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 즈음이면 흔히 듣던 속담이 요즘 농촌 현실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차례상에 오를 햅쌀 가격이 올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햅쌀은 일반적인 10월 추수기에 앞서 생산돼 ‘조생종’으로 부른다. 그 조생종 벼 값이 지난해보다 40kg 한 가마당 최대 1만 5천 원이나 폭락했다.
전남 장흥에서 벼농사를 짓는 이연옥 씨는 조생종 벼 값 얘기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 씨는 지난 9월 2일 조생종 벼를 40kg 가마당 5만 2천 원에 팔았다.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20%(1만 3천 원) 낮은 가격이다.
조생종 벼를 수확한 뒤 이모작으로 미나리를 재배하는 나주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나주 농민 고광길 씨는 “올해 조생종 벼 수확 초기에만 해도 5만 6천 원이던 가격이 9월 9일엔 4만 9천 원까지 순식간에 내려갔다”면서 “지난해 시세인 6만 4천 원에 비하면 1만 5천 원이나 떨어지니 환장할 노릇”이라며 혀를 찼다.
올해 조생종 벼 값이 바닥세를 보이는 이유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추석이 지난해보다 늦어 소비량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고, 지난해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를 앞두고 한 표가 귀한 현직 조합장들의 ‘선심성 가격’이 벼 값에 더해졌으리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올해 쌀값 하락의 일등공신은 ‘수입쌀’이라는 것이 농민들의 이구동성이다.
쌀 관세화 원년, 관세만 내면 누구나 쌀 수입하는 시대
2015년, 농업계의 가장 큰 변화는 ‘쌀 관세화’가 시작된 첫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까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쌀을 수입할 수 있었으나, 올해 1월 1일부터 513%의 관세만 내면 누구든 자유롭게 쌀을 수입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쌀 수입 역사는 20년 전인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WTO 협상에서 우리나라는 주식인 쌀의 민감성을 인정받아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간 쌀 수입이 미뤄졌다. 그 대신 우리 국민의 1992년도 쌀 소비량을 기준으로 4%까지 가공용 쌀을 점차 확대 수입해야 했다. 최소시장접근MMA:minimum market access 쌀, 즉 의무수입물량 쌀이 반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4년 쌀 재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의 10년에 더해 추가로 10년간 쌀시장 개방을 연장하기로 했다. 물론 소비량의 8%인 40만 8,700톤까지 MMA 물량을 늘린다는 부대조건이 뒤따랐다. 게다가 떡이나 주류에 이용하는 가공용 쌀만 들여오던 것을 밥쌀용 물량도 30%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부담까지 떠안고 말았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 20년간 전면개방을 미뤄온 우리 정부는 지난해 9월 30일 세계무역기구 WTO에 513% 관세율을 밝히며 쌀 전면개방을 선언했다. 40만 8,700톤의 MMA 쌀은 ‘저율관세할당 TRQ:Tariff-rate quota 물량’이란 이름으로 바꿔 영구 수입한다는 내용이다.
밥 시장도 떡 시장도 모두 ‘수입쌀’ 천국
문제는 지난 20년간 가공용·밥용 쌀이 국내 시장에 미친 마이너스 요인이 심각하다는 데 있다. 떡이나 막걸리 등 쌀을 가공해 만드는 제품은 대부분 수입쌀에 자리를 내줬다. 처음에야 안전성과 맛에 반신반의했지만, 원가를 낮추는 저렴한 가격은 이 모든 것을 평정했다. 식생활 또한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밥그릇 크기만 봐도 작아졌고, 밥 대신 햄버거, 피자, 치킨 등 먹을 것이 흔하고 다양해져 밥심만 고집하는 엄마는 구식인 시대가 됐다. 실제 1인당 쌀 소비량은 1990년 119.6kg에서 2014년 65.1kg으로 줄었다. 이렇듯 쌀 소비량이 줄었는데 국산 쌀만 써도 부족한 시장을 수입쌀과 나눠 쓰고 있다 보니 쌀은 처치곤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지난 9월 17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늘어나는 쌀 재고 문제의 해법에 대한 정책토론회에서 “1990년 이후 연평균 재배면적 감소율은 1.8%”라며 1990년 약 125만ha의 쌀 재배면적은 2014년 90만ha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다만 쌀 재배면적 감소율보다 소비감소율(2.5%)이 더 크기 때문에 쌀 재고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올해 조생종 쌀값의 하락은 가격 경쟁력에서 수입쌀에 밀리고, 소비량도 줄어든 국내 쌀시장의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수입쌀의 유통관리 체계가 엉성한 것도 문제다. 지난해 관세화 선언을 앞두고 농민들을 분노케 한 사건이 있었다. 포장지에는 쌀 주산지 명칭을 내세운 ‘이천00’라는 회사명이 쓰여있고 문구 또한 ‘따뜻한 햇살과 기름진 토양에서 잘 가꾸어진 최고의 쌀’이라고 적어 이천 쌀인가 싶었으나, 실상은 미국쌀 95%와 국산쌀 5%를 섞은 ‘혼합쌀’이었던 것. 게다가 성분표시만 있다면 수입쌀 비율이 얼마든 모두 ‘합법’이다.
