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0일 한국 정부는 관세를 부과면서 국내 쌀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
다. 수입 쌀에 적용할 관세율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절차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당사자인 농민들은 쌀 시장 개방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경제는 수출 위주의 경제구조다. 아마도 개방정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쌀 문제는 농촌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 사안임을 무시할 수 없다. 농민들과 충분한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개방정책을 밀어붙이면 안 된다.
120년 전의 동학농민운동도 조정의 섣부른 개방정책과 관계가 깊었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1,000여 명의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 조병갑을 쫓아냈다. 농민들은 해묵은 부정부패와 갓 출범한 조정의 개방정책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 당시의 사정은 오늘날과도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았다.
첫째, 19세기 말에는 농업기술이 발달해 농민층이 상당한 수준까지 분화되었다. 토지가 대지주의 수중에 집중되자 사회가 불안해졌다. 오늘날 한국사회도 양극화의 문제가 심각하다. 둘째, 전정田政,군정軍政 및 환곡還穀 등 수취 체제에 모순이 누적되어 농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현재도 조세정의와 병역문제 등은 민감한 사안이다. 셋째, 19세기부터 세도정치로 부패가 만연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권력이 소수 기득권층에 집중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조정이 추구한 개방정책이었다. 1876년 일본과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이후 개항장을 통해 값싼 면직물과 공산품이 들어왔다. 임오군란(1882년)을 겪은 뒤로는 청나라 상인들까지 몰려들었다. 국내 상인들 가운데는 일부 객주와 보부상만 이익을 얻었다.
대다수 전통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가내수공업을 통해 가계 적자를 메우던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컸다.
19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쌀을 비롯한 국내산 곡물의 대일 수출이었다. 일부 지주들은 곡물 수출을통해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대다수 농민은 곡물의 해외유출로 생존에 위협을 느꼈다.
전봉준 등 진보 지식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마침내 그들은 ‘보국안민 輔國安民’, 즉 나랏일을 도와 백성들이 편히 살 방도를 찾겠다며, 농민들과 함께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1894년 4월 27일 농민군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까지 진출했다.
위기를 느낀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외국 군대의 개입은 커다란 과오였다.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한반도에 군대를 급파하자,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은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청일양국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혈전을 벌였다. 승기를 잡은 일본은, 경복궁을 무력 점령해 위세를 과시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대원군은 비밀리에 전봉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속히 서울로 올라와 국가의 운명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1894년 가을,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외세를 내쫓고, 자신들이 원하던 정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못 되었다. 소위 ‘토벌작전’에 참가한 일본군은 2~5만 명의 농민군을 무참히 살해했다. 농민군은 재기불능이었다.
본래 고종은 청나라를 이용해 농민군을 탄압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의 운명은 위기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명성황후도 시해되었다. 전승국 일본은 은화 2억 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청나라에 전쟁배상금 조로 뜯어냈다. 그 당시 일본의 수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를 군비 확장에 쓸어 넣은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내달았다.
고종과 그의 측근들이 주도한 ‘개화정책’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들이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개화정책을 편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었지만, 그 부작용이 너무 컸다. 외세는 주권을 위협했고,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 농민군은 사태의 이러한 본질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외세와 기득권세력을 응징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두 방면에서 에너지를 받았다. 하나는 동학이요. 다른 하나는 소농 특유의 두레 조직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대다수 농민은 소농이었다. 당시 소농은 두레를 통해 생산과 제의와 오락을 함께하며, 깊이 연대했다. 소농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던 그들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교리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폭력을 없애, 백성을 구하기”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지금 세상의 사정은 그때와 비슷하지만 또 다르다. 산적한 농촌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연대를 통한 평화로운 해결책은 없는가.
※필자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비롯해 독일 튀빙겐대학교, 보훔대학교, 베를린자유대학교 교수 및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의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2012, 푸른역사),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2012, 21세기북스) 등이 있다.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학술) 부문과 2012년 한국출판평론상 ·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