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소비자, 농(農)으로 연결되다

글·사진 문희선

  농업은 우리 삶의 뿌리에 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누군가 흙을 일구고 계절의 햇살과 비를 견디며 키워낸 결과다. 건강한 땅을 가꾸고 그 땅에서 우리의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농부들은 우리의 밥상을 책임지고, 우리에게 살아갈 에너지를 준다.
  하지만 오늘날 농업을 멀게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최근 제주에도 대형 로컬푸드직매장이 생기면서 농부들이 키운 농산물을 직접 구매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농부의 이름만 알 뿐 여전히 내가 사는 농산물이 어떤 밭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라났는지 자세히 알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농업이 다시 연결되는 방법을 고민한다. 우리가 먹는 것을 제대로 알 때, 우리는 땅을 이해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9년 5월에 열린 첫 올바른농부장. ⓒ문희선
2019년 5월에 열린 첫 올바른농부장. ⓒ문희선

농부들이 스스로 만든 시장
  제주의 농부들이 직접 운영하는 ‘올바른농부장’은 단순한 직거래 장터가 아니다. 흔히 떠올리는 직거래장터는 커다란 천막 아래, 누가 생산했는지 모를 농산물이 쌓여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올바른농부장은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곳이자, 농부의 이름과 농법, 계절의 이야기가 함께 오가는 곳이다.
  농부들은 시장이 열리는 날 아침 일찍 밭에서 갓 수확한 작물을 가져온다. 농장의 이름과 키운 방법을 적은 안내문을 준비하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바구니와 용기를 활용해 진열한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직접 작물을 설명한다. 소비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채소를 고른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의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 올바른농부장은 농부들이 스스로 만든 시장이다. 2019년 사회적경제네트워크의 지원으로 시작했지만, 이름을 짓고 규칙을 만들고 포스터를 제작하고 SNS에 홍보하는 일까지 모두 농부들이 직접 해왔다. 생산하는 농산물에 맞춰 새로운 기획을 해보면서 소비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함께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농부들은 서로의 밭을 방문하고 농사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성장했다. 소비자를 직접 만나 피드백과 응원을 받으면서 농부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다시 농사할 힘을 얻었다. 소비자는 농산물이 어떤 농부의 손에서 어떤 마음으로 키워졌는지 알게 되고,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는다.
  흙 묻은 당근, 모양이 제각각인 귤, 이름조차 낯선 채소를 직접 보고 고르는 경험은 소비자에게 ‘농산물은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그 경험은 식탁의 구성을 바꾸고,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로 이어진다.

2025년 8월, 올바른농부장이 100회를 맞았다. ⓒ문희선

100번째 시장을 열다
  2025년 8월, 올바른농부장은 ‘100번째 시장’을 열었다. 2019년 5월에 첫 시장을 열기 시작한 후로 손님이 20명도 오지 않던 날이 많았다. 농부들은 태풍이 부는 날에도 비를 뚫고 모였고, 드문드문 찾아온 손님들과 부침개를 부쳐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벌이는 소박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시장을 열지 않은 적이 없다.
  코로나19가 극심했던 2021년을 제외하고 한 달에 두 번, 최근에는 한 달에 세 번씩 시장을 열어 마침내 100회를 맞았다. 그 시간 동안 장소를 잃고 새로운 공간을 찾아 헤매던 일, 사소한 오해와 갈등으로 떠난 생산자들, 공들여 만든 공간을 포기해야 했던 아픈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농부와 소비자가 함께 만든 신뢰가 우리를 다시 모이게 했다.
  100회는 그래서 조금 더 특별한 날이었다. 시장 시간은 평소보다 짧게 열고, 함께 놀이도 하고 음식을 나누며 지난 시간을 축하했다. 소비자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받는 게시판을 마련했는데, 누군가가 남긴 “무언가가 100번 이어진다는 건 모두의 힘 덕분이에요”라는 글귀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그날 시장은 작은 잔치 같았다. 농부와 소비자가 함께 축하하며 “앞으로 200회, 300회도 계속 열어 달라”는 응원을 보냈다. 100회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끈기와 신뢰, 공동체의 힘이 쌓여 만든 결과였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겠다는 다짐의 자리였다.

