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농촌 생활

장슬기 신선해농원 대표

  전남 진도군, 푸른 바다 위로 길게 뻗은 진도대교를 건너,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고요하고 아늑한 숲에서 뻐꾸기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부지런한 농민이 산자락에 일궈놓은 밭에는 튼실한 여름작물이 여럿 보였다. 장슬기 씨를 따라서 둔덕진 곳으로 걸어 올라가니, 화려한 꽃물결이 일렁이는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긴긴 겨울을 보낸 작약이 피워낸 함박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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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군, 장슬기 씨가 애지중지 가꾼 작약밭이 꽃으로 뒤덮였다. 오뉴월에만 볼 수 있는 눈부신 풍경이다.

똑 소리 나게 농사짓기
  장슬기 씨는 작약을 비롯해 갖가지 밭작물을 기르는 청년농민이다. 2013년 겨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약학대학원에 진학하고픈 마음을 접고, 부모님의 일을 돕기 위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제가 꽃밭에서 노는 것 같아도, 사실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에요. 부모님이 사슴 농장에 민물고기 양식장, 식당까지 했지만 잘 안되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맏딸인 제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향에 내려왔어요. 부모님이 청춘을 바친 곳인데 홀라당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장슬기 씨 가족은 서로의 지식을 모으고, 여기저기서 농사 기술을 배워가면서, 해마다 각종작물을 키워냈다. 그러다 보니 밭농사 규모가 2.5ha까지 늘어난 적도 있다.
  “한 가지 작물로는 목구멍에 풀칠도 못 해요. 이를테면 봄에는 비트, 여름에는 단호박과 옥수수와 고구마, 가을에는 구기자, 겨울에는 울금과 초석잠을 수확해요. 그래야 다달이 수입이 들어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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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에 빙 둘러싸인 신선해농원에는 다양한 생명이 조화를 이루며 산다. 차례로 고구마 밭, 코끼리마늘 밭, 사슴 농장, 구기자 밭.
울창한 숲에 빙 둘러싸인 신선해농원에는 다양한 생명이 조화를 이루며 산다. 차례로 고구마 밭, 코끼리마늘 밭, 사슴 농장, 구기자 밭.

  사슴, 말, 염소 등 다양한 가축도 기른다. 축사에서 나오는 배설물은 농사에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고구마 줄기, 비트 이파리, 배추 겉잎사귀와 같은 부산물은 햇빛에 말려서 동물 먹이로 줘요. 그리고 축사 정리할 때 배설물을 한쪽에 모아서 부숙시키거든요. 밭에 거름으로 뿌려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요. 사람들이 이 과정을 ‘자연순환농법’이라고 부르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농산물은 저장고에 쟁이지 않고 바로바로 판다. 무엇이든 제철에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다. 채소즙이나 과일즙도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내려서 보낸다.
  “소비자가 우리 농장을 기억하게 하려면, 연중 판매하는 가공제품이 있어야겠더라고요. 엄선한 재료로 즙을 짜서 팔고 있어요. 한 번 맛본 고객들의 재주문율이 어마어마합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구나, 뿌듯한 생각이 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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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슬기 씨는 농촌에서 자신의 꿈을 색다르게 펼치고 있다.

농민이 가꾸는 아름다운 농촌
  2016년, 그가 약 1만㎡(약 3000평) 땅에 작약을 심은 이유는 뿌리를 캐기 위해서였다. 작약 뿌리는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되며 경련억제, 진통, 면역조절 등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약을 심고 5년 뒤에 뿌리를 수확할 때가 왔지만,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농산물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때 작약 시세가 떨어졌어요. 중장비값에 인건비까지 더하면 수지가 안 맞더라고요. 조금만 더 놔두자, 했다가 4년이 넘었어요. 그러다 기회가 온 거예요. 진도군이 ‘365일 꽃피는 진도 만들기’ 사업에 쓸 꽃이 필요했는데, 우리 농가만큼 작약꽃이 많은 집이 없었거든요.”
  작약꽃 판매를 계기로 ‘경관농업’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방문객이 꽃밭을 둘러볼 수 있도록 길을 내고,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평상과 벤치를 설치했다. 봄에는 작약, 여름에는 수국, 가을에는 해바라기가 피도록 농장을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농업은 기본적으로 먹거리 생산이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농업이 가진 다원적 가치를 바라보게 된 거예요. 농촌 경관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고 싶어요. 저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정말 좋은데, 이 즐거움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2024년 5월, 작약꽃이 탐스럽게 피는 때를 골라서 팜파티(Farm Party)도 열었다. 약 100명의 참가자가 작약밭에 모여서 꽃놀이를 즐겼다. 
  “행사 전날까지 비바람이 몰아치고, 주차장은 온통 진흙탕이었어요. 새벽부터 날이 개어서 천만다행이었죠. 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어요. 작약꽃으로 꽃다발을 만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간식을 먹었어요. 친척동생 덕분에 가야금 연주도 들을 수 있었고요. 다들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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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팜파티 참가자들이 작약밭에서 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2024년 5월, 팜파티 참가자들이 작약밭에서 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너, 내 동료가 되어라
  지금은 똑 부러지게 농가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농촌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던 것은 아니다.
  “3년 동안 너무 외로웠어요. 다 큰 처녀가 산골에서 농사짓는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아니냐, 시집도 안 가고 부모님 등골 빼먹는다, 그런 시선을 받았으니까요. 친구들을 만나도 대화가 안 통하니까 재미가 없었어요. 그때는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어 자존감이 바닥을 쳤죠.”
  2016년 청년여성농업인협동조합(이하 청여농)이 결성되면서, 그는 전국에 있는 수많은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같은 언니, 동생이 전국에 있는 거예요. 저마다 설움이 있으면서도 굳세게 살고 있어요. 다들 일도 잘하고 다방면으로 월등해요. 함께 농업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팍팍 생기는 거예요. 농번기에 아주 바쁘다가도 한 번씩 모이면, 농업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받아요.”
  2021년부터 2년간 청여농 회장을 맡아 후배들의 든든한 힘이 되었다.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 특별위원회 활동을 함께하면서, 농어촌여성정책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농사를 뼛골 빠지게 하다가도 프린트물이며 신문이며 바리바리 챙겨서 기차를 탔어요.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에 자료에 밑줄 치면서 공부했죠. 제가 단체의 대표로 그 자리에 나가는 건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투루 말하면 안 되잖아요.”
  그는 여전히 전국에 퍼져 있는 동료들과 소통하고 협업하며 농사를 이어갈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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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슬기 씨는 사시사철 꽃피는 농장을 꿈꾼다.

  바쁜 날들을 보내면서도, 장슬기 씨가 늘 함박웃음인 이유는 무엇일까.
  “농사를 시작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오히려 꿈을 찾아가는 느낌이에요. 직장에 다녔으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을 것 같아요. 내년부터는 더 다채로운 행사를 열고 싶어요. 새롭게 체험 프로그램도 만들고 싶고요. 공부할 것이 끝이 없네요. 하하.”
  사시사철 꽃피는 농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다부지다. 다음 계절, 또 다음 계절에는 농장이 어떤 옷을 걸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시 진도에, 다시 신선해농원에 가고 싶은 이유다.

이진선 · 사진 박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