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박경화
가을 추수가 다 끝나고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겨울 농촌 들녘엔 올해도 어김없이 ‘하얀 마시멜로’가 등장했다. 볏짚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비닐에 돌돌 말아놓은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마시멜로를 닮았다. 저 들녘에서 생산한 햅쌀 값이 올해는 비교적 많이 올랐다고 한다. 연례 행사처럼 겪는 봄 가뭄과 여름에 극심했던 폭우 피해로 같은 면적의 논에서 생산한 벼가 예년보다 몇 포대씩 줄었기 때문이란다. 다른 농작물 역시 기후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어릴 적 어린이날이 되면 텔레비전에서는 놀이동산에서 뛰노는 아이들이나 아름다운 동요를 부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농촌 어린이였던 나는 그렇지 못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는 화창한 어린이날은 하필 고추 모종을 옮겨심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공휴일에 집에서 노는 아이들까지 농사일에 일손을 보태야 했다.
온 가족이 이른 아침부터 고추밭으로 총출동해서 비닐을 씌우고 고추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지지대까지 세워서 야무지게 묶어야 비로소 하루 일이 끝났다. 나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모두 어린이날을 고추밭에서 보내야 했다. 왜 하필 어린이날은 공휴일이란 말인가? 차라리 나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어린이날은 곧 아동 노동의 날이었다.
따뜻한 봄, 사라지는 벌과 위기의 농업
그런데 요즘 고추 모종을 심는 시기는 4월 20일 무렵으로 15일가량이나 부쩍 앞당겨졌다. 기후위기로 봄철 날씨가 점점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고추 모종이 적당히 자랐을 무렵에 옮겨 심어야 잘 뿌리내리는데, 날씨가 따뜻해지니 비닐하우스에서 너무 웃자라서 농부는 마음이 급해진다. 문제는 적절한 시기에 맞춰 고추를 옮겨 심고도 갑자기 추워지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 등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농부는 마음을 졸여야 한다.
사과 재배지가 점점 북상하는 건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고, 바나나와 망고, 사탕수수 같은 아열대작물을 이젠 남해안 지역에서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는 11월에도 달려드는 모기에 시달리고, 4~5월 꽃가루받이를 열심히 해야 하는 꿀벌이 사라져서 과수원에서는 사람이 붓을 들고 일일이 고된 작업을 해야 한다. 꿀벌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농약 살포와 전자파 피해의 원인도 있지만 기후위기의 영향이기도 하다. 이상고온으로 따뜻해진 날씨에 꿀을 찾아 떠났던 꿀벌이 저녁 무렵이 되면서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자 자신의 벌통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얼어 죽기 때문이다. 꿀벌이 줄어들면 꽃가루받이를 제때 하지 못해서 우리가 즐겨 먹는 과일 뿐 아니라 다양한 열매작물, 면의 원료가 되는 목화의 수확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기후위기는 가뭄과 산불, 폭우, 폭염, 폭설 같은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이변으로 이어져서 농촌을 비롯한 전국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남해안을 비롯한 섬 지역에는 수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혹독한 가뭄이 해마다 반복되고, 더욱 규모가 커지고 잦아지는 산불은 숲과 마을을 태우고, 여름 장마기간에는 거대한 산사태와 흙탕물이 단숨에 농경지와 마을을 덮쳐서, 평생 일구어온 보금자리와 논밭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이재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기후위기는 지구촌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농사를 짓는 농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농민뿐 아니라 농촌에서 정성껏 생산한 농산물을 즐겨 먹는 도시 사람 모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탄소중립의 시작은 에너지 절약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기후변화’란 용어 대신 더욱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기후비상사태’, ‘기후위기’, ‘기후붕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기상청의 기후학자인 리처드 베츠 교수는 ‘지구온난화’는 마치 온실을 연상시키듯 지금의 기후위기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지구가열’이라는 직관적인 용어를 쓰자고 했다. 엄청난 온실가스를 배출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고 행동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지구촌에 닥친 우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 중 하나로 ‘탄소중립’이 등장했다.
