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농업을 위한 대안으로

조합원의 감귤을 최대한 비싼 값으로, ‘Sunkist’(선키스트)
오렌지 껍질에 ‘Sunkist’(선키스트)라는 브랜드를 잉크로 새긴 것은 1907년이었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아이디어였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선키스트는 고급 오렌지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우리는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감귤 생산농가가 주인이고, 그들을 위해 사업을 벌이는 비영리 협동조합이다. 개개 생산농가들이 힘을 합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해낸다.” 선키스트의 누리집을 열면 이런 글이 나온다. 선키스트는 118년 역사를 자랑하는 협동조합이다.
선키스트 협동조합은 6000여 조합원이 생산한 감귤을 최대한 비싼 값으로 구입한다. 그것이 존립 목적이다. 통상의 주식회사처럼 싸게 사서 이익을 많이 남기려 하지 않는다. 배당을 요구하는 주주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생산농가는 조합과 맺은 엄격한 공동행동 약정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퇴출’당한다.
“투자자가 소유하는 주식회사는 시장경제에서 가장 일반적인 기업 형태이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비자본주의 기업들이 핵심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1차 농산물 쪽은 농민들이 소유한 생산자협동조합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 가정의 8분의 1은 소비자들이 소유한 기업(전기소비자협동조합)에서 전기를 공급받는다. 임대주택 시장에서도 협동조합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헨리 한스먼의 <기업의 소유권 The Ownership of Enterprise, 1996>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시장경제가 곧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이고, 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기업만이 시장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몰돼 있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렌지 브랜드인 미국의 선키스트가 협동조합이라니? 헨리 한스먼은 “(시장만능주의의 첨단에 있다는) 미국에서도 협동조합 기업들이 번성하고 있다”는 ‘진실’을 자신의 저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협동조합 기업들의 성공이 유럽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농업 분야만 놓고 보면, 협동조합은 이미 대다수 선진국의 지배적인 기업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선키스트 협동조합은 6000여 조합원이 생산한 감귤을 최대한 비싼 값으로 구입한다. 그것이 존립 목적이다. 통상의 주식회사처럼 싸게 사서 이익을 많이 남기려 하지 않는다. 배당을 요구하는 주주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생산농가는 조합과 맺은 엄격한 공동행동 약정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퇴출’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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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개혁모델_뉴질랜드의 협동조합

농업개혁의 모델이라는 뉴질랜드의 농업생산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기관차’ 또한 협동조합이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뉴질랜드가 보조금을 철폐해 농업개혁에 성공했다는 절반의 사실만 집중적으로 전달됐다. 협동조합 기업들이 농업개혁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진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농업 개방주의자들의 지나친 목적의식이 ‘불편한 진실’을 가리기도 했겠지만, 협동조합에 대한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몰이해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협동조합기업’을 두 눈으로 보고도 이해하고 설명하기 어려워, 통상의 주식회사처럼 표현하고 넘어간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 여름에 뉴질랜드 북섬의 한 낙농가 집을 방문해 하룻밤을 지내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아내와 둘이서 85마리의 소젖을 짜는 할아버지 농부 에릭 레이(71)의 농장 어귀에는 ‘폰테라(Fonterra) 76507’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도로를 따라 죽 이어져 있는 농장들의 들머리마다 폰테라 로고가 반짝이고 있었다. 폰테라는 에릭 할아버지가 가입해 있는 협동조합의 이름. 낙농가들의 출자로 설립된 뉴질랜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협동조합 기업이다. 총매출 110억 달러로 뉴질랜드 수출의 무려 25%를 차지하는 ‘뉴질랜드의 삼성전자’이고 140개 국에 우유제품을 공급하는 세계 최대의 낙농 수출기업이다.
폰테라의 주인은 에릭 할아버지처럼 직접 소젖을 짜는 1만 500명의 농민 조합원들이다. 그들이 출자지분의 100%를 보유하고 있고, 주식시장의 일반 투자자들은 폰테라의 주식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다. 농장 규모가 커서 젊은 일꾼을 둔 조합원들도 적지 않았지만, 한결같이 가족농의 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들 또한 10년 뒤에 폰테라의 농장주 조합원이 된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조합원들이 좋은 품질의 원유를 공급하면, 폰테라는 최고 브랜드의 우유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로 수출한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입은 조합원들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주주 배당으로 빠져나가는 몫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협동조합인 서울우유의 조합원들이 남양우유나 매일우유의 거래 농가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 협동조합 기업이 평생 농부와 그 가족의 건강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 구실을 하는 것이다.
폰테라의 판매전략 담당 매니저인 세라 패터슨은 “뉴질랜드 전체 낙농가의 90% 이상이 폰테라의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면서 “대다수 낙농가가 단합하면서, 한해 1억 달러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신제품 혁신역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합원의 힘을 모으고 경영의 과실을 고루 나누는 협동조합 정신이 폰테라의 핵심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세계적 브랜드는 키위를 수출하는 제스프리(Zespri)다. 2000년에 창립해 불과 10년 만에 10억 달러 수출이라는 ‘제스프리의 기적’을 이뤄냈다. 제스프리 또한 2,700명의 생산농가들이 100% 출자지분을 보유한 협동조합 기업이다. 제스프리의 홍보 매니저인 데이비드 커터시는 “모든 키위농가들의 참여로 마케팅 전담기업인 제스프리를 세우면서 수출역량을 키우고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키위 농가들은 선별과 포장, 운송 사업을 담당하는 별도의 협동조합 자회사들도 운영하고 있다. 제스프리는 전 세계 키위 수출 물량의 40%(금액으로는 무려 70%)를 점유한다.
제스프리의 성공에는 정부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제스프리만이 키위 수출을 할 수 있도록 ‘독점 허용’을 법제화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뉴질랜드 대법원 또한 지난해 8월 제스프리의 수출 독점이 합법이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전체 농가의 안정적인 소득보장을 위해서라면 협동조합 기업에 예외적인 독점을 용인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는 것이다.

