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마을회관에 들렀다. 할머니들이 두 패로 나뉘어 화투를 치고 있다. 몇 분은 누운 자세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다.
“어유, 새댁 어서와.”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호칭이다.
“아줌니들도 참, 저도 육십이 낼모레예요.”
“그려? 벌써 그렇게 됐나? 참 이참에 손녀딸도 봤다지?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부른디야?”
회관에 가면 마을 소식을 제일 먼저 알 수 있다. 출생한 지 보름 되는 손녀딸 보고도 할 겸 들른것인데 이미들 알고 계셨다. 하긴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누구네 집의 제사도 꿰뚫고 있는 어른들이다.
손님이 왔다고 한 할머니는 커피를 끓여주겠다며 일어나시고 또 한 할머니는 당신은 빠질 테니 화투를 치라고 잡아끄신다. 밑천이라며 동전도 두둑하게 건네주신다.
마을 회관은 현대판 무릉도원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어르신들이 모여 따뜻한 점심을 해 드시고 후식으로 커피 한 잔씩 나누고 화투를 치는, 날마다 같은 일과를 보내지만 아침이 되면 으레 회관으로 출근들을 하신다.
자식들 성장시켜 품을 떠나보내고 동무끼리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은 축복받는 노년이라 생각된다.
나는 30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섰다. 시할아버님이 살다 가신 마을이니 남편의 본향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20대 후반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등너머 새댁’이란 호칭을 부여 받게 되었다.
말 나온 김에 돌이켜보니 이사하던 날이 생각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온 마을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누구네 집인지 연기가 솟아오르는 굴뚝이 동화 속 풍경 같았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냉혹했다. 마을을 돌아 뚝 떨어진 외딴집에 짐을 풀었는데 뼛속까지 외로워졌다. 사방천지가 하얀 눈밭인데 오랫동안 비워뒀던 집은 안이나 밖이나 춥기는 매일반이었다.
젖은 나무를 주워 모닥불로 말려가며 몸을 녹이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도 마을 사람들이 지게 한 가득 장작을 지고 오셨다.
“이사를 온다고 알렸으면 준비했을 텐데, 차 올라가는 것 보고 부랴부랴 넘어와 봤다네. 눈발에 아이들 데리고 고생이 많네.”
고향의 품이 이런 걸까. 그 일은 내가 농업에 안착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지금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간다. 하지만 세상사에 이미 초월한 어르신들은 당신들만의 특별한 향기로 고향을 채우고 계시다.
무릉도원인 마을회관 앞에는 시골 신선의 지팡이가 나란히 서 있다. 아이들이 타고 난 유모차다. 출퇴근할 때 끌고 다니는 유모차는 할머니 한 분에 한 대씩. 당신들은 그걸 자가용이라 부르신다. 지나가던 이장님이 밖에 눈이 온다며 자가용들을 안으로 들여놓아 준다. 아기 울음이 끊긴지 오래인 농촌에 유모차 행렬이 어울리지 않지만 어른에게 요긴한 지팡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무릉도원인 마을회관 앞에는 시골 신선의 지팡이가 나란히 서 있다. 아이들이 타고 난 유모차다. 출퇴근할때 끌고 다니는 유모차는 할머니 한 분에 한 대씩. 당신들은 그걸 자가용이라 부르신다. 지나가던 이장님이 밖에 눈이 온다며 자가용들을 안으로 들여놓아 준다.
아기 울음이 끊긴지 오래인 농촌에 유모차 행렬이 어울리지 않지만 어른에게 요긴한 지팡이가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긴 유모차에 꼭 아기만 태우라는 법도 없으니 밀든 끌든 어른들의 지팡이 역할로는 최고의 수단일것도 같다. 유모차 안에는 벽돌이 자리 잡고 앉아 있다. 필시 언덕을 오르내릴 때 무게를 잡기위한 방법이리라.
밖에는 30년 전 그날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마을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푸근함에 잠겨간다. 동화 속 나라의 유모차에는 벽돌이 아기처럼 잠들어 있고 화투삼매경에 빠진 어른들은 지구가 떨어져나간대도 상관없을 자세다.
속도전에 쫓기 듯 하는 시대에 고향은 이처럼 아늑하게 멈춰버려서 누구나 오고 싶은 곳인지 모른다.
※필자 이길숙: 경기도 안성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전국주부편지쓰기대회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농업포럼 대표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