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모데나의 협동조합
이탈리아는 150년 협동조합 역사를 자랑한다. 1854년 최초의 협동조합이 생긴 후 1886년까지 248개의 조합에 7만 명이 가입했다. 1948년에 이탈리아 민주 헌법 45조에 협동조합 조항이 명시되었을정도로 협동조합의 역할이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모데나Modena에는 무려 974개의 협동조합과 30만 명의 조합원이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이탈리아 모데나의 다양한 협동조합을 배우고 왔다.
행운이 더 있는 사람과 행운이 덜 있는 사람이 함께하는 곳 _ CSC 청소용구 사회적 협동조합
이탈리아 모데나의 “CSC 청소용구 사회적 협동조합” 은 1963년에 창업해 현재 지적장애와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을 고용하여 청소용품을 생산·판매하는 ‘일자리 창출형’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17명이 일하는 중소기업이지만 규모가 크고(이탈리아 내 관련 기업 중 3위 매출 규모정도) 내부 시스템이 잘 정착되어 있다.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협동조합임을 밝히는 것이 도움되는가?”라는 연수단 질문에 나디아 페라리니Nadia Ferrarini 대표의 대답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소비자들이 우리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곳이 ‘협동조합’이라서가 아니라 ‘상품의 질과 납품기한을 잘 맞춘다는 신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소비자의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대화는 계속됐다.
“정부의 지원이나 세제 혜택은 어떻게 되나?” 나디아 대표가 답했다.
“없습니다.” 너무도 짧은 대답이 길게 느껴졌다. 보조금이 없으면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보조금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는 시민사회의 현실. 돈 끌어오는 일을 잘할수록 칭찬 받는 우리 농촌 현실이 떠올랐다.
“출자를 늘리거나 효율을 높여 잉여금을 많이 만드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게도 좋지 않나?”라는 질문에 나디아 대표는 대답했다.
“작업시간이나 효율성이 아닌 생산 가격을 기준으로 알리안떼 사회적 기업과 협력한다. 또한, ‘행운이 덜한 사람(‘사회적 약자’의 이탈리아식 표현)’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노동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CSC는 잉여금이 남는다면 일자리 유지를 위해 재투자할 것이다.”
CSC 사업 설명을 들을 때는 철저히 기업이었다. ‘소비자·상품·경영’이라는 핵심단어. 그런데 운영 방법을 이야기 할 때는 ‘사람·가치·책무’가 더해졌다. 성과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 개개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노동을 통한 이익의 창출, 협동의 문화와 학습, 그리고 생활 속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 협동조합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립하고 연대하는 지역 협동조합 연합 _ 레가코프 모데나 Legacoop Modena
‘Lega’는 연맹, 연합이라는 말이다. 모데나의 974개의 협동조합 중 350개가 레가코프Legacoop에 가입해 있다. 사무총장인 지안루카 베라사니Gianluca Verasani 씨와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에서도 한국 사람으로서 당연한 질문이 나왔다.
“레가코프와 개별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세제 지원은 무엇이 있는가?”
“이탈리아 협동조합은 다른 자본주의 기업 이상의 혜택은 없다. 협동조합에 대한 혜택이 있다면 그것은 차별이다.” 일순간 생각이 멈췄다. 혜택을 받는 일을 스스로 차별이라며 거부하다니?
“정부 지원은 없지만, 협동조합을위한 재정 지원 조직이 많이 있다. 모든 협동조합은 이익금의 3%를 공동기금으로 낸다. 폐업 시 잔여금을 재정 지원 조직이 확보한다. 이를 가지고 재투자한다. 그러나 무상 지원은없다. 모두 장기 저리 대출이다. 이 대출을 받으려면 조합원이 자본금을 일정액 이상 모아야 한다.”
협동조합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 조직의 기초는 자조, 자립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외부 지원금에 의존해 사업을 시작하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협동조합 사이의 경쟁이 발생할 수 있을 텐데, 레가코프는 어떻게 조정하나?”
“협동조합 간 협동이 되도록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자본주의 기업과 경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중요하다. 그래도 안되면 시장 경제의 경쟁에 맡긴다. 레가코프는 회원 협동조합의 자발적 조직이지강제 조정하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자발성과 자기 결정권이 없는 협동조합을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 그리고 서로 함께 삶과 노동의 질을 개선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지역의 공동 발전을 도모할 때 깨어진 노동과 사람, 마을 사이 관계가 회복되고 한국 농업과 농촌이 살아갈 수 있다.
조합원 스스로 지켜나가는 품질 _ 모데나 지역 특산물 협동조합 연합 Palatipico Modena
모데나의 대표 특산물은 람브로스코 와인, 파르마지아노 레지아노 치즈, 발사믹 식초. 이 세 특산물의 생산자들은 협동조합이나 협회를 구성하고 다시 ‘협동조합의 협동’을 위해 연합 조직인 팔라티피코Palatipico를 만들었다. 주 임무는 판매 촉진을 위한 협동과 인증제도 운용이다.
모데나의 식품 인증 관리 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지리적 표시제(IGP, Indicazione
Geografica Protetta)는 광역 지역 내에서 최고의 품질을 생산하기 위한 관리 체계이다. 둘째,
DOP(Denominazione di Origine Protetta)는 우리나라의 전통식품 인증제도와 우수품질관리 인증제도가 혼합된 형태이다. 이들 인증제도 안에는 유럽연합(EU)과 이탈리아 정부의 식품 안전에 대한각종 법령과 규제, 그리고 품질, 역사, 전통이라는 요소가 포함된다. 이 인증을 받으면 이탈리아뿐만아니라 세계에서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인증 관리에 최선을 다한다. 각 생산자는 먼저 생산 지역을 준수해야 하고, 할당된 생산량 이상으로 생산하지 못한다. 개별 농가가 적정 수준으로 생산을 통제하여 품질을 최고로 유지하고, 그에 따라 모든 생산자가 이익을 보는 방식이다.
