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동의 없이는 에너지 전환도 없다

이오성

2012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서 지역 주민이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에너지정의행동

‘밀양희망버스’의 기억
  “데모하러 서울에 갔는데 마 삐까뻔쩍하이, 마 정신이 읎어. 마 대낮겉이 밝아갖고 훤-하이 그란데 마 퍼뜩 그런 생각이 들더라꼬. 아 여 이래 전기 갖다 쓸라꼬 우리 집 앞에다 송전탑 시운(세운) 기구나 … 그라믄 전기 만드는 데든 송전탑이든 여 갖다 세우지 와 남의 땅에다 시와(세워)놓고 이래 느그는 팡팡 에어컨 돌리고 야밤에 온 시상(세상)을 대낮겉이 밝혀놓고 이라노 말이다.”

  2024년 출간된 책 《전기, 밀양-서울》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10여 년 전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나섰던 이들의 구술을 담아 펴냈다. 알려진 것처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은 단일 국책사업에 대해 최장 기간, 최대 규모로 이어진 주민 저항이었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려는 한국전력(이하 한전)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마을 주민 사이에 무려 10년 동안 싸움이 벌어졌다. 383명이 입건되었으며, 현장 응급 이송 사례가 100건이 넘었다. 마을 주민 두 명이 분신과 음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마을 주민의 싸움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 시민들이 ‘밀양희망버스’를 타고 모였다. 2014년 6월 정부의 행정대집행으로 밀양 투쟁은 강제 진압됐지만, 농성장에서 함께 밥을 먹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맺어진 인연은 지금도 이어진다. 그렇게 밀양 싸움은 참혹한 국가 폭력의 역사이자 뜨거운 사회적 연대의 기억으로 남았다.

아직도 유효한 말들
  밀양 행정대집행 이후 11년이 지났다. 세상은 또 변했다.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이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AI와 반도체 사업 육성이 당면 과제가 되면서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전력망 확충 필요성도 날로 높아가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 곳곳에 분산된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더 촘촘하게 전력망이 건설되어야 한다.
  국가 탄소감축목표 설정 등에서 ‘현상 유지’에 머물렀던 윤석열 정부와 달리 이재명 정부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대선 때부터 ‘에너지 고속도로’를 공약했고, 이번 대선에서는 2030년까지 서해안 전력망을, 2040년까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유(U)자형 전력망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회도 2025년 전력망 사업 규제를 대폭 축소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전력망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한전은 2038년까지 전력망 확충에 72조 800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정부, 국회, 한전이 똘똘 뭉쳐 전력망을 확충하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중이다.
  그러나 “전기 만드는 데든 송전탑이든 여 갖다 세우지 와 남의 땅에 세워놓느냐”라는 ‘밀양 할매’의 일갈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 생생하게 들린다. ‘전력망 확충’이라는 발등의 불 앞에서 전국 각지가 분쟁으로 아우성치고 있기 때문이다. 송전망 계획이 발표된 지역마다 주민대책위가 꾸려져 격렬한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
  특히 서남해안 태양광·풍력 발전단지와 전남 영광 한빛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이 가는 길목에 있는 전북의 경우 정읍·완주·무주·진안·부안·장수·임실·고창 등 8개 지역에서 송전탑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전북 지역 8개 시군은 2025년 5월 ‘송전탑 백지화 전북 대책위원회’를 출범하고 “수도권의 식민지가 되기를 거부한다”라고 밝혔다.

