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남수 장수한우랑사과랑 위원장
눈이 내렸다. 그것도 세상의 풍경을 덮을 만큼 많이. 전북 장수로 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은 쌓인 눈으로 불친절했지만 차창 밖의 설경은 감탄할만했다. 흰 옷을 입은 크고 작은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에 들어왔고,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게 펼쳐진 눈밭 앞에서는 “눈 덮인 광야를 갈 때 함부로 발자국을 내지 말라”던 옛 선인의 말이 떠올랐다.
송남수 씨(68, 제20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촌발전부문 수상자). 그는 한 평생을 하얀 눈밭에 먼저 발자국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농민이 흙 팔 줄만 알았지 자기 권리는 찾을 줄 모르던”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는 농민의 권리를 찾고 농촌이 골고루 잘 살게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했다.
가톨릭 농민회 회장, 농민연대 상임대표 등을 맡아 멕시코 칸쿤, 스위스 제네바 등에서 열린 DDA 협상 장소에서 국제 농민집회를 주도했고, 한·칠레FTA 협상에서도 농민의 권익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다.
‘오원춘’ 사건으로 ‘눈’을 뜨다
“1978년 경북 영양에서 농민들이 농협에서 알선한 씨감자를 심었다가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완전히 망쳤지요. 그래서 농민들이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는데, 해결이 됐어요. 근데 문제는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행방불명이 된 거예요. 이런 보상사례가 전국적으로 알려질까봐 막으려고 감금을 했던 거죠. 결국 이 사건이 불거져 가톨릭농민회와 정부가 강력히 대립하는 계기가 된 겁니다.”
가톨릭농민회 회원이었던 송남수씨는 ‘오원춘 사건’으로 불거진 농민운동에 참여하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어요. 이렇게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해서 새마을 운동도, 새마을 사업에도 열심히 참여했는데, 너무 사는 게 힘들고 빠듯해. 어느 날 돌아보니 주변에 친구가 하나도 없어요.”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촌에서 살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났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 산업 기반이 농업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는데,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업을 너무나 많이 희생시켰다. 그 희생을 모른척하며 산다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농사짓는 농민이다. 농민의 권리에 관심을 갖고 낮에는 농민회 활동을, 밤이 되면 치열하게 공부했다.
“갑류 농지세라고 들어봤어요? 나락에다가 세금을 매겨요. 을류 농지세는 밭에 달려있는 작물에 세금을 매기는 거죠. 소작료랑 다를 게 없었어요. 도시근로자들이 소득세를 안 내던 시절이에요. 불평등한 조세제도였고, 그걸 폐지시켰죠.”
이전에는 당연하게 부과되었고 농민도 어쩔 수 없이 따르던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세폐지도 중요한 조세개혁이었다.
“산과 물과 도로는 그 나라의 기본 산업이고 국가가 식량을 생산하는 논밭에 물을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하고 수세를 없애라 주장했죠.”
한 때는 농민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던 수세는 그렇게 폐지되었다.
이렇게 농민회의 조직화된 활동으로 불평등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농협조합장 직선제, 비료값 인하 등 불합리한 제도를 하나씩 개선해나갔다.
농민운동 40년, 참 많은 고초와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
고, 또 한 가지 한 가지씩 바뀌는 것을 보면서 “바꿀 수 있구나, 바뀌는 구나”하는 깨달음과 보람을 얻었다고 송남수 씨는 회상한다.
“한·칠레FTA 때는 정말 농민운동이 대단했어요. 한 달 동안 매일 여의도에 가서 독소조항을 빼기 위해 갖은 애를 썼어요. 그 결과 독소조항이 거의 다 빠졌고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거지요.”
농민조직화가 대안이다
1990년대 농민운동단체들이 전농으로 통합되면서 가톨릭농민회는 “생명공동체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유기농을 지향하며 친환경농사를 짓고 국민의 건강을 생각하는 안전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송남수 씨는 가톨릭농민회 회장으로 생명공동체운동을 이끄는 한편, 지역농업을 살리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무궁화신용협동조합을 맡아 이끌면서 농민들의 금융문제뿐 아니라 친환경 농자재 개발 등 앞선 경제사업에 힘썼고,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32개 작목반을 만들어 각각 작목반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실시, 장수지역 사과 품질의 상향 평준화에도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장수 한우랑사과랑축제’를 장수군과 함께 기획하여 장수의 지역 농산물 인지도를 높이는 데도 이바지했다.
“(농민들을) 다 모아놓고 한꺼번에 같은 내용을 교육하면 효과가 그리 높지 않아요. 비슷한 사람
들을 모아놓고 맞춤형 교육을 하면 필요성도 느끼게 되고 효과도 높아지지요.”
한미FTA와 한칠레FTA는 다르다
요즘 가장 첨예한 관심사인 한미FTA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칠레FTA 때는 정말 농민운동이 대단했어요. 한 달 동안 매일 여의도에 가서 독소조항을 빼기 위해 갖은 애를 썼어요. 계절관세를 부과하고 우리한테 불리한 독소조항들을 뺀 거에요. 그때 손배소 들어온 것만 9억 8천만 원이었어요. 주변의 은행 상가들이 장난이 아니었지요. 그러한 투쟁을 통해 한·칠레FTA의 충격을 많이 완화할 수 있었는데, 한미FTA는 독소조항이 그대로 있어요.
정부에서 한·칠레FTA 후에 변화된 게 별로 없지 않냐며 오히려 우리나라 과일값이 올라갔다고,
한미FTA도 그럴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송남수 씨는 물론 독소조항을 없애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소농의 조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의 힘_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농촌형 기업가 한 사람이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농민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조직화하고 이러한 공동체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각 지방자치제와 협력적인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
현재 장수군은 민과 관 협동조직인 ‘농촌발전기획단’을 이어 정책팀과의 활발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송남수 씨는 ‘농업회의소’ 성격의 협력체계를 통해 각 지역에서 개방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정책이 만들어져야한다고 주장한다.
“농민들이 조직화를 해서 지자체가 좋은 정책과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도록 요구하고 협력해야합니다. 반대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행정기관과 파트너십을 잘 구축해야 해요.”
옛날에는 지역간 균형발전을 이야기했다면 이젠 마을별 균형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괄적인 정책으로 어떤 마을은 지원의 혜택을 받아 잘 살고 안 따라오면 못사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 맞는 개별프로그램을 만들어 농촌과 농업인들을 일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송남수 씨의 생각이다.
농민운동은 무조건 반대를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나만 잘 살자는 것도 아니다. 모든 농민들에게 공평한 혜택이 돌아가고 모두 함께 잘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마치 햇볕처럼. 넉넉하고 따뜻하며 공평하게. 그 믿음으로 송남수 씨는 2012년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