팔라티피코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 인증제도는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과정과 세대를 이어가면서 발전되어온 것이다. 이 제도는 곧 모네나 농업의 능력이고, 이 제도들을 통해 생산된 식품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며 앞으로 우리가 지켜가야 할 중요한 자부심이다.”
주목할 점은 이 인증제도를 생산자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인증제도들은 1934년 모데나 5개 지역의 생산자와 협동조합이 모여논의를 시작하여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생산자들이 스스로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람브로스코 와인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네나에는 모두 4개의 DOP가 있다. 기존 DOP 기준 이상으로 생산 관리를 생산자가 실천하면 새로운 DOP 브랜드를 인정해 준다.”
정부 기관과 부처의 권한으로 만드는 제도가 아니라 생산자들이 스스로 만드는 인증제도, 이를 통해 공동의 이익이 실현되면 우리 농업의 지속 가능성도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협동조합 _
포르미지네 와인 양조 협동조합 Cantina Sociale Formigine Pedemontana
“포르미지네”는 1920년 만들어져 현재 400여 명의 포도 생산자로 구성된 와인 협동조합이다. 볼로냐 지방에서는 중간 정도 크기의 양조장이지만,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곳 역시 최고의 품질을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엄격한 품질관리 인증제도인 DOP와 IGP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생산량의 70% 이상이 지역에서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시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주민들이 차를 몰고 와서 직접 와인을 사가는 모습이었다. 노부부가 말 통을 가져와서 직접 와인을 받아가는 장면은 어딘지 익숙하다. 우리에게도 동네 양조장이 있었다. 때가 되면 양조장에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가는 모습. 이곳에서는 와인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CSC와 마찬가지로 지역사회와 일상을 함께하는 협동조합의 모습이 농업 분야에 그대로 보였다.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고 전통을 지키는 생산자와 생산물, 그들과 수십 수백 년 동안 친숙해진 다수의 소비자가 만들어가는 상품이기에 세계시장에서도 호소력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늙어가는 만큼 역사와 전통은 새로워진다 _
발사믹 식초 장인 “쥐세페 카타니 Giuseppe Cattani”
가족경영체인 쥐세페 씨의 발사믹 식초 농장은 그 자체가 역사였다. 4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그맛과 향은 동양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감동을 주고도 남았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지 20년 된 농장에서 직접 키운 포도로 “세대를 이어주는 식초”를 만들며 “발사믹 식초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은 인생의 임무이자 고귀한 의식”이라는 말에 전율이 일었다. DOP와 IGP 기준에 따라 정기적인 외부 검사를 받게 되며 최고의 생산물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만든 병에 담겨 판매된다. 모데나 사람들은 “페라리(고급 승용차)의 열쇠는 빌려주지만, 발사믹 식초 저장고 열쇠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쥐세페 카타니 씨의 저장고에는 1860년에 만들어져 153년 묵은 발사믹 식초가 있었다. 자동차는 새로 살 수 있지만 153년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다. 그들에게 역사와 전통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우리에게 이런 소명 의식이 있는 농부가 몇 명이나 될까? 아니,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농민들을 살게 내버려뒀던가? 한국전쟁으로 뒤집어진 문화와 전통, 식량 증산을 위해 멸종된 토종 종자와 전통 식품, 개발 독재가 강요한 석유 농업, 보조금으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명맥을 유지하는 한국의 농업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농장만의 이야기와 숨결을 스스로 만들어가다 _
농업회사 유기농 험브레 치즈 농장 Azienda Agroalimentare Biologica Hombre SRL
험브레 농장은 장거리 이동 때문에 아침 8시경에 방문했다. 그 시간에 이미 집유는 완전히 끝나고 치즈 만들기도 마지막 단계에 있었다. 만국의 모든 농민은 새벽부터 일한다. 아침 안개와 햇살 속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모데나 밸루치 마을의 농민들과 일 철이 시작되면 새벽 5시에도 전화를 걸어 “나여기 월구리 논인디 트랙터 좀 얼릉 끌고 와.”를 외치는 대한민국 아산 송악면 농민은 닮아 있었다.
농장을 견학하며 우리 농가가 훨씬 더 자동화·기계화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효율 중심의 농장 배치에서는 맛볼 수 없는 묘한 매력을 풍겼다.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오래된 농기구들이 별다른 질서 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무질서에서 오는 편안함은 서로 다른 느낌을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농장에 숨은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강요된 이야기가 아니고 저마다 다르게 느낄 자유가 있는 이야기를….
협동은 스스로 자기 삶과 마을을 만드는 과정
협동조합이든 기업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다. 제도 자체가 성공이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협의하고 합의하는 등 민주적인 과정에서 힘을 얻고 노력을 하게 된다. 자기 삶을 결정하는 과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때 창조적인 힘이 생긴다. 농민에게 권한을 주어야 한다. 농민에게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협동은 스스로 자기 삶과 마을을 만드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성급하게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때 오히려 스스로 알아서 잘 살게 된다. 지속 가능성은 바로 그 끈기다. 우리에게도 끈기와 지속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협동하고 연대하여,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농업 발전을 이끄는 다양한 협동조합이 우리 농업에도 깊게 뿌리내릴 수 있길 기대해본다.
※필자 유삼형: 충남 아산 송악골영농조합법인 사무국장. 모종만 키워 공급하는 수확하지 못하는 월급쟁이 농사꾼이자 송악면 친환경 생산자들의 생활과 생산을 지원하는 ‘자칭’ 머슴이다. 자연생태계만큼 인간 생태계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돈’이 아닌 ‘인격’을 거래하는 농업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