송전탑이 ‘상경’하는 세상
  ‘지역이 수도권의 식민지’라는 말이 에너지와 송전망 문제처럼 딱 들어맞는 데도 없다. 원전이든 화력발전이든 재생에너지든 대다수 발전소는 농어촌 지역에 있다. 농어촌 지역의 발전소에서 출발한 송전탑은 어김없이 수도권 또는 대도시가 종점이다. 도시와 산업단지의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농어촌 지역의 땅과 하늘을 점령하면서 송전탑이 ‘상경’하는 셈이다.
  그렇게 농어촌 공간을 점령하면서 직진하는 송전탑은 대도시 인구밀집 지역 앞에서 숨어버린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송전선을 지중화, 즉 땅에 파묻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도시 인구밀집 지역의 반발은 감당키 어렵다고 판단해서일 것이다. 2024년 박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의 지중화율은 62.2%인 반면, 경상북도는 7.8%였다. 대도시일수록 지중화율이 높았고, 농어촌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계획은 전력망 불평등 문제의 가장 나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용인 국가산업단지 사업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남사읍 일대 778만㎡(약 235만 평)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이다. 삼성전자가 360조 원, SK하이닉스가 122조 원을 투자하는 프로젝트로, 2026년 말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도체 산단 완공 시 원자력 발전소 약 10기, 국내 전력 수요의 약 1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전력이 필요하다. 수도권에는 이를 감당할 발전시설이 없으니, 타 지역의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 송전망을 건설해야 한다. 용수 공급을 위해서도 하루 약 107만t, 즉 수도권 시민 300만 명의 하루 사용량에 맞먹는 물이 필요하다. 최근 팔당댐과 여주보의 물을 끌어오는 계획을 세웠지만 2024년 말까지만 해도 강원 양구에 댐을 건설해 산업용수를 공급하는 사업을 추진해 지역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지역민이 송전망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
  지역 주민들은 왜 송전망 건설에 반발할까. 물론 내 집 앞에 거대한 송전탑과 송전선로가 지나가는 걸 반길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게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는다. 주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처럼 내 집 앞에 송전탑이 세워진다는 사실을 통보받기 때문이다.
  가령 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박성래 이장은 2023년 12월에 결정된 ‘신설 송전선로 최적 경과대역’을 2024년 5월에야 통보받았다. 이 자리에서 한전 측은 마치 선심을 쓰듯 박 이장에게 송전탑 세울 위치를 정하라고 말했다. 일방적인 통보도 문제였지만 지도에 분홍색으로 칠해진 경과대역(송전망이 지나가기에 가장 적합한 경로)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정읍-완주-계룡으로 이어지는 노선 중 유독 박 이장이 사는 소양면 일부 지역만 그 폭이 매우 좁았다. 대략 500m 범위 안에서 송전탑을 세울 곳을 정해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송전탑 위치에 따라 마을끼리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송전망이 통과하는 경과대역을 결정하는 건 입지선정위원회다. 입지선정위원회는 전력망 설비의 입지 선정과 관련된 사항을 결정하는 기구로, 주민 대표와 지자체 담당자,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지역 주민 대다수는 입지선정위원회의 운영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주민 대표가 누구인지, 지자체 공무원 누가 참여하는지 알지 못한 채 최적 경과대역을 통보받을 뿐이다. 어떤 토론을 거쳐 최적 경과대역을 결정했는지 회의록 공개를 요청해도 한전은 내부 규정상 녹취록, 속기록 등은 비공개라며 거절한다. 과거 밀양 사태 때와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

