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라면 누구나
최고의 농산물을 꿈꾸죠”

김성택 천의바람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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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포천시 관인면 삼율리. 농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김성택 천의바람농장 대표를 만났다. 야트막한 경사지를 올라 농장의 심장부에 다다르는 사이, 김성택 씨의 아내 박현지 씨와 도율, 라율 남매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다정한 가족이었다.
  하우스에서는 고추가, 밭에서는 들깨가 익어가고, 작은 틀밭에서는 가지, 참외, 토마토, 꽃들이 사이좋게 피고 저무는 중이었다. 이리저리 다니며 참견하는 닭이며, 문지기 개 ‘역동이’까지. 온갖 동식물이 와글와글 아기자기한 농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농장을 지키는 개 역동이.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농장 시작한 지 4년 되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죠. 3년 동안 노지에서 농사짓다가 지난가을에 하우스를 짓고 작은 텃밭을 만들어 여러 가지 채소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방목장도 만들었으니, 이제 송아지도 들일 겁니다.”
  김성택 씨는 땅 한 평 없이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이른바 ‘영끌’로 농지 1560평을 사서 농사를 시작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우리 밭도 부탁해” 하는 이웃들이 늘어, 지금은 논과 밭을 합쳐 1만 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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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시작 3년 만에 하우스를 짓고, 작은 틀밭도 마련해 다양한 식물을 키우고 있다.

‘생명역동농업’으로 정하다 
  김성택 씨가 농사를 짓는 방식은 좀 특별하다. 이른바 생명역동농업(Bio Dynamic Agriculture). 농장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땅과 하늘, 사람과 작물, 갖가지 생명들이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조화롭게 순환한다고 보는 농사 방식이다. 1924년 독일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창했으며,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업에 크게 두 가지가 더해진다. 땅심을 돋우는 증폭제를 사용하고, 파종 달력에 따라 열매의 날, 꽃의 날, 뿌리의 날, 잎의 날, 그리고 휴경일에 맞춰 해당하는 농사일을 한다는 것이다.

생명역동농업 파종 달력. 작물을 언제 심어야 좋은 품질과 높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달력으로, 독일의 마리아 툰(Maria Thun) 가족이 20년 이상 연구해 만들었고, 김준권 평화나무농장 대표가 우리나라에 맞게 적용해 보급했다.
생명역동농업 파종 달력. 작물을 언제 심어야 좋은 품질과 높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달력으로, 독일의 마리아 툰(Maria Thun) 가족이 20년 이상 연구해 만들었고, 김준권 평화나무농장 대표가 우리나라에 맞게 적용해 보급했다.
생명역동농업에서는 파종달력에 따라 농사를 짓는다. 휴경일에 심었다는 부분(밭 오른쪽)이 차이가 있다.

  “농사에 바쁜데 파종 달력에 맞추는 거 스트레스 받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편해요. 내가 일일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왜 이걸 안 쓰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차이가 나느냐고 묻자, 성택 씨는 들깨밭을 보여주었다.
  “밭의 오른쪽과 왼쪽이 확연히 다르죠. 오른쪽이 휴경일에 심은 거예요. 경험해 보니, 다른 건 몰라도 휴경일에 심은 작물은 잘 안 자라더라고요.”
  우리에겐 다소 낯설지만, 실제로 유럽과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이 방식으로 생산한 농산물에 일반 유기농과 차별된 ‘데메터(Demeter)’ 인증을 부여하고 있다.

농부의 길에 들어서다
  성택 씨의 본래 꿈은 목사였다. 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차근차근 길을 쌓아가던 중 기숙사에서 방학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일본의 유기농업 운동가 고다니 준이치의 《농부의 길》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데,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손이 막 떨릴 정도로. 내 인생에서 뭔가 찾았다는 느낌이 왔어요.”
  생명을 지키는 농업, 세상을 살리는 농부로 산다는 것은 신과 땅, 이웃과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농부가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 이후 도시농부학교에 들어가 기초를 배우고, 농사를 더 제대로 배우고자 농촌을 찾아다녔다.

마음의 스승 평화나무농장 김준권 대표와 함께.

