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용행·강대여 삼달리 꽃밭에서 대표

동백나무를 심은 뜻은
제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돌담, 동백, 바다, 해녀, 감귤….
제주 성산읍의 ‘삼달리 꽃밭에서’에 들어섰을 때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울퉁불퉁한 현무암을 정갈하고 단단하게 쌓은 돌담, 빨간 꽃잎이 피고 지는 동백나무들이 제주를 품고 있었다.
이곳은 45년간 꽃농사를 지어온 현용행·강대여 부부가 20년 넘게 준비해 온 정원으로, 올해 초 먼저 문을 열었고 3월에 정식 개원했다.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된 제주도 민간정원이기도 하다.
“애기동백은 동백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핍니다. 제주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죠.”
현용행 대표는 정원의 시작을 동백나무로 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애기동백은 100일간 피고 지고를 거듭한다. 통꽃째 뚝 떨어지는 다른 동백과 달리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땅 위를 빨갛게 물들인다. 동글동글하게 잘 정돈된 동백나무가 줄지어 선 길, 손으로 촘촘히 놓은 돌길을 따라가다 보면 친숙한 듯 낯선 풍경이 스며 있는 특별한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소나무 옆 야자수
동백나무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멋진 지중해식 건물이 있다. 정원을 찾은 이들이 쉬면서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업에서 힌트를 얻어 치핑(chipping) 기법으로 마감했다. 완성된 외벽 표면을 걷어내는 공정이라 현장에서 반발도 컸다.
“건물을 다 완성해 놨는데 표면을 걷어내라고 하니, 건축 담당자들이 기겁했죠.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하라고 설득했어요.”
그는 해머 대신, 고압 물줄기로 콘크리트 표면을 직접 쪼아내는 워터블라스팅(water blasting)을 택했다. 시간과 비용도 더 들었지만, 날카로운 요철이 사라지면서 외벽은 거친 느낌을 덜고 건물 전체가 자연석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을 갖게 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한 면이 통유리로 열린 카페가 정원의 풍경을 액자처럼 담아낸다. 창밖으로 하늘과 꽃밭을 그대로 비추는 연못이 보이고, 옥상에 올라가면 정원 전체와 멀리 한라산과 바다 수평선까지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카페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솔바람정원으로 이어지는데, 소나무 숲 옆에 야자수 길이 나온다. 이 길에도 사연이 있다. “소나무 옆에 야자수를 심자”는 아이디어를 낸 건 아내 강대여 씨였다. 현용행 씨는 물론 조경 전문가들도 강하게 반대했다. 반대는 했지만, 아내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현 씨는 “한두 그루만 먼저 심어보자”며 절충안을 냈다.
그렇게 야자수 두 그루를 심고 반대편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본 순간, 모두의 생각이 바뀌었다. 건축물과 나무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풍경에, 전문가가 두 손의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사모님, 천재!”

꽃밭에서 만나는 환대와 위로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천천히 오래 둘러보세요.”
강대여 씨는 정원 전체를 설계하고 이끌어 온 사람이다. 그는 지금도 하루 대부분을 정원에 머물며 방문객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투박한 작업복 차림에 전정 가위를 허리춤에 찬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멋쩍은 웃음으로 답하는 이도 있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정원을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금세 마음의 벽을 허물기 마련이다. 꽃과 나무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살아온 사연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이곳에서는 이미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삼달리 꽃밭에서’는 계절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겨울에는 동백이 피고 봄까지 팬지와 마가렛, 여름에는 배롱나무와 천일홍, 가을엔 사루비아가 자리를 채운다. 동백나무숲과 솔바람정원, 하늘연못정원, 꽃밭정원, 감귤꽃정원 등 여러 테마 정원이 이어지고, 그 사이를 잇는 돌담은 20년 전부터 조금씩 모아놓은 돌로 쌓았다. 돌 모양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살리고, 사람들이 정원을 거닐다가 걸터앉아 쉴 수 있도록 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의 길이는 1km에 달한다.
강 씨가 가장 공들인 공간은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는 꽃밭정원이다. 야자수 길이 끝에 다다르면 다랑논을 닮은 계단식 꽃밭이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여러 빛깔의 띠를 이룬 꽃밭은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며, 정원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평생 꿈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다른 정원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곳에서 걱정을 내려놓고 쉬었다 가시라. 이곳에서는 꽃길만 걸으라, 그런 마음이었죠.”
그런데 정작 꽃밭 구성을 계획한 도면이 따로 없다. 강대여 씨는 머릿속의 설계도를 그대로 땅 위에 옮겨놓았다. 오랜 시간 꽃을 재배하고 어울림을 익혀온 농부의 감각으로, 제주의 것, 한국의 것에 이국의 것이 어우러진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다.

