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먹거리 기본조례’
살충제 계란 때문에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던 지난 8월 하순, 서울시의회 주관으로 ‘서울특별시 먹거리 기본조례’(이하 ‘기본조례’)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굳이 살충제 계란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먹거리의 20% 이상을 소비하는 서울시에서 의회가 주관하는 공청회라면 당연히 먹거리의 불안, 불신, 안전, 관리 등이 주요한 논제로 떠올랐을 법한데, 이 공청회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먹거리의 안전을 넘어서서 건강한 먹거리가 무엇이고, 지속 가능한 먹거리체계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공청회였다.
9월에 시의회를 통과한 ‘기본조례’는 ‘포괄적인 먹거리체계’, ‘공정하고 정의로운 먹거리체계’, ‘도농상생의 먹거리체계’, ‘생태적 먹거리체계’의 구축을 기본이념으로 하면서 먹거리와 관련한 다양한 의제들을 통합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또한, 서울시의 시민건강국, 평생교육국, 여성가족정책실, 복지본부 등 여러 부처에서 별개로 시행되던 먹거리 관련 정책을 함께 논의하는 ‘먹거리시민위원회’가 조례를 통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공공급식, 도시농업, 식품안전, 도농상생, 영양과 건강, 사회적경제, 자치, 교육홍보, 생태, 복지 등 먹거리 관련 의제들을 심의·자문하는 10개의 분과위원회와 기획조정위원회 등이 설치·운영되는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시 먹거리 기본조례’와 먹거리 마스터플랜
이번에 제정된 ‘기본조례’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민-관(서울시), 민-관(서울시)-관(자치구·산지 지자체)-민의 거버넌스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서울시는 2015년 초부터 다양하고 폭넓은 먹거리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 시민, 시민사회단체, 전문가의 제안사항에 귀를 기울여 왔다. 특히 ‘서울 식食 거버넌스’, ‘도농상생 거버넌스’ 등을 통해서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먹거리정책에 대한 건의사항을 수렴해 왔다. 또한, 서울의 지속가능한 먹거리체계는 농촌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으로 2016년 11월에 서울시는 전국의 광역자치단체들과 ‘도농상생 공공급식’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논의와 실천들과 함께 서울시는 ‘서울 먹거리 마스터플랜 TF’회의를 통해서 ‘상생’, ‘보장’, ‘건강’, ‘안전’, ‘협치’라는 핵심가치를 구현하는 세부추진계획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 6월 20일 서울시청에서 먹거리 마스터플랜 선포식을 했다.
선포식에서 서울시장, 시민사회단체대표, 농민대표, 어린이 등이 함께 낭독한 선언문은 “서울시민 모두는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누릴 권리가 있다. 서울시민 누구도 경제적 형편 때문에 굶거나 질이 낮은 먹거리를 먹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먹거리 기본권이 보장되는 ‘지속 가능한 서울 먹거리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5대 분야 26개의 세부 추진과제를 설정했다. 이 26개 과제 중에는 취약계층에 대한 먹거리 지원이나 먹거리 안전대책 등 그동안 서울시가 시행해 온 정책들도 있지만, 먹거리 보장을 강화하고 먹거리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 사회적 경제조직과의 협치를 강화하는 등 새로운 세부계획들도 담겨있다. 특히 관심을 갖고 살펴봐야 할 부분은 아동이나 노인 등 건강 취약계층과 경제적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급식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다. 서울시는 앞으로 2020년까지 먹거리 마스터플랜에 3,300억여 원을 조달할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약 1,300억 원을 공공급식사업에 투입할 예정이다. 서울시 먹거리 마스터플랜의 중심에 공공급식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거리 마스터플랜과 공공급식
지난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먹거리와 관련하여 ‘공공급식’이라는 새로운 키워드가 등장했다. 지금은 ‘친환경무상(학교)급식’이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정책적으로 안착하여 잘 진행되고 있지만, 공공급식은 세종특별자치시나 전북 완주군처럼 농촌이 배후에 있는 몇몇 지역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공급식이 대선과정에 공약 사항으로 등장한 것은 서울시의 역할이 컸다. 서울시가 먹거리의 공공성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공급식의 확대 및 조달체계의 변화를 모색했던 이유는 시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먹거리 현실이 그만큼 절박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첫째,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1,000만 서울시민 중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먹거리 결핍을 경험한 시민이 50만 명을 넘고, 쌀은 있으나 거동이 불편해서 끼니를 거르는 독거노인들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수혜자들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끼니를 해결토록 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공공급식이라는 정책적 개입의 모색으로 연결되었다.