탄소중립은 인간의 활동으로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최대한 줄이고,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를 다시 흡수하여 순 배출량이 0(Zero)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온실가스를 다시 흡수하는 방법은 온실가스 배출량만큼 숲과 같은 자연 흡수원을 만들거나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것이다. 또, 온실가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저장 기술 등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 세계 국가들은 2050년 탄소중립 사회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라별 목표치를 설정했다. 2019년, 우리나라도 2050년 탄소중립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탄소중립 사회의 시작은 바로 에너지 절약이다. 플러그만 꽂으면 전기에너지를 너무나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전기요금도 저렴하기 때문에 에너지 절약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에서는 LED 전구나 절전형 멀티탭, 절전형 타이머, 난방텐트, 에코팬 같은 절전형 제품을 사용하여 에너지 소비량을 줄일 수 있다. 또, 전기밥솥과 전기장판, 전기난로, 전기온풍기, 헤어드라이어 같은 전열기구의 사용을 줄이면 전기요금도 줄일 수 있다. 전기·전자제품을 살 때는 에너지 소비효율 1등급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실내의 온도계를 활용하여 여름철 실내적정 온도는 26~28℃, 겨울철은 18~20℃를 유지하면서 적절하게 냉방과 난방을 하면 건강에도 좋다.
건축물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웃풍이 심한 방이라면 바깥과 접해 있는 벽에 단열재를 덧대는 보강공사를 하고, 창문에는 단열 에어캡(뽁뽁이)을 붙이면 단열효과가 있다. 창문이 뿌옇게 가려지는 것보다 투명한 것을 원한다면 ‘열차단 단열 윈도우 필름’이 좋다. 이 필름은 여름에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태양열을 막아 실내온도를 낮추고, 겨울에는 실내의 난방열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반사하고 차단해준다.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는 2중 또는 3중의 고기밀 단열 창호를 선택하면 한결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다. 열손실을 막을 수 있게 창문에 외부 블라인드를 시공하는 것도 좋다.
여름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열기가 고민이라면 식물을 키워서 더위를 막는 방법도 있다. 창가에 나팔꽃이나 포도, 오이, 여주, 호박 같은 넝쿨식물을 심어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그린 커튼’을 가꾸면 한결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창밖에 화분을 나란히 놓고 덩굴식물이 타고 올라갈 끈을 연결하면 된다. 날마다 얼마나 자랐는지, 열매를 맺었는지 살피는 재미도 있다.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이라면 건물에서 쓰는 에너지의 양을 대폭 줄인 패시브 하우스를 짓는 방법이 있다. 패시브 하우스는 벽면과 지붕에 단열재를 두껍게 넣어서 건물의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단열, 벽이나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는 기밀, 열이 더 잘 빠져나가는 틈을 없애는 열교 차단 등을 이용한 건축 방식으로, 단열이 잘 되는 고성능 3중창 창호와 실내 공기를 환기하는 열회수 환기장치 등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건물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방법도 좋다. 지자체의 지원 사업 등을 통해서 지붕이나 벽면, 주차장 지붕 등에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여 건물에 필요한 전기를 얻고, 태양열을 이용하여 건물의 냉난방과 급탕시설에 이용하기도 한다.
마을이 함께 꿈을 꾼다면
유럽에서는 탄소중립 사회를 앞당기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그중 독일은 재생에너지 사업에 적극적이다. 독일의 펠트하임은 35가구에 130여 명이 살면서 농업과 축산업을 하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이곳은 태양과 바람, 가축 배설물 등을 활용한 재생에너지로 100% 에너지 자립을 이룬 마을로 유명하다.
