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지속 가능한 새로운 문명의 고향
그 인문적 토대에 대하여

수세기에 걸쳐 세계의 선진 지역에 공업화·도시화의 물결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과거의 농촌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보편화합니다. 한국은 특히 급속하게 이 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물질은 풍부해졌고, 민주화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그늘 속에서 물신物神의 지배와 차가운 이기주의가 현대의 근본 모순으로 되어 발목을 잡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은 물론 경제 자체를 위협합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성과까지도 허무하게 무너뜨릴 위험성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급속하게 진행된 만큼 그 모순도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합니다. 작년의 세월호 사건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근래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마을운동 등은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작은 시냇물 정도의 흐름이지만,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지향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문명의 방향을 바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지역운동 · 마을운동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자본주의 이전의 농촌공동체로 돌아가자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경과하고, 개인주의의 세례를 받은 새로운 문명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나는 인문운동가의 입장에서 그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인문적토대’에 대해 말해 보려합니다. 특히 고령화 사회라는 새로운 도전이 여러 가지 전망을 하게 합니다.

얼마 전에 인생 이모작을 위한 강좌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에 인생 이모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을 살아야했던 인생 전반前半을 지나, 거의 같은 기간의 오로지 행복을 위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인생 후반後半이 있다면, 고령화는 문제가 아니라 축복일 것입니다. 개인의 행복은 물론 나라전체의 행복도 여기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바람인데, 지역적 공간으로 ‘사람 중심의 따뜻한 사회’라는 새로운 문명의 전진 기지가
농촌 지역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식량을 비롯한 농업생산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지속 가능한 문명을 위해 대처해야 할 중요한 분야이지만, 그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맡기고, 나는 새로운 지속 가능한 문명의 인문적 토대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인문적 토대는 새로운 사회의 생산력과 제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인문적 토대는 다음의 세 분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올바르게 배합되어야
물질은 과거보다 비할 수 없이 풍부해졌는데, 사람들은 그만큼의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행하기까지 합니다. 그 원인은 양극화·불평등·차별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중에서도 요즘 들어 더 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물질(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물질(돈)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생존의 제1 요건이며, 행복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을 사람이 활용할 때 이야기이고, 물질에 지배되어 버리면 오히려 불행의 원인으로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이 풍부해진 것은 행복을 위해 대단히 좋은 조건입니다.
이제 물질과 정신의 올바른 조화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빛살이 퍼져가듯 넓혀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탕이 될 때라야 여러 가지 제도나 시스템 등을 변혁하는 것이 비로소 의미 있게 됩니다. 그런데 물질 중심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물욕을 억제하거나 가난을 권하는 방식은 보편적일 수 없습니다. 가난을 피하고 부귀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억제하기보다는 더 큰 욕망을 확대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불가피한 가난은 원망하거나 비굴해지거나 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란 의미입니다. 즐기는 것은 도입니다. 이 도를 오늘에 말한다면 정신적 · 예술적 가치를 신장하는 것입니다. 즉 욕망의 질이 달라지고 물질적 가치보다 더 큰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물욕은 감소합니다. 흔히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발적 풍요가 됩니다.
무언가를 탐내고 챙기고 모으는 것에서 느끼는 기쁨보다 나누고 베풀며 양보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욕망의 질을 바꾸는 것이 인문운동의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불가피한 가
난은 원망하거나 비굴해지거나 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란 의미입니다. 즐기는 것
은 도입니다. 이 도를 오늘에 말한다면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신장하는 것
입니다. 즉 욕망의 질이 달라지고 물질적 가치보다 더 큰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
니다. 흔히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발적 풍요가 됩니다.

관념에 지배되지 않고 관념을 활용하다
인간의 특징으로 높은 물질적 생산력과 함께 ‘관념’을 들 수 있습니다. 생산력 못지않게 인간은 관념을 발전시켜 왔습니다.수많은 새로운 지식 · 경험 · 신념 · 가치관 등이 관념계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관념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에 지배될 때 그것이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관념에 지배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진리를 안다’는 등의 단정斷定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단정을 해야 신념도 확신도 생기고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등을 살리는 것처럼 오해하며, 이는 오랜 문화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단정을 하면, 관념을 활용하는 상태에서 관념에 지배되는 상태가 됩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 않고, 나아가 화가 납니다. 화에 휘둘리는 것이야말로 관념에 지배되는 현상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나 미움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따뜻한 세상입니다.
말과 생각으로는 이웃과 사이좋아야지 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단정斷定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 의식하지 못할지 몰라도 마음 한 편에 비수를 숨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틀림없다는, 즉 자기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단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현대 과학은 인식의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교육만 받아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자신의 판단에 따른 하나의 상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과학적 상식이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사회적 실천과 사회운동에는 별로 응용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지식은 단지 ‘주입’되고 있을 뿐 실제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이미 오래 전 인류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탐구하며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논어 제9편 자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논어 제4편 이인

이와 같은 무지無知의 자각을 바탕으로 탐구하고 소통하는 방법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보편화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각을 일반화하고 사회화하는 것이 인문운동의 중요한 목표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진척되는 것만큼 사이좋은 사회 · 따뜻한 사회 · 지속적인 평화가 튼튼한 토대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자식들 키우고 가르치기 위하여, 노후를 준비하기 위하여, 어떠한 무엇을 위하여 현재를 의무로, 책무로, 사명감으로 바쳐온 삶으로부터 ‘기쁨’과 만나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소명이란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기쁨이 세상의 허기와 만나는 것’이라는 프레더릭 뷰크너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여러 가지 허기와 만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허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자기 내면 깊숙한 기쁨과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객관적 조건들은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생활을 위한 직업도,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운동도, 이제 기쁨의 바탕 위에 서야 합니다. 욕망의 질이 바뀌고 관념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물신이 지배하는 차가운 사회’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따뜻한 사회’로 바꿔가려는 우리 시대의 의인義人들이 스스로 내면의 기쁨과 만나는 운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생이나 헌신, 사명감도 기쁨 위에 설 때만 생명력을 가집니다. 이 기쁨이 자기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이 아마도 인문운동의 최고 목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어 가는 데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2※필자 이남곡: 인문 운동가,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따뜻한 사회를 향한 인문적 토대를 쌓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2013, 한겨레출판),『진보를 연찬하다』(2009, 초록호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