[크기변환]KakaoTalk_20250918_143147622_01

[크기변환]KakaoTalk_20250918_143147622
누군가가 남긴 “무언가가 100번 이어진다는 건 모두의 힘 덕분이에요”라는 글귀. ⓒ문희선

“당근이 정말 달아요!”
  2019년 겨울, 올바른농부장을 처음 시작했던 장소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이 시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올바른농부장 단장님이 경작하던 삼달리 밭에는 감자, 당근, 무, 비트, 콜라비, 브로콜리, 양배추 등 일곱 가지 겨울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소비자들을 초대해 농산물을 직접 거두고 맛보는 수확 체험을 기획했다. 제주의 겨울 채소는 특히 달고 맛있다. 이 맛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주고 농부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날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차가웠다. 부모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은 당근을 뽑으며 “당근잎은 처음 본다!” 하고 깔깔 웃었다. 갓 뽑은 당근으로 만든 겨울 채소 비빔밥을 먹으며 “당근이 정말 달아요!”라고 외치는 아이를 보며 어른들도 웃었다. 그 장면을 보며 깨달았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은 당근이 땅속에서 자라는 것, 브로콜리가 꽃이라는 것, 겨울 채소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한다고 했다. 이 경험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올바른농부학교’를 만들었다. 농부학교는 어떤 특정 연령대를 위한 수확 체험이 아니다. “내가 먹는 것을 내가 농사지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학생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한다.
  1년 동안 사계절을 경험하며,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뽑고, 여름에는 풀과 벌레와 싸우며, 가을에는 배추·무·당근을 수확해 밥상을 차린다. 깨보다 작은 당근 씨앗을 처음 본 학생들은 놀라고, 싹이 트고 본잎이 날 때마다 땅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학생들은 수확한 채소를 보며 말한다. “세상 어떤 채소보다 맛있고 귀하다.”
  농부학교는 농업의 가치와 생명의 순환을 배우는 살아 있는 교실이다. 흙 속 생명, 기후, 생태의 순환까지 몸으로 배우며 삶의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도 많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돕고 배우며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농부학교는 이렇게 사람과 농업, 사람과 땅을 연결하는 소중한 배움터가 되었다.

바른농부학교에서 수확한 싱싱한 당근. ⓒ문희선
바른농부학교에서 수확한 싱싱한 당근. ⓒ문희선
가을에는 수확한 채소로 밥상을 차린다. ⓒ문희선

다양한 협업으로 확장하는 장터
  올바른농부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있다. 기업, 학교, 예술가, 환경단체까지 다양한 곳에서 협업 제안이 들어온다. 우리는 늘 묻는다. “이 일이 농부와 소비자 모두에게 즐겁고 도움이 될까? 농부들이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어가는 데 힘이 될까?” 그렇다면 기꺼이 합을 맞춘다.
  제로웨이스트(Zero Waste, 쓰레기 없애기) 실천가들과 함께 플라스틱 줄이기 캠페인을 기획하고, 장바구니와 유리병을 권하며 포장 용기 줄이기 챌린지를 열었다. 셰프들과의 팜투테이블(Farm To Table, 농장에서 식탁까지) 협업은 시장의 농산물 소비를 촉진하는 새로운 식문화를 만들었다. 셰프들은 밭에서 갓 수확한 채소로 즉석요리를 선보였고, 사람들은 새로운 채소의 맛을 배워 집에서 따라 했다. 그 경험은 다음 시장 방문으로 이어진다. 2025년에는 서울팀과 함께 ‘비건 페스티벌’을 기획해 50팀이 넘는 농부·공방·비건푸드팀이 모이는 대규모 시장을 준비 중이다.
  이 모든 협업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농부들에게 실험적인 농사를 시도할 용기를 주고, 소비자들에게 농업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올바른농부장은 이렇게 시장을 넘어 지역 문화와 생태계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농부가 주인공인 토크 콘서트. 농부는 자신감 있게 소비자를 만난다. ⓒ문희선

