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만든 식품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북한에서 남한으로 건너온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분들은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술을 담가 발효시킨 후 증류주를 직접 만들어 마시는데, 뒤끝이 없고 부드러워 맛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소주燒酒는 곡식을 쪄서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킨 발효주를 끓여서 증류한 술에 붙이는 이름입니다. 소주는 “증류주”와 똑같은 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술은 동네마다 집집마다 계절마다 술 빚는 누룩도 다르고 재료도 다르고 솜씨도 달라서 김치처럼 거대한 문화의 숲을 이루고 있었겠지요. 조상신이든 산신이든 천신이든 신령스러운 분을 모시는 제사에는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귀한 손님이 오셔도 술을 대접합니다. 술은 귀한 음식이고 신령한 음식입니다. 음식문화의 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의 소주는 아주 이질적이고 낯선, 거북한 술이 돼버렸습니다. 누룩으로 곡물을 발효시켜서 발효주를 만들고 원료 곡식의 배합 비율이나 증류 방식, 술빚을 때 들인 정성 등에 따라 서로 다른 고유의 빛깔과 향미로 술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던 전통적인 소주와 달리, 이제 소주는 동남아 열대 나라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값싸고 재빠르게 만들어 냅니다. 다 똑같은 순도 99% 이상의 에틸알코올(주정)에 물을 타고, 단지 서로 약간 다른 식품첨가물을 넣어 만든 술이 소주 자리를 차지하고 서민의 술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술을 하나의 문화로 봤을 때,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질은 낮아졌다고 봅니다.
기름 짜는 기계가 아직 없었을 때 들기름을 어떻게 짜 먹었는지 궁금해서 연세 드신 어르신들께 여쭤봤더니 들깨를 쪄서 나무로 만든 기름 짜는 틀에 넣어 꾹 눌러서 짰다고 합니다. 기름이 다 나오면 방아로 찧어서 가루를 만들어 다시 쪄서 한 번 더 눌러 짜는 방식으로 세 번을 더 짜고, 그렇게 짜서 나오는 깻묵은 구수하고 맛도 좋아서 음식을 해 드셨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기름집에서는 들깨를 볶아서 짭니다. 많이 볶을수록 고소한 맛이 강하고 기름양이 많긴 한데, 고온에 노출되면 발암물질이 생성된다고 해서 큰 소동을 빚기도 했습니다. 들깨를 쪄서 짤 때 보다 볶아서 짜면 나오는 기름 양이 두 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소주는 “증류주”와 똑같은 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소주와 달리, 이제 소주는 동남아 열대 나라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값싸고 재빠르게 만들어 냅니다. 다 똑같은 순도 99% 이상의 에틸알코올(주정)에 물을 타고, 단지 서로 약간 다른 식품첨가물을 넣어 만든 술이 소주 자리를 차지하고 서민의 술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술을 하나의 문화로 봤을 때,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질은 낮아졌다고 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되는데, 상품으로 나오는 들기름은 압착식이 아니고 추출식을 쓴다고 합니다. 석유에서 추출한 강한 산성의 화학물질을 들깻가루에 부어 녹이고, 여기에 다시 중화제를 넣으면 첨가한 화학물질과 중화제가 결합해서 물이 되고, 이렇게 해서 생긴 물과 들깨에서 나온 기름을 분리하면 들기름 추출이 완성되는 겁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볶아서 짤 때의 20~40배 정도의 들기름이 나온다고 합니다. 콩기름도 이렇게 추출식으로 짜고, 기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로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을 만든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름만 된장, 간장, 고추장이지 제조 과정은 전통적으로 만들어 먹던 된장, 간장, 고추장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지난 8월 불거진 살충제 계란 파동도 원인은 똑같습니다. 값을 낮춰 이윤을 남기려다 생긴 일입니다. 달걀을 싸게 팔기 위해서는 좁디좁은 공간에 많은 수의 닭을 넣어 기르는 밀식사육을 해야 하고, 밀식사육으로 목숨만 겨우 붙어 있을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닭은 병에 취약하고, 병을 막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약품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 원인은 결국 시장, 가격경쟁력 때문입니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 중,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매양 이런 식입니다. 들기름, 콩기름의 들깨나 콩도 대개 수입산 입니다. 우리 농업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시장을 다 장악해서 농사지어 짠 들기름을 밀어내고, 건강하게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필수품이 오히려 사치품으로 취급되게 만듭니다. 우리 농산물로 만든 가공식품은 맛과 품질이 뛰어나고 건강에도 이롭지만 값이 비싸서 선뜻 사 먹기가 망설여지는 사치품으로 인식됩니다. 우리 농산물로 만든 가공식품은 다 똑같은 처지입니다. 저는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지 정말 의문입니다. 세계 11위 경제 대국이라는 나라가 먹고 사는 풍경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열심히 일하는 것인지. 우리는 먹는 것과 관련해서 너무나 너그러운 것은 아닐까요? 농업에 대한 사회의 특별한 배려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한 농민만을 위한 일이 결코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살 것이냐의 문제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농업은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봐야 마땅합니다.
농업 없이 우리 겨레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몇 해 전 유기농업 연수차 간 쿠바의 도시와 농촌을 두루 둘러보면서 저는 좀 놀랐습니다. 먹을 게 없어서 그토록 고생했다는 사람들이 도시와 농촌에 빈 땅이 많은데 농사를 안 짓고 놀려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사가 급해서 도저히 농사지을 수 없을 것 같은 산비탈까지 빼곡하게 옥수수를 심어 놓은 북한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딴 판이었습니다.