독일 최대 전력망 사업, 쥐트링크 프로젝트 현장. ⓒ이오성
독일 최대 전력망 사업, 쥐트링크 프로젝트 현장. ⓒ이오성

독일, 어떻게 해답을 찾았나
  2025년 7월 송전망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2000년 재생에너지법(EEG) 제정을 시작으로 일찍부터 에너지 전환에 나선 독일 역시 송전망을 두고 커다란 사회적 갈등을 겪었다. 재생에너지 생산 시설도 산업단지도 없는 지역, 또는 태양광 등으로 100% 에너지 자립에 성공해 더 이상 송전망이 필요 없는 곳에서 “왜 우리가 피해를 보아야 하느냐”라며 반발이 거셌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현재 진행 중인 쥐트링크(Suedlink) 프로젝트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독일 북부에서 산업이 발달한 남쪽까지 700㎞ 길이의 초고압직류(HVDC) 송전망을 건설하는 독일 최대 전력망 사업이다. 송전망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의 여론이 높아지자 독일 정부는 초강수를 뒀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송전선을 지중화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했다.
  과연 돈 많은 나라는 다르구나 싶지만 이것이 최종 해법은 아니다. 지중화는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역 주민이나 정치인은 지중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독일의 정책 담당자나 에너지 전문가들은 결국 ‘주민 수용성’을 높이는 것이 근원적인 해법이라고 본다. 핵심은 주민 참여와 토론이다. 독일에서는 법에 따라 ①망 건설 수요계획 단계(전국 계획) ②송전망의 시작점과 종점 결정 단계(권역 계획) ③계획 확정 단계 등 세 차례에 걸쳐 일반 시민이 송전망 계획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전력망에 대한 시민 대화’라는 기구를 통해 송전망 계획을 초안부터 온라인에 공개해 주민 의견을 수렴한다. ‘송전선로 경과지 설정 가이드라인’을 통해서는 지중화 우선순위 기준, 생물 및 지역 보호를 위한 공중선로 예외 지역 기준 등을 제시한다. 보상금 지급에 관해서도 토지 소유자가 송전망 사업자와 8주 이내에 ‘우호적으로’ 합의하면 보상금의 최대 75% 금액을 추가 지급한다. 2024년 말 한전도 이와 매우 유사한 ‘조기 협의 장려금’ 제도를 마련했다. 2개월 이내 합의하면 보상금의 75%, 3개월 이내는 50%를 추가 지급한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송전망 노선을 누가 결정하느냐다. 한국에서는 노선 결정의 주체가 한전이다. 한전이 ‘에너지 효율’의 관점에서 송전망 계획을 세운다. 독일은 다르다. 중앙정부가 키를 쥔다. 전력망 사업자는 중앙정부의 권역 계획(송전망의 시작점과 종점을 결정하는 단계) 이후에나 사업 주체로 나선다. 중앙정부가 시민 참여와 합의를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리면, 실무 단계에서 전력망 사업자가 움직이는 것이다. 더디 가더라도 독일의 사례를 참고했다면 밀양 사태 때 한전이 사업 강행을 위해 내부규정까지 바꿔가며 마을이 아닌 주민 개인에게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마을공동체가 파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의제와도 송전망 문제는 직접 연결돼 있다. 결국 전력망 문제는 기업과 일자리가 수도권과 대도시로 몰리기 때문에 비롯됐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부 시절 반도체 산업단지를 용인으로 정한 일이 두고두고 아쉽다. 당시 경북 구미와 충북 청주에서 반도체 단지 유치를 희망했지만, 정부는 기업의 의견을 들어 용인을 택했다. 반도체산업 인재들이 수도권 밖에서는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가올 전력 문제와 지역균형 문제를 고려했다면 정부는 기업에 파격적인 유인책을 제시해서라도 첨단산업의 비수도권 유치라는 사례를 남겨야 했다.

에너지 전환과 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RE100(기업 등에서 쓰는 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것)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도 기업의 지역 이전은 필수적이다. 특히 RE100이 수출의 전제가 된 반도체 산업의 경우에는 더더욱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1991년 이래 35년째 표류하던 전라북도 새만금 개발사업이 최근 RE100 산업단지 조성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활력을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만금 방조제에 조력발전 시설을 설치해 해수를 유통함으로써 수질 개선과 재생에너지 발전을 동시에 꾀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용인에 공장을 짓고 있는 SK하이닉스 말고 삼성전자만이라도 새만금 등 호남 지역에 내려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송전망 확충도 최소화할 수 있고, 전력의 장거리 송전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도 줄일 수 있다. 꿈만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가 방향을 확고히 하고 세제 혜택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친다면 에너지 전환과 균형발전이라는 거대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평야가 많고 바다 수심이 얕은 호남 지역은 태양광과 해상풍력 발전의 최적지다. 동시에 이곳은 송전망 확충 사업의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발전설비가 곳곳에 분산된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송배전망 확충은 불가피하고, 앞으로 분쟁의 현장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주민 참여, 송전망 건설에 대한 토론과 합의를 바탕으로 더디 가더라도 여럿이 가는 길을 내야 한다.
  지역에 취재를 다니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지금 지역의 민심은 과거와 다르다. 한전이 돈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구매’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다. 고령에 접어든 농민들이나 귀농·귀촌한 이들에게는 돈 몇 푼보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이 훨씬 소중하다. “보상금 따위 필요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게 해달라”는 주민들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필자 이오성: 시사주간지 《시사IN》 기자
2000년 《월간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시사IN》 창간 때 입사해 기획취재팀장, 정치팀장, 사회팀장 등을 지냈다. 한때 포털사이트의 사회공헌 사업 사이트를 운영한 적도 있다. 먹을거리·기후·농업 문제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