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대진원예연구농장 대표
반백이던 머리카락이 온전히 하얗게 변했다는 것 그리고 민첩했던 몸놀림이 다소 둔해진 듯 한 것 외에 그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농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김선일(75) 씨. 그는 올해로 칠순을 넘은지 5년이 되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20년 전 제1회 대산농촌문화상 시상식 단상에 함께 올랐던 아내 장군자(72) 씨는 여전히 그의 곁에서 농장 일을 돌본다. 그때 스물둘 꽃다운 청년이었던 막내아들 병구(42) 씨가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 그때와 다른 풍경이랄까. 대진원예연구농장도 그대로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발 벗은 아내’처럼.
앞서가는 농민, 늘‘처음’
김선일 씨는 수상 당시 ‘첨단을 걷는’ 농민이었다. 농과대학 입학과 졸업, 그리고 농사에 뛰어든 것 모두 흔치 않은 일이었는데, 시설원예 불모지였던 김해에서 오이 토마토 하우스 재배를 처음으로 시작하여 성공했고, 제1회 농업진흥원(지금의 농업기술센터 지도사)에 채용되었다. 농가에 채소 생산 기술을 전파했던 그는 “정말 밤낮없이 일했다”며 그 때를 회상한다. 그런데 그는 공직을 그만두고 다시 농민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967년이었다.
1970년대 초, 그는 화훼산업의 가능성에 눈을 뜬다.
“그때 누가 꽃에 관심이 있었겠어. 꽃장사도 내가 처음이었지.”
그는 카네이션, 국화 등 종묘배양기술을 개발했고, 무균 종묘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농민이 식물조직배양실을 만들어 종묘생산 연구를 하고 농가에 보급한 것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가 화훼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하나도 없던 화훼농가는 지금 김해지역에 100여 농가, 화훼육종연구소도 생겼다.
김선일 씨는 농장을 시작한 지 20년 만인 1987년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서 채소부문 모범농부상을 받았고, 1990년 새농민상과 같은 해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하면서 선도농업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김선일 씨에게 유난히 처음,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그만큼 그가 다른 이들보다 늘 한 발 앞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자부심과 긍지가 되지만 이면엔 큰 부담도 있다. 이제는 상을 받은 연도도, 공적도 희미해졌지만 근 50년, 일생을 농업이라는 이름과 함께하고 있다.
제1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 그리고 달라진 삶
대산농촌문화상 수상 당시 그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고 했다.
“조직배양으로 생산을 하고 나면, 문제는 판로였지. 여름이면 강원도 평창까지 묘를 갖고 돌아다녔지만 팔기가 힘들었어. 당연히 빚이 늘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농가 부채는 농민에게 아주 무거운 짐이었다. 그때 대산농촌문화상을 받았다.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상금으로 빚을 갚았다.
20년 전 3천 만 원을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장군자 씨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집에 오면서 정말 3천만 원이 맞는가 공항에서 다시 확인했잖아요. 정말 고맙고 고마운 돈이었습니다.”
빚을 정리하니 빛이 보였다. 차츰차츰 상황이 좋아졌고 빚이 없으니 바가지가 새질 않았다. 그 바가지에 조금씩 생활의 여유가 차올랐다. 그 즈음 ‘분화’라는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게 된다.
빚 없는 농사가 기본이다
김선일 씨는 내실 있는 농장 운영에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그 처음이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지금 그의 농장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쩌면 첨단농업과 거리가 먼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면 온실 안이 각 라인마다 개별난방으로 설계하여 품목에 맞게 온도조절을 따로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품목도 한 공간에서 자랄 수 있다. 또한 채광 역시 식물에겐 중요한 것이라 볕이 잘 들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대단한 시설은 아니다. 비용을 줄여 효율을 높이는 절약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와서 보면 뭐 이런 시설이 다 있나 싶은데…….”
둘째는 작물 선택이다. 병충해에 강하고 생장관리가 수월한 품목을 선택하고 어떤 작물이든 원하는 출하시기를 맞추는 것이다. 원하는 출하시기가 나오면 역산하여 파종하는데, 여기에는 김선일 씨의 특별한 재배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카네이션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때가 5월입니다. 그때 시장에 내려면 파종하는 시기와 생장관리를 잘 맞춰야하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농민들이 와서 물어요. 어떻게 정부 보조를 전혀 받지 않고 이렇게 농장을 운영하십니까. 내 대답은 빚을 지지 않는 것. 내 영역과 역할 분수에 맞게 욕심을 내지 않고 시작하는 것. 그게 농업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이야기해요.”
김선일 씨는 한 해 농사가 끝나면 내년 농사지을 준비를 다 해놓고도 몇천만 원씩 은행에 저축을 한다. 시간적 여유를 즐기며 여행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노년을 기대지도 않는다. 그는 각종 농업인들 모임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건전하게 생활하고 활동하는 “제일 재미있게 사는 농부”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한편, 김선일 씨는 아직도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난 해 분화 품종을 개발해 특허 출원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며 웃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 품종을 개발하겠다며 의지를 보인다.
농업인의 자부심을 물려주고 싶어
농장을 방문했을 때 김선일 씨의 막내아들 김병구(42) 씨가 어머니와 함께 작업 중이었다. 이러한 가족농이 가능하기 때문에 시설은 화려하지 않지만 농사짓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병구 씨, 자기는 농사꾼이 아니고 직업이란다. 출근 퇴근 휴가를 제대로 챙기는 직장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베테랑 농업인 아버지와 신출내기 직장인 아들이 기술 문제로 대결을 한단다. 김선일 씨는 놀랄만큼 부쩍 성장하는 아들의 모습에 흐뭇해진다.
병구 씨에게 아버지보다 나은 점이 뭐냐고 질문을 던지자 웃으며 말한다.
“뒤에 서있으면 빈틈이 보이고 그 빈틈을 메우고 있는 거죠.”
이제 함께 농사일에 뛰어든 지 5년, 머리를 풀고 음악을 하던 자유로운 청년이 새벽부터 농장에 나와 건강한 땀의 의미를 깨닫는다. 김선일 씨에게는 든든한 반려자이자 경쟁자, 그리고 전수자가 생긴 셈이다.
노년 걱정 없는 비전, 농촌에 있다
50년, 농업과 함께 한 김선일 씨는 후배 농민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정부의 지원받아 최첨단 시설을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그는 정부의 보조금이나 융자 등을 믿고 가볍게 농업에 투신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막무가내로 농업에 투신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만큼부터 시작하세요. 하고자 하는 작목을 정하고 충분히 배우고 뛰어든다면, 노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비전이 이 농업과 농촌에서 나오는 겁니다.”
진실한 농사꾼 김선일·장군자 씨 부부가 ‘정년 없는 직장’을 누리며 살고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농촌에선, 일흔 나이도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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