협동조합 없는 농업은 상상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협동조합 없는 농업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농민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있고, 농업의 혈맥을 장악하고 있다. 농업의 규모화와 경쟁력을 거론하면서 모범사례로 드는 유럽의 농기업들 또한 대체로 협동조합이다. 유럽 최대의 청과물 도매회사인 네덜란드의 그리너리(Greenery) 또한 주주들이 소유한 투자자 기업이 아니라, 2천여 농가가 주인인 협동조합이다. 그리너리는 1996년에 시장 개방과 유통기업의 대형화에 맞서 9개 경매농협이 네덜란드원예협동조합(VTN)으로 합병하고 그 아래에 전액출자로 세운 판매전담 자회사이다. 그리너리는 글로벌 경쟁위기를 극복한 협동조합의 내부혁신 성공 사례로 인정받는다.
덴마크의 데니쉬크라운은 자국 양돈산업의 90% 이상을 점유한 독점기업체이고, 세계 최대 양돈기업이다. 한해 도축하는 돼지만도 150만 t으로, 우리나라 전체 물량의 2배나 된다. 총매출액이 10조 원에 육박하는 데니쉬크라운도 협동조합이다. 이탈리아 최대의 우유생산업체인 그라나놀로(Granorolo) 또한 1천여 명의 낙농가 조합원들이 세운 협동조합 기업이다.
유럽 농업에서 협동조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각 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핀란드에서는 육류의 74%, 낙농의 96%, 달걀의 59%, 임업의 34%가 협동조합 경제의 몫이다. 프랑스의 협동조합 기업들은 식품 및 농업의 40%를 책임진다. 노르웨이에서는 생우유의 96%, 치즈의 55%, 목재의 80%, 달걀 및 모피의 70%, 종자의 52%가 협동조합 기업에서 생산된다.
협동조합이 농업 분야에서만 두드러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소매업과 금융 분야에서는 협동조합이 이미 주류 경제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스위스의 1,2위 소매기업인 미그로(Migros)와 코프(COOP)는 둘 다 협동조합 기업으로, 국내 소매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협동조합 기업들이 소매기업 1, 2위에 올라서 있으며, 여러 유럽 나라에서 소매업은 협동조합이 절대 강자의 위치에 올라서 있다.
협동조합 은행들은 유럽 전체 은행 영업의 20% 이상을 점유하는 것으로, 세계협동조합연맹(ICA) 자료로 보고되고 있다. 프랑스 최대 은행인 크레디아그리콜(Credit Agricole)과 네덜란드 1위인 라보뱅크(Rabo Bank)가 대표적이다. 두 은행은 농민들을 상대로 한 신용사업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라보뱅크의 농민 조합원들은 지금도 은행 경영의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북유럽에서는 주택협동조합의 특히 활기를 띠고 있다. 이밖에 스페인의 명문 프로축구클럽인 FC바르셀로나와 세계 4대 통신사로 꼽히는 미국의 AP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협동조합 기업들이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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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협동조합에서는 출자자인 소비자들이 주인이고, 농민협동조합에서는 생산자인 농민조합원들이 주인이다. 그래서 좋은 물건을 값싸게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고, 농민의 농산물을 값비싸게 구입해 주는 것이 각각의 협동조합의 존재이유가 되는 것이다.

