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권 평화나무농장 대표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농장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촘촘한 농민의 하루 계획에 차질을 주겠구나, 미안함이 앞섰다. 비닐하우스에서 토양 소독을 하던 김준권 씨(70, 제25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가 서둘러 나왔고, 청소를 마무리하던 부인 원혜덕 씨(62)는 당황스러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안은 채 우리를 맞았다. 농장의 마스코트 개 레오도 덩달아 반겼다. 가을 햇살이 넉넉했다.
농장에는 다양한 생명이 산다
밀·콩·수수와 채소들이 자라는 밭 2,500평, 토마토와 고추가 자라는 비닐하우스 10동, 소 20마리가 미니 돼지와 함께 사는 축사, 그 옆 아담한 염소 축사. 평화나무농장에서는 다양한 생명들이 평화롭게 어울려 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때와 날에 따라 농부의 하루는 다르게 채워진다. 봄에 심은 토마토는 가지에서 빨갛게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서 토마토주스를 만들고, 가을에 씨를 뿌린 밀은 수확하고 제분을 해서 빵을 만든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콩, 귀리, 호밀, 수수 등을 통째로 쪄서 말리고 빻아 통곡물 가루를 만든다.
벌이 소비(6각형 벌집)에 꿀을 가득 채우고 부채질하듯 날갯짓으로 수분을 날려 보낸 뒤 자기 몸에서 밀랍을 내어 봉하면, 벌이 겨우내 먹을 양식은 넉넉히 남겨두고 꿀을 뜬다. 아침마다 짜는 산양유는 요구르트와 치즈로 변신한다.
모든 과정은 자연의 시간과 섭리에 따르며, “농사지은 만큼”만 만든다.
이렇게 만든 가공품은 SNS를 통해 직거래한다. 원혜덕 씨가 시기에 따라 자신의 SNS에 토마토 주스, 통곡물 가루, 호밀빵 등을 판매한다고 글을 올려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실제 기다리는 이가 많다) 주문이 폭주하고, 물량은 금세 동이 나 버린다. 원혜덕 씨가 틈틈이 올려놓는 농사 과정과 농장의 일상, 농부의 생각이 사람들의 신뢰와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도 크지만, 무엇보다 ‘맛이 특별하다’고 검증된 덕분이다.
하늘과 땅, 생명과 시간이 함께 짓는 농사
40여 년 동안 유기농업을 꾸준히 이어온 김준권 씨의 농사 방식은 특별하다.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지만 독일이나 미국 등 세계 50여 개국에서 ‘데메터Demeter’라는 이름으로 유기농의 최고봉이라 인정받는 농업이다.
1924년 독일의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창안한 생명역동농업은 화학 비료와 농약 사용을 금지하는 유기농업을 넘어서, 식물의 생장이 달과 별, 식물의 총체적인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믿고 태양, 달과 별자리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농사를 짓는다. 자연과 동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이 농업을 실천하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한데, 씨를 뿌리고 거두는 날과 때를 표시한 파종 달력과 토양과 작물에 활력을 주는 증폭제다.
김준권 씨는 8년 전 독일 생명역동농업협회에서 파종 달력 판권을 받은 뒤 해마다 우리나라에 맞게 시차를 조정하고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디자인하여 배포한다. 녹록지 않은 일이지만 생명을 살리는 지속 가능한 농업을 더 많이 전파하려는 노력이다. 생명역동농업에서 말하는 증폭제 9가지를 모두 만드는 것도 정성과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증폭제 9가지를 만들기 위해서 일 년간 준비합니다. 봄에 캐모마일, 톱풀꽃, 쥐오줌풀꽃, 민들레, 쐐기풀 같은 꽃과 식물을 키워 수확하고, 여름내 잘 보관했다가 가을에 증폭제를 만들어 땅속에 묻습니다. 겨울 동안 땅속에 있는 에너지를 받아들여 증폭제가 완성되는데, 이듬해 봄에 캐내어 땅이나 작물에 주는 겁니다. 증폭제를 사용하면 땅이 활력을 되찾게 되고 작물의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김준권 씨는 생명역동농업이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황당한 주술적인 행위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에 이렇게 답한다.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유럽 사람들이 긴 역사 속에 최고의 유기농으로 인정하는 농법입니다. 실제로 세계의 여러 곳에서 많은 실험과 경험으로 그 결과를 입증하고 있어요. 이 농업을 제대로만 하면 최고의 유기농산물이 나오고 수확량도 다른 농법보다 적지 않습니다. 요 몇 년 사이 큰 걸음을 뗀 느낌입니다.”
독일에서도 신뢰하는 이름 ‘김준권’
평화나무농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국 각지에서 교사와 아이들, 귀농인들, 생명역동농법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온다.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회 모임도 꾸준히 있다. 가을과 봄, 정기모임 외에 미국, 프랑스, 뉴질랜드 등에서 생명역동농법 전문가를 농장으로 초청해 이들을 위한 워크숍도 하고, 국제생명역동농업협회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실천 사례를 발표하여 한국 생명역동농업의 위상을 높인다.
기후조건 등 여러 제한점을 지닌 우리나라는 아직 생명역동농업 회원국은 아니지만, ‘김준권’이라는 이름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독일 생명역동농업협회에서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루돌프 슈타이너 농업강좌)의 독점 판권을 내줄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다.
내년에 비닐하우스 일부를 헐어 논을 만들고 쌀을 생산할 준비를 하고 있다. 농장 안에서의 자연 순환과 자급자족을 완성해 생명역동농업의 본 철학에 더욱 다가선다는 목적이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저녁에 해 넘어갈 때까지 일을 하는데, 억지로 하는 거라면 아마 체력적으로도 못 견딜 겁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면 재미가 있어요. 동물들이 기다리고, 내가 키우는 작물이 있고. 내년 농사 준비를 하느라 소독하는 흙 속에 손을 넣으면 너무나 따뜻하죠. 자연엔 재밌고 즐거운 일들이 가득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평화나무 농장을 떠나기 전, 김준권 씨에게 악수를 청했다.
단단한 손, 굳건한 힘, 맑은 눈. 모든 것이 선명하다.
그는, 농민이다.
글 신수경 편집장 / 사진 유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