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가장 획기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학생들의 교복과 두발 자율화가 빠질 수 없다. 그 시절을 살지 않은 이들에게는 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때 그 시절을 산 이들에게 이 사건은 그야말로 가히 혁명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그 사건은 단순히 학생들을 획일적인 문화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교복 대신 입어야 하는 옷들로 인해 의류 소비가 엄청나게 늘었고 결국 가계부담으로 이어져 10여 년 만에 많은 학교가 교복을 부활시켰다.
그 시절엔 학생들이 입고 오는 옷 하나하나, 신고 오는 신발 하나하나가 무슨 상표를 가지고 있는지가 화제가 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유행을 하면 거의 전국의 학생들이 그 상표의 제품을 사도록 만들었다. 나이키 운동화, 죠다쉬 청바지에 얽힌 이야깃거리 하나 없이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메이커문화였다. 그 메이커문화는 우리가 소비의 대부분을 재래시장이 아닌 백화점으로 향하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대기업을 살찌웠다.
메이커는 가고 명품이 오다
2000년대, 우리는 이제 메이커문화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명품문화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의 일 년 벌이를 간단히 옷 한 벌, 가방 하나에 쓰고도 끄떡없는데 어떤 이들은 하루를 나는 것 자체가 살얼음을 밟는 것 같은 사회. 한쪽에서는 한 끼에 몇십만 원을 넘어서는 음식을 우아하게 먹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급식비가 없어 물로 대신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린이들이 존재하는 사회. 한쪽에서는 수십억 하는 집에 살면서 그에 따른 세금이 과도하다고 불평을 앞세워 세금을 내리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제 몸 하나 누일 곳 없어 길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사회, 그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다. 그 속에서 가진 자들은 물건이 없어서 못 산다는 것이 소위 말하는 명품이다. 이제 그 명품 대열에 또 하나의 명품이 등장하였으니 바로 유기농이다.
농산물에서의 ‘명품’은 본래 지방 특산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2002년 초 설 선물세트에 친환경농산물을 ‘명품세트’라고 이름 붙여 팔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친환경농산물이 바로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지방정부에서 농축산물의 “명품 브랜드화”라는 정책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농산물에서 명품이란 단어를 쓴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의 명품은 그 지방의 특산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2002년 초 설 선물세트에 친환경농산물을 ‘명품세트’라고 이름 붙여 팔기시작하면서 이제 친환경농산물이 바로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는 많은 지방정부에서 친환경적 재배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농축산물의 “명품 브랜드화”라는 정책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유기농산물의 명품화, 철학이 사라지다
친환경농산물 내지는 유기농산물을 명품 브랜드화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부가 본격적으로 친환경농업을 정책으로 받아들였던 때로 돌아가자. 물론 그 이전에도 주위의 온갖 손가락질을 무시하고 꿋꿋이 신념을 지켜온 유기농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수고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받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4년 6월 정부가 「WTO체제 출범에 대응한 농어촌발전대책 및 농정개혁추진방안」 및 「실천계획」과 「WTO체제 출범에 대응한 농림어업부문 기본대책」을 발표하면서 이 속에 ‘중소농지원대책’을 사업으로 포함하였고 더 구체적으로는 「농림수산사업통합실시요령」에 ‘중소농고품질농산물생산 지원사업’을 지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친환경농업이 정부 농업정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소농고품질농산물 생산지원사업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그 당시 농업은 전업농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전업농 육성은 대규모 기업농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당시 농가의 57.9%를 차지하는 1ha 미만의 소규모농가는 그 사업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부는 그 소규모 농가에게 유기·자연·토종농업에 의한 농산물을 생산하도록 권장하면서 이를 고품질농산물로 이름 짓고 일반농산물과 차별화하여 소득을 증대시키도록 한다는 정책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소농고품질사업이었다. 여기에는 상수도보호구역과 중산간지역까지 포함하였으며 사업의 주된 내용은 유기·자연농업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수질과 토양을 개선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처음부터 친환경농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득증대가 목표였다. 즉, 정부가 처음 친환경농업정책을 세울 때부터 유기농은 수익사업이었다. 그 후 유기농업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돈을 더 많이 벌고자 하는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하나의 사업으로 변질되었다.