1995년 대학생이었던 미카엘 라슈만 씨가 시 정부에 제안하여 처음으로 풍력발전기 4기(0.4㎿)를 세웠는데, 지금은 55기(2~3㎿)로 많이 늘어났다.(2023년 12월 기준) 풍력발전기는 연간 2억 5000만Kwh 전력을 생산하지만, 이 중 마을에서 소비하는 양은 100만Kwh이고, 나머지(99.6%)는 인근 대도시인 베를린과 포츠담에 판매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가축 배설물도 에너지원으로 이용한다. 바이오가스 공장을 설립하여 마을에서 키우는 소와 돼지의 배설물, 통밀과 옥수수 같은 잡곡 등이 원료가 되는 바이오가스로 난방열을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가축을 키우며 농사를 짓고 난방열도 얻고, 남는 찌꺼기는 친환경 비료로 쓰고 있다.
마을에서 12km 떨어진 곳에는 태양광 발전단지(솔라파크)를 만들었는데, 축구장 63개 넓이(45만㎡)에 1만 개 가까운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이 패널은 태양을 따라 방향을 바꾸는 추적식으로 전기를 생산하여 전력 생산량이 더 높고, 여기에서 생산한 전기(연간 약 280만Kwh)는 모두 외부에 판매하고 있다.
전력 판매수익은 마을에 환원되어 주민들이 이용하는 편의시설을 짓고 가로등 개선 사업을 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태양광 설비를 점검하는 일을 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도 만들어졌다. 또, 마을 주민들은 전기요금도 다른 지역보다 반 정도로 싼값에 이용하고 있다.
탄소중립 사회를 위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절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건의 생산과 유통, 쓰레기 처리 문제도 중요하다. 물건을 사용하고 폐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를 써야 하고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쓰레기 없는 마을이 등장했다.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는 산촌마을인 시코쿠 도쿠시마현의 가미카쓰 마을은 15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의 반 이상이 65세 이상의 노인들이다. 이 마을은 2003년에 이미 ‘제로웨이스트Zero Waste 마을’을 선포했고, 지금도 잘 실천하고 있다. ‘쓰레기의 발생 자체를 막자’는 목표를 세우고, 마을의 쓰레기를 13품목 45종으로 세분해서 나누고 있다. 플라스틱 페트병은 깨끗하게 씻은 뒤 본체와 뚜껑, 라벨을 분리해서 버리고, 그 외의 플라스틱 용기는 세척 후 말려서 차곡차곡 쌓아서 내놓는다. 종이는 신문과 잡지, 포장지, 광고용 전단지 등 종류별로 묶어서 내놓고, 캔류는 알루미늄, 스틸, 스프레이용 캔 등 재료와 용도별로 구분한다.
쓰레기는 잘 분리해 쓰레기처리센터로 모으고, 이 중 종이류와 금속류를 판매하여 연간 300만 엔(약 3000만 원)가량 마을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쓰레기를 분리배출 하는 습관이 생기자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부터 쓰레기 처리를 고민하면서 분리배출이 까다로운 물건은 잘 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쿠루쿠루(일본어로 ‘빙글빙글’이라는 뜻) 가게’가 있는데, 아직 쓸만한 물건을 기증받아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재사용가게다. 또, 물건을 수선하거나 재활용품을 이용하여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쿠루쿠루 공방’도 있다.
마을 식당과 카페에서도 쓰레기 줄이기를 함께 하고 있고,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매장에는 ‘제로웨이스트 인증 마크’를 주고 있다. 이렇게 2016년 가미카쓰 마을은 이미 재활용률 81%를 달성했고, 음식물 쓰레기는 100% 퇴비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여러 마을도 ‘쓰레기 없는 마을’을 선언하기도 했다.
2050년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2050년 탄소중립 사회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부터 미리 상상하고 준비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기후위기 걱정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탄소중립 사회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기발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필자 박경화: 환경 작가
낮은 산이 있는 경북 예천에서 들판을 뛰놀며 자랐고,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에서 환경 현장을 다닌 경험을 모아 환경 책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강의를 통해 전국의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 《지구를 살리는 기발한 생각 10》 외에 1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