둘째, 자라나는 아이들의 급식과 관련해서 초중학교의 경우에는 친환경무상급식을 통해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어린이집의 급식단가가 1,745원으로 정해진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질 낮은 급식의 책임을 어린이집 원장에게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고민이 있었다. 지역아동센터의 경우에는 보조금의 지원 덕에 좀 나은 급식이 제공되기는 하지만, 센터별 식수인원의 규모가 작아서 식재료 구매단가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고민을 풀기 위한 해법을 공공급식 식재료 조달체계의 확립에서 찾았다.
먹거리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건강한 식재료를 조달하는 시스템에 대한 서울시의 고민은 공공급식시설에 대한 식재료 공공조달 시스템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직거래 방식의 유통망을 촉진하고, 건강한 식재료의 지속가능한 생산 등을 촉진하기 위해서 공공조달의 잠재력을 활용함으로써 서울시민의 먹거리 기본권도 보장하자는 것이 ‘도농상생 공공급식’으로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지직거래 이상의 의미, 도농상생 공공급식
지난 6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먹거리 마스터플랜 선포식에서 “상생, 농민과 함께 먹거리주권을 지키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서울시의 먹거리정책에서 ‘도농상생’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서울시는 공공급식을 실현하기 위한 법적 기반인 조례의 명칭을 “서울특별시 도농상생 공공급식 지원에 관한 조례”로 했고, ‘기본조례’에서도 “미래의 식량보장을 위해 중소 가족농을 배려하는 도농상생의 먹거리체계”를 만드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도농상생 공공급식’은 산지 직거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 서울시의 학교급식은 친환경유통센터를 통하여 식재료가 공급되고 있지만, 산지의 생산자가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벤더라고 하는 중간유통업자나 대규모 단작에 기반을 둔 조직들이 주로 참여한다. 공공급식과 관련해서 서울시에서 시범사업으로 추진하는 방식은 자치구의 공공급식시설(어린이집)이 사용하는 식자재를 산지의 공적 조직(재단법인, 학교급식센터 등)으로부터 직접 조달받는 방식인데, 이는 산지의 중소 가족농이 적극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서울시가 자치구와 함께 산지를 선정할 때 식재료의 안전성(친환경 및 무제초제 여부 등), 조달가능품목의 다양성 등과 함께 중소농가의 조직화 및 참여 정도를 선정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봄부터 강동구와 전북 완주군이 1:1 매칭을 기본으로 하여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는 추가 시범사업을 5개 단위(금천구 – 전남 나주시, 성북구 – 전남 담양군, 강북구 – 충남 부여군, 노원구 – 충남 홍성군, 도봉구 – 강원 원주시)에서 준비하고 있다. 1 : 1 매칭을 기본으로 하는 조달체계는 특정 산지로부터 특정 농산물을 받아서 모으는 형태가 아니라, 특정 지자체의 중소 가족농들이 생산한 다양한 품목의 농산물을 직접 공급받는 형태이다.
한국 농촌에서 1ha 미만의 농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이르고, 1년 농산물 판매금액이 500만 원 미만인 농가가 전체 농가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 농가 상당수는 마땅한 판로가 없어 제값 받기가 어려웠지만, 최근에는 로컬푸드 운동의 확산을 계기로 중소 가족농의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서울시가 생산자조직을 기반으로 촘촘한 관계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이처럼 위기에 처한 농업·농촌·농민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다.