농업의 스승을 만나다
  2017년, 9월 8일. 성택 씨가 날짜까지 기억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 생명역동농업을 도입해 20년간 꾸준히 실천해 온 김준권 평화나무농장 대표를 만났다. 그는 그 순간 《농부의 길》을 읽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고 회상한다.
  “농부의 길을 진짜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분을 만난 거예요. 그날 저녁 늦게까지 김준권 선생님은 본인이 28세에 고다니 준이치 선생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라는 말씀, 그것이 본인에게는 농업이었다는 말씀을요. ‘아, 이분이다, 무조건 이분께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이후 평화나무농장에서 1년간 머물면서 농사기술과 철학을 배웠다. 포천시 멘토-멘티 제도의 도움도 받았다.
  “4계절을 다 경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선생님은 생명역동농업의 모든 것을 직접 해볼 수 있게 해주셨어요. 평화나무농장에서 있었던 1년이, 제 농사 인생 10년을 벌어준 것 같아요.”

노지에서 자라는 고추는 보석 같이 귀하다.

고추도 블렌딩합니다
  “농장을 일구며 작목을 고추로 정한 건 투자할 게 많지 않아서였어요. 지주만 세우면 되니까요.”
  다른 선택지가 없어 시작한 고추는 지금 천의바람농장의 효자 작목이 되었다. 1000평 정도로 벼농사, 들깨 농사보다 비중은 작지만 수익이 좋다. 고추재배를 잘하기 위해 성택 씨는 유기농 고추 농사 마이스터로 알려진 방영길 농부의 도움을 받았다. 포천에서 경북 영양을 오가면서 농사 기술은 물론 유통에 관해서도 배웠다. 고추 농사 스승은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렵다며 유기농업을 권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기농을 포기하지 않았다.
  “3년 차가 되어서야 유기농을 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죠. 그랬더니 직접 농장에 찾아오셔서 노하우를 자세히 알려주시더라고요.”
  김성택 씨는 하우스와 노지에서 키운 고추를 적절하게 블렌딩한다. 매운맛, 중간 매운맛, 순한 맛 세 가지 종류로 고춧가루를 시장에 내는데, 소비자 반응이 매우 좋다.

김성택 씨와 아내 박현지 씨(왼쪽). 각각 신학도와 스페인어 교사였던 그들은 함께 포천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김성택 씨와 아내 박현지 씨(왼쪽). 각각 신학도와 스페인어 교사였던 그들은 함께 포천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청년, 계속할 용기가 필요하다
  성택 씨의 든든한 동반자는 아내 박현지 씨다. 농장일을 도맡아 하는 남편 대신, 현지 씨는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며 SNS로 농장 일과를 소통하고, 다양한 직거래 채널에서 농산물을 홍보하며 틈틈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그런데 지난겨울 위기가 찾아왔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활동을 중단한 것. 그때를 떠올리며 현지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계속할 용기.”
  옆에서 성택 씨는 “큰일 날 뻔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 말에 미안함이 묻어났다. 농부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교사를 포기하고 함께 농촌으로 왔고, 농사를 지으며 고민하고 갈등할 때 늘 현명한 해답을 주었던 아내였기에 당황스럽고 또 더 미안했을 터다.
  농장에 봄이 찾아오면서 부부는 다시 마음을 잡고, 농촌에서 가치 있는 삶을 이어갈 새로운 방도를 모색했다. 우프(WWOOF) 호스트가 되어 전 세계 청년들이 찾아와 문화를 나누는 농장으로 의미를 확장했고, 홈스쿨링을 하는 지금,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 여유롭고 풍성하게 쓰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두 사람은 ‘계속할 용기’를 키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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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최근 우프(WWOOF) 호스트 활동과 홈스쿨링을 시작하며, 농촌에서 가치 있는 삶을 이어갈 새로운 방도를 찾아 나서고 있다.

  김성택 씨는 생명역동농업을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다. 데메터 인증을 받겠다는 꿈도 있다. 지난봄, 네덜란드 생명역동농업 교육기관 ‘발몬더르호프(Warmonderhof)’를 다녀와 확신이 더 커졌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만난 사람들의 연대와 문화의식, 보편화된 시스템이 부러운 장점이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평화나무농장이 최고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죠. 김준권 선생님이 불모지에서 20년간 잘 이끌어오셨는데, 이제 저희가 한국에서 생명역동농업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농부라면 누구나 최고의 농산물을 키워내고 싶잖아요. 저는 생명역동농업이 그 ‘최고’를 생산할 방법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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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농장을 찾았을 때가 8월 말이었다. 뜨거운 여름의 끝, 가차 없이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천의 바람’이라는 이름도 사시사철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심할 땐 천막도 날아가고, 생태화장실이 날아간 적도 있어요. 바람이 세게 불 때 농장 한가운데 서 있으면 몸이 막 날아갈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 느낌이 좋아요.”
  농부는 농장 한가운데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그 바람에 기대어 생명이 싹트고, 수많은 생명이 서로 도우며 역동적으로 순환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농부의 길이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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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경 편집장 / 사진 조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