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규 담양군농업기술센터 농업연구사
3월, 햇볕이 좋은 봄날이었다. 담양농업기술센터 딸기시험포장에 들어서자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가득했다. 품종대신 숫자와 기호로만 명명된 팻말을 단 딸기들이 줄지어 매달려있는 이곳은 품종 하나를 위해 수없이 많은 ‘딸기 교배 조합’ 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곳이며, 이철규 농업연구사(제24회 대산농촌문화상농업공직부문 수상자)의 하루가 시작되고 또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담양의 대표 딸기로 자리 잡은 ‘죽향’도 여기서 태어났다. 2005년, 일본 품종 ‘육보’보다 좋은 우리 딸기를 만들어 달라는 지역 농민들의 바람을 담아 이철규 연구사가 비닐하우스 2동에서 딸기품종 연구를 시작한지 7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죽향은 세상에 나온 지 3년 만인 2015년 담양군재배면적 30%를 차지했고, 경매 시장에서 최고가격을 기록하며 ‘최고급 딸기’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변변치 않은 연구 환경에서 지방농업연구사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모두 같은 ‘딸기’가 아니다
매장에 진열된 딸기는 모두 ‘딸기’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설향, 매향, 육보,장희, 산타, 죽향, 담향…. 이름(품종)에 따라 맛도 제각각, 재배 적기도 다르다. 현재 국내 딸기 시장에서 75% 이상을 차지하는 ‘설향’은 2005년 논산딸기시험장이 개발한 우리품종이다. 설향이 나오면서 일본 품종이 장악하던 국내 딸기 시장이 확 바뀌었다. 그리고 2013년, 죽향이 나왔다.
높은 당도와 함께 새콤달콤한 맛과 쫄깃한 식감, 뛰어난 저장성으로 전문가들의 좋은 평가를 받은 죽향은 국내뿐아니라 홍콩, 일본, 유럽 등에서 관심을 받으며 지역 딸기를 넘어 세계적 딸기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200주로 되겠나, 한 동 다 하자”
마음을 연 농민들
죽향의 인기를 가장 반기는 사람들은 당연히 딸기재배 농가들이다. 이들은 죽향이 빠른 시간 내에 품종으로, 지역 딸기로 안정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품종을 개발해 시장에 출하하기 전까지가 가장 어렵거든요. 농가에서 재배를 해야 하는데 100주, 200주씩 시범적으로 해서는 환경을 맞출 수도 없고 특성도 잘 안 나와요. 그런데 그때 농민이 ‘이래서 되겠나 그냥 한 동 다 하자’ 하고 하우스를 내준 거죠. 그게 참 고마워요.”
농가 재배를 하면서 낮에는 거의 농가에서 살다시피 했고, 센터 업무는 주로 밤에 했다. 그런 그에게 농민들은 “언제 숙직이요?”라고 묻기 일쑤였다. 농민들과 밤새 토론하고, 유통시장까지 함께 고민했고,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 경매하는 날은 같이 밤잠을 설쳤다.
“농업기술센터는 기술이 모여 있는 곳이잖아요. 그런데도 ‘최고의 딸기’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이 큰 농민들은 센터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죽향을 개발하니까 농민들이 재배해보겠다고 찾아왔어요. 품종 하나로 농업기술센터의 위상이 달라진 거지요. 재배 기술을 계속 이전하며 농가와 소통했고, 그렇게 농민의 신뢰가 커지고 교류가 활발해졌죠.”
딸기, 5월까지 맛있다
이 연구사는 “딸기 농사짓는 것이 애국”이라고 했다. 딸기는 저온에서도 재배가 가능해 난방비가 적게 드는 저탄소 농산물이라는 것. 그런데 요즈음엔 수확시기를 당기기 위해 더 빨리 심고 가온하기 때문에, 예전 대표적 봄 과채류였던 딸기는 1,2월까지 성수기를 이루고, 3월이 되면 고유의 맛이 떨어져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 경우가 많다.
“수입 과일들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이 ‘3월엔 딸기 맛없어. 체리 먹을 거야,’ 하면 참 안타까운 거죠.”
죽향은 5월까지도 단단하고 맛있어 다른 수입과일과 비교할 때 경쟁력이 있다. “초기 생육이 더뎌 이파리 작업 등 노동력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농민들은 말한다.
죽향은 홍콩의 야타백화점을 비롯해 프리미엄 마켓 8개 매장으로 높은 가격에 수출되었고 일본, 호주 등에서도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지난 2014년부터 꾸준히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지속적으로 현지 재배적응성 시험을 함께 하며 국제품질인증 시스템 구축을 준비하고 있다. “생과 수출이 힘든 유럽 시장에 종묘를 수출해 우리나라 농산물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연구사는 말한다.
“어릴 적 꿈이 외교관이었어요. 외교가 정치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젠 유럽뿐 아니라 캐나다, 인도, 케냐,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관심을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최고이면 세계에서도 최고입니다.”
좋은 품종은 미래다
한 가지 품종에 의존적인 딸기 시장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는 것은 우리나라 딸기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죽향을 모본으로 새로운 유전자원을 만들고, 품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의미입니다. 제가 아니라도 10년 후라도 누군가는 해낼 일이고요. 농민에게도 좋아요. 열심히 농사지어 제값 받는 것이 농민의 꿈인데, 좋은 ‘품종’이 그것을 해줄 수 있습니다. 소비자도 좋은 농산물 덕분에 행복해지는 거죠.”
‘만 가지 얼굴’이라는 만개의 딸기 조합에서 하나의 품종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단순한 개발이 아닌, 유통과 소비자까지 생각하는 ‘육성’의 과정에서 좋은 조합을 잃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지만, “연구자는 포기하지 않고 좋은 조합을 끊임없이 찾을 뿐”이라고 이 연구사는 말한다. 이제 또 하나의 품종 ‘담향 3호’(가칭)를 내놓을 준비로 한창인 이철규 연구사. 그는 그렇게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농민이 ‘살만’ 하면, 희망 있는 세상이다.
글 신수경 사진 김병훈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