서울시가 당장의 편의성과 효율성은 조금 뒷전으로 미루고 산지의 생산자조직을 기반으로 한 촘촘한 형태의 관계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공공급식을 매개로 현재 위기에 처한 농민·농업·농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의 농촌 현실을 보면 1ha 미만의 농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이르고, 1년 농산물 판매금액이 500만 원 미만인 농가가 전체 농가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 농가 상당수는 마땅한 판로가 없어 제값 받기가 어려웠지만, 최근에는 로컬푸드 운동의 확산을 계기로 여러 산지에서 로컬푸드 직매장이나 학교급식센터 등에 농산물을 공급함으로써 중소 가족농의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다만 산지의 특성상 수요확대의 절벽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서울시의 공공급식이라는 새로운 수요처를 통해 농민에게 힘을 주고, 학교급식으로 힘을 얻었던 친환경생산농가에게 공공급식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주고자 하는 것이 서울시가 먹거리문제를 해결하는 상생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산지 지자체의 농정도 ‘농민 중심의 농정’, ‘지역 중심의 농정’으로 변화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실제로 공공급식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산지 지자체들은 지역 중소농가의 조직화와 지역 먹거리체계에 대한 고민을 앞서서 해 온 지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산지의 노력이 있었기에 서울시의 구상이 현실로 연결됐다는 점에서도 ‘도농상생’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도농상생, 함께 하는 길
서울시의 공공급식에서 산지의 생산자조직과 자치구의 공공급식시설을 연결하는 역할은 산지의 지자체와 자치구 공공급식센터가 담당한다. 자치구 공공급식센터는 식재료의 물류·유통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산지에서 조달받은 식재료의 검수, 공공급식 및 기타 도농상생 실천을 위한 각종 교육과 홍보사업을 수행한다. 자치구의 위탁사업으로 진행되는 공공급식센터에 먹거리 관련 사업(물류, 배송, 조리, 교육 등)을 진행해 온 서울의 사회적 경제조직들이 참여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공공급식이 시범사업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치구 공공급식센터가 아직은 안착단계에 접어들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자치구 공공급식센터는 먹거리 마스터플랜을 통해서 밝힌 세부실천과제의 실행에 있어서 중요한 플랫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별개로 운영되는 학교급식과 공공급식이 통합된다면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치구 공공급식센터의 역할이 현재 서울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먹거리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사업과 결합하면 서울시민들은 더욱 용이하게 먹거리 기본권을 확보하게 되고, 자치구 공공급식센터가 지역공동체 주도 커뮤니티키친(공동체 부엌)사업으로 연결되어 먹거리 취약계층을 위한 먹거리 나눔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편 서울시의 도농상생 먹거리정책이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추진되기 위해서는 서울과 산지 모두가 농촌의 중소 가족농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취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산지 공공급식 생산자의 조직화에서 염두에 두고 실천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상생의 가치가 반영되어 공공급식이 중소 가족농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산지의 농가들은 지속가능한 먹거리, 건강한 먹거리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서울시도 먹거리정책에서 빈 공간, 놓친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정책은 개별조직들이 해 왔던 사업을 더 쉽게 실현해 낼 수 있다는 점에 강점이 있지만, 정책의 획일적 추진은 기존에 시민사회영역에서 진행해 온 의미 있는 운동들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정책시행 과정에서 놓친 부분들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살피고 보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본조례’에 의거하여 설치될 ‘먹거리 시민위원회’의 역할 또한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서울시의 먹거리 마스터플랜이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는 협치와 상생이라는 희망의 길로 연결되길 바란다.
※필자 윤병선: 건국대학교 경영경제학부 교수. 세계 농식품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농식품운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서울시 먹거리 마스터플랜 TF위원, 로컬푸드전문가협의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농업과 먹거리의 정치경제학』(2015, 울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