민의 삶을 경험했다. 이제는 도시를 떠나 오롯이 땅에서 땀을 흘리며 살면 좋겠다 싶을 때, 필연처럼 단양에 자리를 잡을 기회가 생겼다. 2012년, 우리 세 사람은 선 소나무 누운 소나무 앞에서 새로 이사할 집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농사와 김장
단양으로 귀농하고 첫 김장은 봉화에서 키운 배추로 했다. 10월에 단양으로 이사를 오면서 봉화에 심어 놓은 배추가 마음에 걸리던 참에, 마침 친구들이 놀러온 틈을 타 봉화에서 배추를 뽑아 가져왔다. 깜깜해진 저녁에 배추를 절이고 새벽에 씻으니 진딧물이 엄청났다.
“이런 배추를 절였단 말이야? 먹어도 되는 거야?”
배추를 시장이나 마트에서 샀다면 이런 배추를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제 모양을 갖춰서 자란 우리의 첫 배추가 기특했다. 농부의 마음이 들어온 날이다. 김장은 자급자족하는 삶의 기본이고 팜투테이블(Farm To Table, 농장에서 식탁까지)의 꽃이다. 김장을 하려면 8월에 씨앗을 뿌려 100일을 꽉 채우고 수확하는 배추와 무, 2월 씨앗 파종 후 100일이 넘는 육묘 과정을 거쳐 5월에 밭에 아주심기 후 8월부터 수확하기 시작하여 10월에 마무리하는 고추, 10월 말에 심어서 겨울을 나고 6월에 수확하는 마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쪽파, 대파, 갓도 필요하다.
오늘과 내일 날씨를 살피고, 새와 고라니에게 먹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벌레를 손으로 죽이면서 미안함과 두려움을 느끼며 얻은 농산물, 그리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왁자지껄 친구들의 보탬과 나눔까지 함께한다.
추억을 이어가는 김치
나의 소울푸드는 김장김치다. 그리고 김치말이국수, 김치밥이다. 엄마의 한 해 마무리는 늘 김장이었다. 연탄을 들이고 김장을 하고 나면 겨울 준비가 끝났다고 홀가분해 하시던 게 생각난다. 살얼음이 낀 김장독에서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손으로 쭈욱 찢어 막 지은 밥에 얹어 먹던 그 맛은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 최고이다. 새 독을 헐어 내온 김장김치는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김치말이 국수는 또 얼마나 맛있던가. 살얼음이 동동 뜬 맑은 김치 국물에 말아 먹었던 국수와 밥은 정말 잊을 수 없다. 김치를 송송 썰어 솥바닥에 깔고 그 위에 쌀 그리고 다시 김치를 넣어 지었던 김치밥을 하는 날이면 대문 밖까지 밥 짓는 냄새가 풍겨 집으로 일찍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서 한동안 김장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농장에 있는 미국인 우퍼들이 김치를 너무 좋아했다.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우고 김장 경험을 하고 싶어 해서 계획에 없던 김장을 하게 되었다. 고추를 말리고, 마늘을 다듬고, 배추벌레를 잡고, 배추를 절이고, 김장 속을 버무리고, 우거지를 덮으면서, 김장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커졌다. 김장으로 엄마와의 추억이 이어지고 그렇게 또 한 해를 마무리했다.
그때의 미국 친구들은 김장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김치가 너무 맛있고 아름답다며 가끔씩 연락한다. 올해도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에서 온 우퍼들이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함께 김장을 하고 내친김에 김치만두도 빚었다. 외국인 우퍼들이 한국 요리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중 최고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와 나물이라고 할 수 있다.
품앗이와 나눔의 잔치
우리나라 김치의 종류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지역별 김치가 다르고 집안마다 손맛이 다르고 재료 또한 다양하다. 지방마다 청방배추, 구억배추, 개성배추, 의성배추, 서울배추, 무릉배추, 게걸무, 반청무, 쥐꼬리무 등 토종배추, 토종무를 비롯해서 각종 채소로 담가 각 재료마다 풍미와 맛이 다른 갓김치, 파김치, 부추김치, 깻잎김치, 콩잎김치, 고춧잎김치, 박김치, 고들빼기김치 등이 있다. 기후와 지역 특산물에 따라 보관 방식이 달라지고, 젓갈의 쓰임과 양념의 조화, 버무림 방식도 다르다.
아버지 고향이 평양인 우리 집 김치는 슴슴하고 시원한 게 특징인데 경상도 김치와 전라도 김치는 그 맛이 사뭇 다르다. 유럽의 파스타가 지방마다 집안마다 각자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듯이 우리의 김치도 지역, 집안, 대물림되는 손맛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지닌다. 그뿐만 아니라 김치는 익어가는 시간에 따라서도 그 맛이 아주 다르고, 그해의 기후에 따른 배추 조직, 고추의 매운 정도, 소금의 맛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맛을 지닌다. 그리고 신기한 건 품앗이하는 사람들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김장은 농부,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 어부들의 노동 그리고 손맛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품앗이와 나눔의 잔치로 이어지며, 우리의 소중한 먹을거리이자 문화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이자 겨울을 따뜻하고 든든하게 해준다.
오늘은 김장김치 한 포기 꺼내서 김치밥과 김치전을 해 먹어야겠다.
필자 김성신(소나무): 11년 차 농부
2012년 단양으로 귀농하여 블루비, 산소리와 함께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블루베리, 양봉이 주 작목이며 자급자족을 위한 다양한 작물을 짓고 있다. 현재 ‘우프코리아’ 호스트 활동과 ‘댄스위드비’ 커뮤니티 활동 중이며, 벌이 살아가기 위한 환경과 토종종자, 허브에 관심을 갖고 생태마을을 만드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