농민과 농민을 연결하니
  올바른농부장은 농민과 농민을 연결하기도 한다. 우리는 시장에서 만난 농부들이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가 되길 바란다. 2023년에는 작은 면적에서 연중 생산하며 안정적 소득을 만들 방법을 고민하는 청년농부들이 모여 ‘다품종소량생산연구회’를 만들었다.
  이 연구회는 제주에 정착하려는 청년농부들과 경험 많은 멘토농부들이 함께 모여 배우고 나누는 공동체다. 멘토농부들은 ‘작은 땅에서 어떤 작물을 심어야 1년 내내 수확할 수 있는지’, ‘병해충에 강한 품종은 무엇인지’, ‘소비자가 좋아하는 품목은 무엇인지’ 알려준다. 어떤 해에는 다 함께 토종씨앗을 나누고, 다른 해에는 공동으로 모종을 구입해 비용을 줄였다. 계절이 바뀌면 공동꾸러미를 만들어 판매해 각자 재배한 작물들이 골고루 소비자에게 닿도록 했다.
  무엇보다 이 모임은 심리적 지지가 된다. 농사는 외롭고 실패가 많은 일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태풍이 오면 한 해 농사한 것을 잃기도 한다. 그럴 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실패를 나누며 위로한다. 누군가의 실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배움이 된다. 함께 웃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은 농부로서의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연결된 농부들은 시장에서도 자신감 있게 소비자를 만난다. 서로의 농산물을 추천하고, 소비자 앞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덧붙여 준다. 시장은 단순한 판매장이 아니라 농부들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배움터이자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공동체가 된다.

ⓒ문희선
팜투테이블을 준비하는 모습. ⓒ문희선

우리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
  농업은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다. 농부와 소비자가 만날 때, 농부와 농부가 연결될 때, 우리는 단순한 거래를 넘어 신뢰와 배움, 그리고 공동체를 만든다.
  얼마 전 함께 기획회의를 하는데 운영진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대표님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아요.” 처음엔 과분한 표현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연결만으로는 지금의 올바른농부장이 될 수 없었다. 단순히 사람을 모으는 것을 넘어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조율하고, 때로는 갈등을 풀고 흐름을 맞추는 일이 필요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악기의 소리를 살피며 조화를 만드는 것처럼, 나 역시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 이런 세심한 조율과 관심이 있어야 건강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올바른농부장은 지난 7년 동안 100회를 넘기며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시장은 장터를 넘어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울타리가 되었고, 우리 사회에 농업이 왜 중요한지 묻고 답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농부시장이야말로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장이라고 믿는다. 밭에서 시작된 씨앗이 소비자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그 경험이 다시 농부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 그 순환 속에서 땅은 살아나고, 농업은 지속가능성을 얻는다.
  연결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열고, 함께 웃고, 함께 애쓰며 삶을 나눌 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농부와 소비자가, 농부와 농부가, 도시와 농촌이 그렇게 이어질 때 우리는 더 건강하고 단단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이 일을 이어간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큰 명성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내 작은 노력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농부시장을 통해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앞으로도 나는, 우리는, 이 연결의 힘을 믿고 걸어갈 것이다.

필자 문희선: 올바른농부영농조합법인 대표
제주에서 친환경 감귤과 블루베리를 키우는 농부. 2019년부터 농부시장 ‘올바른농부장’을 만들고 운영하며 농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늘도 밭과 시장을 오가며 공동체의 씨앗을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