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도시, 돌봄의 재구성

글·사진 홍종원

백령도 심청각에서 본 마을 전경. ⓒ문화체육관광부
백령도 심청각에서 본 마을 전경. ⓒ문화체육관광부

희미한 농촌의 기억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린 시절 명절 때 아버지의 고향인 시골 마을에 가곤 했다. 아버지가 어릴 적 자랐던 동네로 지금은 큰할아버지 내외만 살고 있다. 구, 동이라는 행정구역이 익숙했던 나는 면과 리라는 행정구역 자체를 시골이라고 느꼈다. 차를 타고 좁은 길을 가는 일이 어린 나에게는 힘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주 보지 못하는 친척들을 만나는 일은 반가웠다. 그러나 오고 가는 일이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온 가족이 시골 마을에서 모였던 어린 시절과 달리 중학생이 된 이후엔 지방 광역시에 계신 조부모님 댁에서 명절을 보냈다. 시골은 오랜 추억으로 남았다. 넓은 논과 축사에 있던 가축의 모습과 냄새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건강했던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의과대학 시절 농촌 활동을 통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의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전라남도 어느 섬에서 어르신들 건강 상태를 여쭙고 같이 요리해서 식사도 하면서, 잡초를 뽑기도 하고 지역 특산물 수확을 도왔다. 일시적 활동이라 도시와 다른 불편함이 낭만으로 다가왔다.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 보았던 깨끗한 별빛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봉사 활동 수준이었던 터라, 농촌주민의 건강 문제와 같은 고차원적인 주제를 깊이 생각할 기회는 없었다. ‘지방 소멸’이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의 농촌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활기찬 지역이었다.
  2011년 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사로 시골 보건지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첫 발령지 서해 최북단 백령도는 규모가 크고 농어촌이 복합된 섬이었고, 접경지역으로 대규모 군부대가 있어서 비교적 젊은 층 인구도 많았다. 안보에 대한 걱정은 항상 있었지만 섬은 평화로웠다. 보건지소에 근무하면서 만난 어르신들은 비교적 건강했다. 의사인 나는 만성질환 관리를 잘해내는 일이 우선이었다. 보건진료소 소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보건지소까지 진료를 받으러 오지 못하는 어르신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장님은 더 먼 지역의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오랜 기간 시골 마을에서 환자를 돌보는 보건진료소장님이 존경스러웠다. 그렇게 섬 근무를 1년 동안 하고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보건지소로 이동하였다. 남양주는 도농복합시여서 농촌과 도시를 넘나들며 환자를 만났다. 농촌의 환자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중보건의사 근무를 마치고 도시로 돌아왔지만 대학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서울 강북 지역의 오래된 주택지역에서 마을공동체 활동을 돕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도시의 아픈 삶에 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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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이 어렵고 홀로 지내는 환자와 잠시 산책을 나왔다.
거동이 어렵고 홀로 지내는 환자와 잠시 산책을 나왔다.

도시에서 만난 노인들
  도시의 노인들은 이방인이다. 인구 밀도가 높지만 마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진다. 식당도, 편의점도 상대하는 사람이 없고 기계가 늘어간다. 최신 인공지능 기기가 늘어나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각종 고객센터도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전화를 받고, 음식점이나 카페에서도 ‘키오스크’가 주문을 받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도시의 충분한 생활 기반은 노인들이 살아가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도시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장애인들이 많이 산다. 지역공동체 건강증진 활동을 하던 나는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삶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어서 방문 진료를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2019년 3월 ‘방문의료클리닉 건강의집의원’이 시작되었다.
  환자들의 집에 찾아가니 느끼는 것이 많았다. 일단 병원에 올 수 없는 환자들이 정말 많았다. 거동이 어려운 환자를 대신해 보호자들이 3개월, 6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약만 받아오곤 했다. 어떤 환자들은 동네 의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퇴행성 뇌혈관질환, 암을 앓아 대학병원에 다니지만, 자신의 병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다며 불만이 많았다. 어르신들의 삶과 기존의 병원 체계가 잘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편, 도시의 주거환경이 편리하지만도 않다.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한 채 반지하에서 칩거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승강기가 없는 옥탑방에서 내려오지 못해 누워있는 사람도 있다. 제대로 눕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쪽방, 여인숙에서 지내는 어르신들도 만났다. 도시가 편리해서가 아니라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라서 돌봄 서비스를 받기가 수월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삶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는 치료 이상의 돌봄이 필요하다. 약 복용을 도와야 하고, 약 복용 이전에 식사를 도와야 했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세심히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실 의료는 그런 일상적인 부분이 충족된 이후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문 진료를 하면 할수록 돌봄 공백이 눈에 띄었다. 가족 보호자들은 항상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 공적 돌봄체계인 장기요양보험은 하루 3시간 내외의 돌봄만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혜택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돌봄의 공백은 요양병원 입원 및 시설 입소로 이어진다. 이러한 방식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다른 방식도 가능할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