쿠바 사람들이 삼시 세끼 먹는 주식은 밀가루로 만든 빵이나 쌀로 지은 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날이 더워 밀 농사도 안 되고, 들만 있고 산이 없으니 물이 없어서 쌀농사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 기후나 지리 조건에서 그나마 농사지을 수 있는 곡식은 옥수수나 콩이니까 옥수수나 콩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런 들판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밀이고 쌀이고 제 땅에서 나지도 않는 곡식을 주식 삼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형편이 이와 같은데, 이 나라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속으로는 더욱 냉소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쿠바를 보던 눈 그대로 우리 사는 형편을 보니까 우리가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더군요.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곡물의 80% 정도가 수입농산물인데, 이 말은 곡물을 수입하지 않고는 우리 사회가 지탱될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누가 뭐라는 사람은 없지만 혼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습니다. 이때 저 개인적으로는 농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습니다. 뭐냐 하면, 농업을 지금 살고 있는 당대 사람들만의 문제로 놓고 다뤄서는 답이 안 나오는구나. 농업을 올바로 다루기 위해서는 후대에 살게 될, 대대손손 이어갈 자손들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구나. 이렇게 되면 상당히 철학적인 문제가 됩니다. 지금 당장의 경제적인 이해타산을 따지는 관점을 훌쩍 넘어서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농민들이 받는 쌀값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적당하냐?” 물었을 때, “우리 겨레가 대대손손 안정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적절하게 유지해야 할 논의 면적은 얼마나 되고, 숙련된 농사 기술을 갖고 그 논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농부는 최소 몇 명이나 되어야 하는지 검토해 봅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접근 방법이 달라지겠지요. 단순히 지난 5년 동안 쌀의 시장 가격, 예상 생산량, 수입량, 소비량을 토대로 쌀값을 결정하는 셈법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고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크고 긴 안목으로 성찰적인 사유를 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겠지요.
“농민들이 받는 쌀값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적당하냐?” 물었을 때, “우리 겨레가 대대손손 안정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적절하게 유지해야 할 논의 면적은 얼마나 되고, 숙련된 농사 기술을 갖고 그 논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농부는 최소 몇 명이나 되어야 하는지 검토해 봅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접근 방법이 달라지겠지요.
농촌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우리나라 지도를 놓고 찬찬히 살펴보면 모든 경계가 구불구불해서 직선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요즘 새로 생긴 도시 마을은 풍경이 좀 다르지만 그건 예외로 놓고 보면, 큰 산이나 너른 강을 따라서 이쪽과 저쪽을 나누고, 작은 개천이나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서 이 마을과 저 마을을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등지고 들판을 바라보면서 비교적 샘물을 구하기 쉬운 자리에 해가 잘 드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겠지요. 이른바 자연 마을, 촌락공동체입니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흔하디흔하게 솟아있는 크고 작은 산이 물을 머금었다가 조금씩 오래오래 내려주는 좋은 조건에 의지해서, 여름철 긴 장마와 겨울철 모질고 긴 추위를 건너는 데 가장 적합한 품목으로 벼가 선택받았을 테고, 만주와 한반도 일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콩이 쌀과 찰떡궁합을 이루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렸을 것입니다. 들이 넓고 따뜻한 남쪽 지역에서는 보리나 밀을 이모작으로 심어 먹을 수 있으니, 더 많은 수의 사람이 살 수 있었겠지요.
저는 제가 이렇게 형성된 자연 마을에 사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고령화 추세가 계속 된다면 리里 단위 마을은 짧으면 10년, 길어도 20년이면 소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90여 호가 사는 우리 마을에 40대 세대주가 딱 둘 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비교적 양호한 축에 든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50대 이하가 아예 없는 마을도 흔하다고 해요. 농촌의 인구문제는 어떻게 하면 더 잘 사는 마을을 만들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농촌의 소멸을 막거나 늦출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겠지요. 농촌 자연마을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다. 쓸쓸한 풍경입니다.
오랜 세월 햇빛과 바람과 땅과 물에 적합하게 형성된 식품체계가 아주 짧은 시간에 교란되고 우리는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식품체계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살고 있습니다. 이 길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는데도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내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 도시에 몰려 살게 되었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크게 보자면 넓게 면面으로 존재하던 나라가 점점 점點으로 좁아지고 있는 거지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농촌 마을 혹은 시골 없이 도시만 있는 한국은 괜찮을까? 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적절한 도시-시골 인구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너른 들, 아름다운 산과 강을 다 비워둔 채로 좁은 공간에 모여 복닥거리며 사는 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시장논리에 이끌려온 밥상,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할 때
한 사회가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땅과 바다에서 시작해 밥상에 이르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랜 세월 햇빛과 바람과 땅과 물에 적합하게 형성된 식품체계가 아주 짧은 시간에 교란되고 우리는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식품체계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살고 있습니다. 시장이 우리를 더 풍요로운 세계로 인도하리라는 눈먼 믿음에 기반을 두고 시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길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는데도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내달리고 있습니다. 브레이크를 밟고 방향을 바꿔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거대한 함성이 정권을 바꾸었듯이 “이게 음식이냐?”라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봅니다.
※필자 백승우: 강원도 화천의 농부. 농사짓는 일을 잠시 멈추고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며 살고 있다. 현장 활동가의 눈으로 유기농업을 바라보고 대안을 제시한 책 『유기농을 누가 망치는가?』(2013, 시금치)에 공저자로 참여하고 『까칠한 이장님의 귀농귀촌 특강!』(2015, 들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