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 새해 그리고 희망

계사년癸巳年 새해 첫날, 눈이 내렸습니다.
예부터 정초에 내리는 눈은 서설瑞雪이라 하여 상서로운 일이 생기는 징조였지요. 이 때 쌓인 눈이 춘삼월春三月이 되면 춘수春水가 돼 세상 곳곳으로 흘러, 그 해 풍년이 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지난해는 참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농민에게는 대외적인 악재와 함께 100년 만이라는
극심한 가뭄과 우리나라를 강타한 여러 차례의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유독 많았습니다.
올해도 우리 농업인이 넘어야 할 산이 높고 많을 거라는 조심스러운 전망 앞에, 새 정부가 “농업·
농촌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애정”을 가져 달라는 농업인의 바람을 담은 농업 정책을 펼쳐 ‘행복한 농어촌’의 농정 비전을 실천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어떤 것들이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행복하게 해줄까.
문득 재단이 지난해 11월에 했던 쿠바 유기농업 연수가 생각납니다. 유기농업에 종사하는 농민과
연구원, 정책입안 공무원, 그리고 농업전문기자가 함께 열흘 간 쿠바의 아바나와 산타클라라의 유기농업 현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남미에 있는 쿠바는 22시간, 비행기를 두 번 이상 갈아타야 하는 곳입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방법도 편치 않지만, 유기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쿠바의 유기농업은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14
쿠바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지요. 그 후 미국의 점령을 받았고 1959년 카스트로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과의 수교 단절과 경제봉쇄 조치가 뒤따랐습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단작위주 농업을 하고 있던 쿠바는 엄청난 타격을 받습니다. 당시 해외의존율이 70%였던 쿠바가 외부자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선택한 것이 바로 유기농업, 도시농업이었습니다.
쿠바의 유기농업은 환경생태보전과 생산성 향상을 함께 가져왔고, 이 사례는 세계의 전문가와 정책가들을 놀라게 하면서 2003년 세계유기농대회에서 “인류 미래의 위대한 희망”이라는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노력과 함께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2013년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나라의 2011년 식량자급률은 22.6%. 1991년 쿠바보
다도 낮은 수치입니다.
유럽연합, 미국, 중국에 이어지는 자유무역협정 등 계속되는 개방의 폭과 속도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셉니다. 게다가 세계 식량 파동이 빈발하고 자원 고갈과 환경, 기후변화 문제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쿠바가 주는 교훈에서 보듯 이제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과 정책도 달라져야 합니다.
농업과 농촌의 문제는 전 국민의 생명과 삶의 가치에 직결되는 문제임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그동안의 농업정책이 근시안적 통증 완화를 위한 ‘진통제’였다면, 앞으로의 농업정책은 원인을 잡고 자생력을 키우는 ‘치료제’와 ‘영양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에 농민도 자생력을 키우고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합니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만든 서설의 기운에 모두의 바람을 담아 새해에는 우리 농업과 농촌에 희망이 깃들고, 국민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