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군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여름의 끄트머리, 숲속엔 지칠 듯 푸른 녹음이 한창이었다. 가벼운 산책길로 알고 떠났는데,중간중간 등산복에 등산화, 등산 스틱까지 제대로 갖춘 사람들을 보면서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그리고 눈앞에 계속 펼쳐지는 험난한(?) 산길은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렇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동반한 딸내미의 투정이 극에 달할 때쯤, 갑자기 배경이 바뀐 영화의 장면처럼 비현실적 풍경과 맞닥뜨렸다.
좀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않을 것 같던 자작나무 숲은 그렇게, 하얀 미소와 평온한 얼굴로 “어서 와, 이렇게 많은 자작나무는 처음이지?” 하며 반겼다.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란다. 따뜻한 곳에서는 자생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개마고원쯤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의 비밀은 바로 인공조림이라는 것. 1990년대 초반에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자작나무와 낙엽송을 함께 심는 혼효림을 만들면서 조성됐다.
자작나무는 껌의 원료인 자일리톨로 유명하지만,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다. 옛날 사람들은 맨들맨들한 자작나무 껍질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질기고 잘 썩지 않아 좋았단다. 하얗고 윤이 나는 껍질은 ‘자작자작’소리를 내며 잘 타서 불쏘시개로 쓰였고, 단단하고 병해충에 강한 특성 덕분에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짓는 데도 좋은 재료였단다.
숲을 이루는 70만 그루의 자작나무들은 피톤치드를 발산하여 숲을 보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힐링’이라는 보상을 충분히 해준다.
자작나무에 붙어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곧게 뻗은 자작나무의 잎들이 속삭이듯 흔들리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예전에 읽었던 시 구절처럼, 나도 자작나무를 탈 수 있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도 하게 된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또 타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시들해지고
인생은 길 없는 숲 같다.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간지럽고
한 눈은 가지에 스쳐 눈물이 흐를 때면
잠시 땅을 떠났다가 돌아와 새 출발을 하고 싶다.
세상은 사랑하기 딱 좋은 곳이다.
–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자작나무’ 중
숲에서 나무들의 속삭임을 듣다가 문득, 몸통 한복판 껍질이 벗겨져 밤색 속살이 드러나 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하나둘이 아니다. 못생긴 이름이 비뚤배뚤 새겨져 있기도 하다. 사람의 욕심과 호기심이, 한 번도 욕심을 내지 않았던 나무를 다치게 한 모양이다.
다친 나무를 안고, 나는 다쳤던 마음을 위로받는다. 살다가 가끔, 이 어이없는 환대와 위로를 떠올릴 것이다.
글 · 신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