농촌을 떠난 노인들
  방문 진료를 하며 만났던 몇몇 보호자들은 농촌에서 머물던 어르신이 쓰러져서 자녀인 본인들이 거주하는 서울로 모셨다고 이야기했다. 요양원에서 만난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의 보호자가 어르신이 걱정되어 요양원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농촌에서 잘 지내던 어르신이 건강 문제가 생겼을 때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치료한 이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수도권에 남은 경우다. 도시의 생활 기반은 아픈 노인들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결국에 농촌에서 지내야 할 어르신이 사라지니 농촌은 더욱 쪼그라들고 도시는 비대해진다.
  도시의 역설은 아픈 환자를 둘러싸고도 이어진다. 도시에 돌봄 인력이 더 많고 의료인도 많다. 어찌 보면 도시에 아픈 어르신들이 지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도시의 생활 환경이 결코 노인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농촌은 농촌대로 불편함이 있다지만 어르신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아픈 어르신을 보호자가 도시로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이 살던 곳에 머물도록 방향 전환할 수는 없을까? 단순히 보호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는 아니고, 보편적인 의료 돌봄체계가 농촌 지역에서 가능할 때 비로소 이러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지역의 거점 병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고 이후에 잘 구축된 지방의 돌봄체계를 이용하여 연고가 없는 수도권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 과소화가 시대의 문제라고 하는데, 어쩌면 의료돌봄체계 완비가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대안까지는 거창하더라도 삶의 방향을 다시 설계해볼 수 있는 실마리는 될 것 같다. 도시 생활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농촌에서의 삶 또한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면 지금과 다르게 삶을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농촌 어르신들의 마지막 생을 잘 돌보는 일은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된다.

어르신 댁에 가면 보이는 수많은 약 봉투.
어르신 댁에 가면 보이는 수많은 약 봉투.

시골 마을의 지금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어릴 적 방문했던 시골 마을을 다시 찾았다. 그곳은 생각보다 가까웠고 작았다. 어린 나에게는 멀고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도로 사정도 좋아졌고 사람들이 많이 떠나 규모가 작아졌다. 큰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큰할머니 홀로 지내고 계셨다. 큰할머니는 파킨슨 질환으로 인한 떨림, 편마비 증상이 심해 낙상 위험이 높았다. 홀로 생활하기엔 위험해 보였다. 다행히 큰할머니 곁에는 요양보호사가 있었다. 시골까지 찾아와주는 요양보호사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방문 진료 의사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금 건강 수준을 유지하면 혼자서 지낼 수 있겠지만, 마비 증상이 더 심해지고 거동이 어려워지면 결국에 도시에 있는 자녀들 곁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큰할머니가 생의 마지막 시기를 잘 보내길 바랄 뿐이다.
  시골 마을에서 나오는 길에 눈에 띄었던 건 요양병원과 요양원이었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 마을 역시 다른 대안이 없음에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 기억이지만 시골 마을에 가족들이 다 모여 충만했던 기억은 단순히 추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의 자양분이 된다. 당시 농촌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농촌이 사라지게 내버려 둘 것인가?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돌봄은 사람이 한다. 도시의 돌봄체계가 작동하는 이유는 돌봄을 제공할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떨어져서 농촌을 찾지 못한다면 적절한 수가 보상을 통하여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도 있다.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방문 의료인을 확보하고 돌봄 노동자들이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농촌은 좋은 안식처로 본연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농촌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볼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한다면, 도시 노인들이 겪는 ‘이방인’의 처지를 변화시키고 노년의 삶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농촌과 도시, 돌봄을 재구성하는 일은 농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홍종원 의사필자 홍종원: 방문의료클리닉 건강의집의원 대표원장
찾아가는 의사. 의대 졸업 후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무작정 지역사회에 뛰어들었다. 방문 진료를 하는 ‘건강의집의원’을 열어, 아픈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의사가 되었다. 《처방전 없음》(2023, 잠비),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공저, 2024, 한겨레출판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