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몇몇 석학들의 문장을 모아보았다.
“자본주의 기업은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시장가격으로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남는 이윤을 모두 차지한다. 반면, 협동조합에서는 노동이 자본을 고용해 시장 가격으로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남는 이윤을 모두 차지한다.”(조지 제이콥 홀리요크)
“협동조합의 속성은 자본을 없애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진정한 기능을 노동이 이용하는
도구로 한정시키고 그만큼만 대가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프랑스의 샤를 지드)
말하자면, 투자자가 소유한 자본주의 기업과 달리, 협동조합에서는 노동력을 투입하는 사람이 소유권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소비자협동조합에서는 출자자인 소비자들이 주인이고, 농민협동조합에서는 생산자인 농민 조합원들이 주인이다. 그래서 좋은 물건을 값싸게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고, 농민의 농산물을 값비싸게 구입해 주는 것이 각각의 협동조합의 존재이유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출자해 설립한 노동자협동조합의 경우, 노동자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명이다.
“인류가 영속적으로 발전한다면, 결국 가장 지배적인 결사의 형태는 우두머리인 자본가와 경영의 발언권이 없는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식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평등한 조건으로 결사를 맺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자본을 공유하고, 스스로 선출하고 쫓아낼 수 있는 관리자들 밑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스테파노 자마니교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협동조합은 노동을 자아실현의 기회로 여기는 가장 선진적인 기업형태”라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흔히 ‘두 얼굴의 야누스’로 표현된다. “시장 안에서 작동하고 그 원리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은 경제적 차원의 기업이다. 경제외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주체들과 전체사회에 긍정적인 외부적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은 사회적 단체이다… 협동조합 기업의 지배구조가 난해한 것은 이처럼 시장 코드와 사회적 코드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기 때문이다.”(자마니 교수)
그러면서 자마니 교수는 “이제는 주류 경제학에서도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합리성이 유일한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기업만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협동조합기업 또한 글로벌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는 지적이다.

우리의 협동조합
불행하게도,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건강한 협동조합이 잘 뿌리 내리지 못했다. 협동조합의 옷을 입은 농협과 수협 등이 있지만, 정부의 관리를 받는 반관반민의 단체이지 조합원의 자기책임으로 움직이는 진정한 협동조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협동조합이라야 일부 생협 정도이다. 학교에서는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만이 존재한다는 하나의 등식 말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협동조합이라는 ‘다른 경제’와 ‘다른 기업’을 생활에서 경험하거나 학교에서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좋은 협동조합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악순환이 줄곧 이어졌다. 대한민국 영토를 한 발짝만 벗어나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실인데, 우리의 오감으로 이해하기 실천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던 것이다.
자마니 교수는 협동조합이 활성화하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교육을 꼽는다. 사적 이윤동기가 아니라 협동조합 방식으로 기업이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소비자의 등장은 협동조합 활성화의 둘째 조건이다. 앞으로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는 소비자가 늘어날수록 협동조합의 지평이 더 활짝 열린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기업만을 선호하는 법적 제도적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올해 초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협동조합 설립의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다. 기본법이 발효되는 12월부터는 5명만 모이면 금융과 보험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협동조합 기업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게 된다. 자마니가 말한 세 번째 법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한국협동조합연구소의 박범용 협동조합기업지원팀장은“선진국 같은 대규모 협동조합 기업의 탄생을 당장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고, 기본법 제정 초기에는 기존 시장이 포괄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경제·사외·문화적 약자들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협동조합 설립이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는 △영세상인과 소상공인 △자활공동체와 돌봄사업 △방문교사와 택시기사 등의 특수고용직 노동자 △초기자본 동원이 어려운 청년 창업자 △사회안전망 구축이 필요한 낙후지역 주민 △장애인 등 한계노동자 △보건의료와 공동육아 △주택 및 에너지 △문화예술, 여행, 스포츠 △로컬푸드와 도농교류 등의 영역을 협동조합 활성화 가능성이 높은 10대 분야로 꼽았다.
협동조합기본법 시대의 도래는 우리 농업과 농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최소한 기존의 농협이 진짜 농협으로 거듭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이미 제2농협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일부 영농조합법인이나 농업회사법인에서는 협동조합 방식의 연합체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농촌 재생에 앞장서는 사회적 기업 성격의 협동조합(사회적 협동조합)도 많이 생겨날 것이다.

※필자 김현대: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한국농업기자포럼 발기인. 번역서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 『 진보의 힘』이 있다. 최근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를 감수했다. koala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