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포도를 다듬는다. 못생겼지만 잘 손질해 봉지에 담는다. 못난이를 줘도 흉이 안 될 만
큼 스스럼없는 이웃들과 정을 나눌 참이다.
못난이 포도 봉지를 차에 싣고 이웃을 한 바퀴 돈다. 정은 나눌수록 커지는 걸까. 집집이 사과, 복숭아, 밤 등을 실어 주는 바람에 갈 때보다 올 때 짐이 더 무거워져 버렸다.
이웃이 실어준 과일도 못난이들뿐이다. 한쪽이 무른 것, 약간 갈라진 것, 새가 쪼아 먹은 것, 모양이 삐딱한 것 등. 애써 농사지은 것을 생각하면 못난이가 나오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과일이 다 잘나기만 하면 어찌 이웃과 부담 없이 정을 나눌 수 있겠는가. 나눠 먹기는커녕 식구가 먹는 것도 삼가야 한다. 이자 비싼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무난히 메우려면 알뜰하게 팔아 돈을 만들어야 하기때문이다. 비록 못난이지만 정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잘난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존재다.
그런데 얻어온 과일이 너무 많다. 사과나 밤은 두고 먹을 수 있지만, 복숭아는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해버린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궁리 끝에 병조림을 만들기로 한다. 깨끗하게 손질해 병에 차곡차곡 담아 커다란 솥에 넣고 중탕으로 끓인다. 진공포장을 하기 위해 솥뚜껑을 열어보니 푸덕턱푸덕턱 하는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끓고 있다. 왠지 짠한 생각이 든다.
‘네가 가는 길도 참으로 가혹하구나. 잘 생긴 복숭아는 모두 선택되어 순탄한 길을 가는데 아직도 남아 고단한 길을 가야 하는 딱한 존재, 어쩌면 너는 그리도 내 모습을 닮았느냐.’
8년 전 일이다. 음성에 새 포도원을 만든다고 하자 지인들의 반대가 간곡했다. 이제 좀 편하게 살라는 애정 어린 마음에서 나온 반대였다. 하지만 나는 포도농사를 접을 수 없었다. 늘 해 오던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무슨 일을 한들 행복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심은 포도나무를 올봄에 절반도 넘게 잘라냈다.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심어 8년이나 온 마음으로 가꾼 분신과도 같은 포도나무를 자른 것이다.
한-미 FTA라는 거대 괴물의 위력은 엄청났다. 한-칠레 FTA 때와는 달랐다. 한미 FTA가 발효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사시사철 수입 포도가 홍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겨우 2년이 지난 지금 국내 포도 농가의 고통은 그야말로 참혹하다. 캠벨 포도 5kg 한 상자 가격이 단돈 만 원도 안 된다. 20여 년전의 가격이다. 더 무슨 말로 포도 농가의 어려움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도 더는 버틸 힘이 없다.
아무리 정성들여 기른 포도나무라 해도 꾹꾹 눈물을 삼키며 자를 수밖에.
그렇게 포도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번에도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다. 누가봐도 희망 없는 농사는 제발 좀 때려치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기어코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포도나무를 가꿀 때와 같은 정성으로 복숭아나무를 가꾸며 지난 계절을 보냈다. 농사짓고 살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시대에 장정도 없이 여자의 힘으로 굳이 농사를 짓다니. 고집 때문인가, 운명 때문인가, 아니면 못났기 때문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모든 잘난 것에 찬사를 보내왔다. 그렇지만 못난이에게는 애정을 주지 않으며 때로는 하찮게 여기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이제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잘난 것 못지않은 노력을 한 못난이에게도 따스한 시선으로 응원해 준다면, 진심 어린 그 응원에 못난이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의 몸을 완전히 익혀야 하는 고통을 이겨내고 황금빛 병조림으로 다시 태어나는 못난이 복숭아처럼.
열탕 처리가 끝난 못난이 복숭아 병을 꺼낸다. 주방용 장갑을 낀 손으로 열기가 전해온다. 조심조심 반듯하게 뚜껑을 닫아 진공이 잘되도록 탁자 위에 나란히 거꾸로 세워둔다.
이제 못나빠진 좀 전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유리병에 비친 황도의 모습에서 잘 생긴 복숭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본다. 대견하다. 감동이 차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힘을 얻는다.
※필자 이수안: ‘향기로운포도원’ 대표.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 음성에서 30년째 포도농사를 지으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