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지

꽃다지

이길숙

오종종하고 키도 작은 남편과 앉아 꽃다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점심을 먹는다.
남편은 키가 작다. 풍채 좋고 인물 좋은 시동생들에 비하면 작은 키에 인물도 떨어진다. 누구를
닮아 혼자만 그렇게 생겼느냐는 나의 말에 ‘무녀리’라 그렇다고 시동생이 받아 농담처럼 말한 기억이있다. 갓 시집와서의 이야기니 40년이 흘렀어도 무녀리라는 이 단어는 내 뇌리에 꽂혔다.
제일 먼저 나오는 강아지를 무녀리라고 부른다는 것. 이 무녀리는 성장이 가장 늦다고 한다. 어미젖을 빨 때도 다른 강아지들이 밀어내어 잘 자라지 못하는 게 무녀리란다.
첫째, 첫술, 첫 경험, 첫 농사, 첫새벽, 첫 삽, 첫 잔, 첫국밥…. ‘첫’ 자가 주는 의미는 의무와 책
임의 이미지가 강하다. 한 가정에서의 첫째(맏이)나 무녀리 강아지나 꽃다지는 어쩌면 다음의 번성을 위하여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용단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다.
꽃다지를 따는 계절이다. 호박이나 오이 · 가지 · 토마토 · 고추 같은 열매채소의 첫 열매가 맺는
것을 보면 뿌듯해진다. 씨앗을 발아시켜 이식하고 지주대 세우고 가꾸느라 열심히 돌아쳤던 날들을 평가받는 것도 같고 비로소 농부 자격증을 받은 것 같은 기분도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열매는 예쁘지도, 미끈하지도 않고 오종종하다. 그래도 마주하노라면 전설傳說 속으
로 빨려들어 가는 듯 아련한 감성에 휩싸여 드는 심정이다. 마치 첫 월경을 경험하는 감정이랄까?
대개의 여자가 초경을 하는 나이는 십 삼사 세 정도가 되리라. 초경이 시작되면 처녀로서 아이를
낳는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아직도 연한 새싹 같은 나이에 아이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민망스럽기도 하거니와 당사자는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심정에 놓일게다. 그렇게 안으로 숨기려는 냄새라서 아리아리한 향기로 남는 것인지 모른다.
첫 꽃은 다 자라지 않은 가지에 숨어서 보일 듯 말 듯 피는 꽃이다. 눈에 띄지도 않던 수줍은 꽃
이 진 자리에 또한 수줍게 자리 잡는 첫 열매가 바로 꽃다지이다.
첫 꽃이 필 시기는 기온이 차다. 꽃 주위의 온도가 22℃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낮에는 그럭저럭
견디더라도 야간 온도가 떨어지니 꽃술마저 다 펴지 못하고 옹송거리고 있느라 첫 열매는 매끄럽지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첫 열매의 맛과 향은 다음으로 열리는 어느 열매도 따라오지 못한다.
계속 좋은 열매를 따내기 위해 따야 하는 꽃다지는 말 그대로 꽃을 다져준다는 의미에서 따내야
하는 희생의 열매지만 맛은 그 작물 본연의 맛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열심히 가꾸는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응분의 보상 같은 맛이다. 방금 따온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밥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는 기회도 이맘 때 뿐이니 요즘 뜨는 말로 웰빙 음식이 아니던가?
고추밭을 대충대충 뒤지고 다녀도 꽤 많은 양이 된다. 아들 집에도 보내고 사돈댁도 부쳐 주고 다른 지인들에게 나눠 주면 좋아들 할 것이다. 나누어 주며 꽃다지 고추는 상큼하여 아삭아삭 맛있다고 얘기할 터이다. 덧붙여서 “풋고추는 흔해도 꽃다지 고추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작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또 말할 것이다.
호박도 첫물은 따야 한다. 애호박을 반달로 썰어 새우젓 넣고 자작하게 지지면 달큰한 맛이 일품을 넘어 원조 특품 맛이다. 부드럽고 구수해서 마을 경로당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호박은 경로당부터 보내줄 생각이다.
따야 하는 첫물이지만 첫 열매 없이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를 딸 수 없다. 나이 적은 삼촌도 있고 고모, 이모, 숙모,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지만 나이가 적은 형은 없으니 촌수 상으로는 형이 제일 높은 위치라 할 수 있다.
첫 열매라는 이유로 따야 하는 꽃다지, 그러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열매를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해보니 참으로 막중한 위치라는 걸 느낀다.
꽃다지 고추 따느라 흘린 땀방울을 씻고 무녀리 남편과 점심을 먹는 이 시간, 이런 생각으로 슬며시 웃음이 나는 이유를 남편은 아마 모를 것이다.

※필자 이길숙: 농어촌여성문학회 3~4대 회장을 역임. 경기도 안성에서 복합영농을 하며, 집필 활동을 한다. 마터나문학상, 농림부장관상(문화부문)을 받았다. 저서로 수필집 『이원농장일기』(2012, 한국미소문학)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