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습니다. 밭에 나가봅니다. 가지와 고추도 활기차게 자랍니다. 막 머리를 밀고 올라오
는 콩이 포동포동합니다. 물과 비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가뭄에 물을 아무리 길어다 주어도 잎도 열매도 크지 못하고 앙다물고 있습니다. 비를 맞은 곡식들은 어린 자식들처럼 풋풋하고 기운찹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뒷짐을 지고 밭고랑을 이리저리 시찰을 합니다.
고랑에 웅덩이가 생겼습니다. 그림자가 진다고 밭 언저리 나무들을 베어버려서 산 흙이 밀고 들어 온 탓입니다. 조금 덜 먹을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땅강아지 한 마리가 수선스럽습니다. 어린 시절에 땅강아지는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몸에 물이 묻지 않아 자꾸 물속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수영선수 박태환처럼 빠르게 헤엄쳐 나옵니다. 그런 땅강아지가 물을 무서워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들여다 보니 웅덩이 가까이에 알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산했나 봅니다. 밭곡식 자라는데 해로운 땅강아지입니다. 하지만 제 새끼들을 지키려는 몸짓이 감동입니다. 그래서 호미로 물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이 빠지자 땅강아지는 더 이상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밭이랑은 곧 평온해졌습니다. 바람이 살랑 불어 모든 잎이 춤을 춥니다. 초록의 경연입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여름철 집중호우만 없다면 내가 사는 이곳은 참 편안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참깨 씨앗을 한 구멍에 많이 심어 놓고 미처 솎아주지 못했더니 한꺼번에 키가 자랐습니다. 하나만 남기고 없애야 합니다. 뽑힌 참깨 모종이 오늘은 애잔합니다. 애초부터 적당한 양을 파종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도 욕심이었겠지요. 어디 욕심이 그뿐이던가요.
밭농사라는 것이 하루 동안 모두 마쳐야 할 일도 있지만 다 하지 않아도 괜찮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도록 일을 하고 다음날 병원에 가서 누워 있습니다. 과일 사면서 한 개라도 더 얻어오려고 애를 씁니다.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두었다가 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과일에도 상인에게도 미안해합니다. 조금만 먹어야지 하면서 또 배가 부르도록 먹습니다. 더부룩한 배를 문지르면서 혼이 나곤 합니다. 옷이 없다고 푸념을 잘합니다. 일 년 내내 밖으로 외출 한 번 나오지 못한 옷들이 울상 짓고 있다는 것도 깜박합니다. 갚아야 할 빚도 없으면서 돈이 많은 사람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잘못 살아왔나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집을 지어 30년 동안이나 잘 살아 왔으면서 지금 잘 지어진 집을 보고 다시 짓고 싶어 합니다. 참 쓸데없는 욕심들입니다.
가끔 불같이 화가 치미는 날도 있습니다. 그 감정을 가두어 놓고 엉뚱한 데서 폭발합니다. 지나고 나면 항상 후회합니다. 이곳저곳에 질퍽거리는 웅덩이만 많이 만들었나 봅니다. 물길도 없이 화를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해도 참을성도 심어놓았다면 훨씬 좋았을 것을 화가 더 많이 떠다닙니다. 때로는 자책도 후회도 떠다닙니다. 버리면 편안할 것들을 가두어 놓고 공연히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물꼬를 빨리 만들어야겠습니다. 화가 적당한 속력으로 빠져나가야 옆 사람도 이웃도 함께 좋아질 테니까요.
욕심보다 더한 불길이 없고, 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 성품이 안온하면 나물죽도 향기롭다고
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자주 읽어보려고 합니다. 법정 스님도 머리맡에 두고 보셨다고 합니다. 소로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흉내라도 내 보고 싶습니다. 정이 많이 흐르는 물길도 만들어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마음 아픈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피었다 지는 풀꽃들처럼 겸손했으면 좋겠습니다. 냇물이 유연하게 흐릅니다. 백로 한 마리가 물 위에서 다리 하나를 접어 넣고 참선 중입니다. 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고고합니다. 부럽습니다. 바위가 막고 있는데도 거역 없이 돌아 흐르는 물을 바라봅니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 삶이 자연스러웠으면 합니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풋고추 몇 개를 땄습니다. 가지도 두어 개 소쿠리에 담아 집으로 향합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필자 형효순: 전북 남원에서 복합영농을 하고 있다. 남원생활개선연합회장, 남원향토문화연구회장,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행촌수필문학회, 전북문인협회 등에서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펼치고 있다. 수필집으로 「재주넘기 삼십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