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든골 사람들

어제 내린 비로 범든골 들판에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미세하게 초록빛이 든다 싶더니 들에 나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일 철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흙 범벅인 장화를 신은 남편이 현관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큰소리로 냉수를 찾는다. 감자 심을 골도 만들고, 고추·호박 등 갖가지 채소 씨앗을 포트에 넣는 작업도 이번 주 안에는 해야 한다. 한참을 쉬지 않고 일했으니 갈증이 날만도 하다. 남편이 좋아하는 식혜를 만들기로 했다.
황금빛 도는 늙은 호박 하나를 반으로 잘라 솥에다 푹 삶아 호박국물을 낸다. 그 국물로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는다. 호박 밥에 엿기름물을 붓고 잘 섞어 전기밥통에 앉힌다. 다섯 시간 정도 지나자 밥알이 삭아서 물 위에 동동 뜨기 시작한다.
반만 덜어서 달인다. 잘 익은 호박물로 지은 밥에 진한 엿기름물에 삭혔더니 설탕을 넣지 않아도 식혜 맛이 달고도 깊다. 혼자서 종종걸음 치는 남편이 목이 탈 때 시원하게 마실 것을 생각하니 잘 만들어진 식혜가 고맙다.
나머지는 조청을 만들기 위해 건더기를 건져낸 다음 그 물을 가마솥에 붓는다. 아궁이에 솔갈비를 넣고 불을 붙인다. 그 위에 장작 몇 개비를 올린다.
남편은 조청에 떡을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언젠가 시골할머니가 조청 만드는 것을 보고 설탕이 들어가지 않아도 꿀보다 달다며 신기해했다. 그때부터 조청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데, 볶음 요리나 조림에 넣으면 설탕이나 물엿을 사용했을 때보다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난다.
장작을 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얼굴로 높은 열기가 전해온다. 조금 물러앉는데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본다. 언제 왔는지 늑동아지매가 곶감 봉지를 들고 서 있다. 바람난 영감 흉도 봉지에 넣어 온 걸까. 얼굴빛이 예사롭지 않다. 냉이를 캐러 가던 누리엄마도 호미자루를 놓고 슬며시 자리에 끼어든다. 아궁이 앞에는 어느새 곶감이 놓이고 헛개나무 삶은 물주전자가 다관역할을 하면서 분위기 있는 특별한 찻집이 된다.
복장 터져 죽겠다는 듯 늑동아지매는 가슴을 쳐 가며 맺힌 응어리를 마구 쏟아낸다. 아침에 빨랫감을 챙기다 옷에 묻은 파운데이션 흔적을 발견하고 영감이랑 대판 싸웠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휴대폰에 찍힌 문자와 통화기록까지 말하면서 절대 같이 살지 않겠다며 서슬이 퍼렇다.
인간 수명이 길어지면서 부부가 해로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긴 세월을 같이 걸어가다 보면 서로 상처 줄 일이 어찌 없겠는가. 하지만 상처에도 치유되는 것이 있고 영영 상처로 남는 것도 있다는 것을 늑동아재도 이제는 좀 알았으면 좋으련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나들이 즐기시는 늑동아재도, 30년을 넘게 그 꼴을 보고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아낌없는 관심을 갖는 늑동아지매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늑동아지매의 푸념이 길어지는 동안 누리엄마와 나는 백 번 천 번 동감한다는 뜻의 맞장구를 쳐준다. 그뿐만 아니다. 기꺼이 늑동아지매의 공범자가 되어 보이지 않는 안갯속 여인을 몇 번이나 죽여준다. 실컷 그러고 나면 늑동아지매는 화가 풀리는지 슬그머니 영감을 다시 살려주고는 옷을 털며 일어선다.
“그래도 집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는 기라. 하다못해 순대라도 사 들고 온다 아이가”
“너머 집 속 맴이야 우리사 모르는 기고 우쨌기나 우리 동네에서는 아재하고 아지매가 제일 닭살 부부라꼬 소문났다 아입니꺼.”
세 여자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담장을 넘고 있다. 어느 집에라도 가서 속마음을 풀어놓아도 아직은 흉이 되지 않는것이 시골 인심이다.
장작불에 어지간히 달았는지 가마솥에서는 짙어진 색깔의 식혜물이 보글거리고 있다. 밥알이 흔적 없이 문드러져 센 불에 졸아야 조청이 되듯이 행복해보이는 가정도 가슴이 미어터지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일까.
봄비가 내리더니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물기가 돌고, 범든골 마을에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는다.

※필자 김영희: 농업인, (사)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장이며 98년 국제신문 논픽션 우수상을 받았다. 부산일보 독자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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