아내를 위한 정원이 모두를 위한 정원으로
“집사람이 조그만 정원 하나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만들다 보니 정원이 커졌어요.”
현용행·강대여 부부는 45년 넘게 꽃농사를 지어왔다. 2002년 현용행 씨가 성산일출봉농협 조합장에 당선된 이후 조합 업무에 전념하게 되면서, 꽃농사와 농장 운영은 강대여 씨가 전적으로 맡아왔다. 그때, 현 씨는 정원을 만들어 주겠다고 아내와 약속했고, 조합장 3선을 마치고 다시 농부의 자리로 돌아온 뒤 그 약속을 조금씩 현실로 바꿔 나갔다.
그렇게 7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정원이 만들어졌다. 이러저러한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민간 정원 등록을 하는 날, 현 대표가 행정 서류를 작성하다가 강 씨에게 전화로 물었다.
“정원 이름을 써내야 하는데, 아내의 정원, 엄마의 정원 어떤 게 좋은가?”
강 씨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고른 이름은 ‘삼달리 꽃밭에서’였다. 누구의 정원이 아닌,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정원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정하고 평범하지만, 그래서 특별한 이름이 그렇게 태어났다.
2007년 강대여 씨는 시한부 판정을 받을 만큼 크게 아팠다. 힘겨운 시간을 건너 회복했지만, 건물 준공을 앞두고 다시 유방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가 정원을 놓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같이 아픈 사람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꽃밭이 없었으면 제가 병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정원이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정원에서 마을로, ‘농의 가치’를 심다
정원의 또 다른 특징은 감귤꽃정원에 있다. 원래 귤밭이었던 자리를 없애지 않고 감귤나무 아래에 어울리는 꽃들을 심어 정원으로 바꿨다.
“제주다운 모습이니 이 밭을 남겨두자 했죠. 농민이니까 만들 수 있었던 정원이에요.”
현 씨는 부부가 농민이니 감귤나무를 잘 알고 그 나무와 잘 어울리는 꽃들도 선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농업이 지닌 가치가 매우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벼는 우리에게 식량을 주지만, 벼가 자라는 모습도 너무나 아름다워요. 농업이 식량 생산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환경을 지키고 주변을 아름답게 하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도 있지요.”
‘삼달리 꽃밭에서’에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삼달리의 작은 식당들도 덩달아 바빠졌다고 한다. 현 씨의 꿈은 자신의 정원을 넘어 마을로 이어진다.

“삼달리가 굉장히 예뻐요. 나무도 많고, 주민들이 꽃 가꾸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각자 마당에 가면 꽃밭이라, 그게 다 우리가 키운 꽃이거든요. 정원이 안정되고 나면, 1년에 한 번씩 마을 정원 콘테스트를 열어서, 삼달리 전체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고 싶어요.”
정원을 만들며 배운 것도 많다는 현 씨는 꽃밭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팽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통 팽나무는 구부러져 있는데, 저 나무는 너무 곧아서 자리를 잡지 못했어요. 네 번이나 옮겨서 지금 이 자리예요. 사람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각자 설 자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네 번을 옮겨 자리잡은 팽나무처럼, 정원에 ‘완성’이란 없다는 것이 부부의 철학이다. 매일 손보고 새롭게 가꾸며, 서로 다른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정원사의 일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 꽃밭에서 뜻밖의 환대와 위로를 받는 이유도 그 마음에 있지 않을까. 열심히 살아온 시간의 무늬를 보듬고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네는, 세상 모두를 향한 다정한 응원이다.


글 신수경 편집장 / 사진 진정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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