정부는 그동안 수입쌀과 국내산 쌀의 시장이 분리돼 있어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불과 5%만 국산쌀이 섞인 ‘혼합쌀’ 문제는 지난 20년간 수입쌀이 국내 쌀시장에 미친 피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쌀의 혼합 판매를 금지하는「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농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지난 7월 7일부터 시행돼 현재 국산쌀과 수입쌀, 생산연도가 다른 쌀의 혼합유통판매는 불법이다. 정부는 애초 혼합쌀 금지를 요구하는 농민단체에 수출국이 문제 삼을 수 있다며 정색했으나, 법안이 개정된 이후엔 관세화 대책으로 내세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수입쌀이 국내에 들어온 지 꼬박 20년이 돼서야 하나의 안전망이 생긴 것에 농민들은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말을 보탤 뿐이었다.
허술한 MMA 쌀 관리, 수요처 분석도 없어
수입 밥쌀용 쌀 수요 분석 자료도 없다. 지난 6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고 MMA 밥쌀용 수입쌀 추진 현황을 점검했다. 이 과정에서 의원들은 수입 밥쌀의 국내 수요처에 관해 물었으나 농림부는 대답하지 못했다. 쌀시장은 이미 열렸는데 지금까지 수입쌀이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사용되는지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면 국내 대책은 어떻게 세운다는 것일까.
이날 국회의 요구에 따라 현재 수입쌀 공매를 대행하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서 국내 수요분석에 대한 연구용역이 뒤늦게나마 진행 중이다.
관세화 원년에 혼합쌀 금지법이 시행되고 수입밥쌀의 수요처를 분석하는 등 주식인 쌀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안일함을 넘어 직무유기다.
일본, MMA 쌀 ‘가공용> 사료용> 해외원조> 밥쌀’ 활용
이와 비교해 MMA 쌀을 수입하는 일본 정부의 노련함은 그 시사점이 크다. 2000년까지 관세화 유예를 받았던 일본은 이보다 앞서 1999년 4월 이른바 ‘조기 관세화’를 택했다. 우리나라의 MMA 쌀과 유사한 일본의 ‘최소수입MA:Minimum Acess쌀’은 1년에 77만 톤. 모두 무관세로 수입한다.
일본 정부의 MA 쌀 도입 기본 원칙은 자국 밥쌀용 쌀시장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에 방점이 찍혀있다. 최근엔 특히 사료용 이용률이 높은 추세다. 지난 5월 일본 취재에서 만난 농민단체 ‘노민렌’의 상임위원 유카와 요시루 씨는 “주로 가공용으로 쓰던 MA 쌀을 사료용으로 본격 사용하게 된 것은 국제곡물가격이 급등하던 2007년, 2008년 시점” 이라며 “수입 옥수수 등 사료용 원료곡 값이 오르다 보니 자연스레 재고가 쌓여있던 MA 쌀을 사료용으로 쓰자는 요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2006년 처음 사료용으로 판매한 MA 쌀은 15만 톤이었는데 이듬해 2007년 58만 톤, 2008년 66만톤 등 4배 이상 늘었다. 이는 자국 쌀값 보호는 물론 사료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 실정에서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사료용 이용이 급증함에 따라 일본의 MA쌀 재고량은 2006년 189만 톤을 정점으로 이듬해부터 감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MMA 쌀은 가공용과 밥용에 국한돼 있는 데 반해 일본은 사료용, 해외원조에까지 MA쌀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1995년부터 2013년 10월 말까지 일본에 들어온 MA쌀 총 1,281만 톤 중 가공용 33.4%, 사료용 25.1%, 해외원조용 23.7% 순으로 수요처를 분산시키고 주식용 10%, 재고 6% 수준으로 선순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또한 쌀값 폭락이 심각한 상황이다. 쌀값이 40년 전 수준으로 폭락했다는 일본 농민들의 원성이 자자한 가운데, 일본 정부는 통상 10만 톤을 수입하던 밥쌀을 지난해 1만 톤만 수입하는 등 탄력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관세화 원년을 맞은 우리의 쌀시장은 어떤가. 벼를 심어봤자 소득이 형편없어 강원도 철원 곡창지대에 비닐하우스가 늘어가고 있다. 충남 서천에서 30년 벼농사만 짓던 농민도 딸기하우스를 시작했다. 정부는 MMA 쌀의 부담, 쌀 소비감소 등을 내세우며 쌀 생산을 줄여야 한다지만, 쌀을 줄이면 밭농사가 늘고, 품목 쏠림현상에 따른 가격폭락으로 매년 마늘·양파밭을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한해 농사를 ‘도박하는 심정’이라고 표현할까.
쌀시장은 이미 열렸고, 뾰족한 대책은 없다. 하지만 논농사는 유지돼야 한다는 사실은 단지 주식의 가치에서뿐 아니라 우리 농업이 유지되는 희망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MMA 쌀의 운용·관리부터 철두철미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 원재정: 한국농정신문 기자. 일 년 열두 달 ‘기사’로 ‘농사’를 짓는다. 농림축산식품부와 국회를 출입하고 있으며, ‘농업이 상식이 되는 그 날까지’ 농민도 알기 쉽고 도시민도 알기 쉬운 기사 쓰기를 염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