수십 년 유기농업을 해온 농민들은 이 현상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옛날 우리가 하던 농업에는 우리의 신념과 철학이 있었다. 오늘날의 유기농은 철학은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 그렇다. 이제 유기농도 하나의 사업이고 사업은 돈을 벌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그리고 이 사업은 명품문화에 편승하여 “명품 브랜드화 사업”을 낳았다. 그래서 이제 유기농은 명품이 되었다. 명품이 된 유기농은 돈 버는 사업, 그것도 돈을 많이 벌어주는 사업이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업들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과거 직거래를 통해서 살 수 있었던 유기농은 돈만 있으면 이제 시장 어디에서도 살 수 있는 상품이 되었고 그 상품은 명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농민에게는 돈벌이 사업이고 소비자에게는 상품이 되어버린 유기농은 그 원래의 의미 내지는 철학을 잃어버렸다. 유기농의 원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존재의 다양한 관계가 ‘유기’
유기농의 “유기organic”는 백과사전에 따르면 생물에 관계되는 것을 의미하고, 광물체로부터 얻어지는 무기화합물에 대하여 생물체의 구성성분을 이루는 화합물, 또는 생물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화합물로 분류되었다. 이와 같은 분류는 생명현상에 관련되어 만들어지는 화합물은 모두 탄소화합물이므로, 무기물로부터는 만들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후 과학의 발달로 광물계로부터도 유기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옴으로써 현재 유·무기의 구별은 그다지 중요한 개념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 “유기”라는 단어가 수식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대체로 “유기적”이라는 표현으로 쓰이는 형용사적 의미에서 “유기”는 관계를 의미한다. 즉 다양성을 가진 개체들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 현상들을 설명할 때 우리는 흔히 “유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셈이다.
수십 년 유기농업을 해온 농민들은 이 현상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옛날 우리가 하던 농업에는 우리의 신념과 철학이 있었다. 오늘날의 유기농은 철학은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 그렇다. 이제 유기농도 하나의 사업이고 사업은 돈을 벌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러한 사전적인 의미들을 종합해 보건대 “유기농”은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유기농에서의 관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기농에서의 관계는 농업을 영위하는 주체인 인간과 농업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요소들 – 흙, 공기, 물, 햇빛, 바람 -그리고 농업환경을 둘러싼 다양한 생태계 속에서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이 자연요소들은 단순한 무생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유기물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농은 인간과 생태가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유기농은 어떠해야 하는가. 요즘 정부에서나 농업계, 소비자 등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먹을거리의 안전성 문제이다. 먹을거리의 안전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산지에서 밥상까지Farm to Table”이다. 이는 산지에서 밥상까지 전 과정을 관리함으로써 소비자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정부와 농업계, 소비자 등의 의지를 표현하는 말로 전 세계에서 통용하는 말이다.
유기농은 산지에서부터 밥상에 오르기까지 그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 간의 사회적 관계가 유기적이어야 한다. 즉, 생산, 유통, 소비의 전 과정 속에서 각각의 과정을 담당하는 사람 사이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한 과정에서 다른 과정으로 넘어갈 때 서로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유기농 바람은 불행히도 이러한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다. 단지 상품으로 전락한 유기농산물 내지 유기식품은 각각의 담당자에게 얼마만큼의 이윤을 확보해 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 경제논리에 의해 각 과정 속에서의 관계뿐만 아니라 과정 간의 관계까지 무시되고 있다.
관계회복을 위한 다양한 방식
파괴된 관계의 회복을 위한 대안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먼저 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지역산업Local Business”의 개념을 가지고 지역중심의 관계성 회복을 추구하고 있다. 다양한 운동들이 지역농장을 우리의 농장으로 인식하고 그 농장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가장 유기적인 것이고, 그래야만 유기농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하고 있다. 유럽은 영국의 소비자운동가 팀 랭Tim Lang이 1994년부터 “푸드마일food mil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이래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식품의 안전성도 높으면서 수송에 따른 환경오염을 경감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관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이렇게 유기농이라는 개념 속에는 지역이라는 개념이 그 바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가 보자. 우리나라는 행정수도인 서울에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다른 공산품의 예를 들 것도 없이 농산물 시장의 경우에도 전국의 모든 농산물이 서울의 도매시장으로 집결하고 여기서 형성된 가격을 통해 다시 전국으로 재분배되고 있다. 이는 유기농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소비자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런 유통구조는 정부 차원의 관리라는 측면, 농산물의 시장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편리함을 줄지 모르나 관계의 형성이라는 유기농의 근본적인 이념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유기농에서 지역의 의미가 남다른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지역먹을거리운동은 대량생산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대량생산이 필요 없으니 대량생산을 위한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사용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과거 공동체적 농업이 살아난다. 둘째로 지역먹을거리운동은 지역 내에서의 소비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던 얼굴 맞댄 관계가 살아난다. 얼굴 맞댄 이들은 서로의 먹을거리에 과도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못한다. 거기다 이동거리도 짧으니 화석연료의 사용도 줄고 자연히 비용도 줄어든다. 그래서 비로소 제값 받는 농산물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원래 유기농업은 지역 속에서 문화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농업을 살릴 수 있는 본래의 가치를 찾아간다. 다양한 작물 생산을 통해 순환이 가능하고 관계가 살아있는 농업의 실현이 바로 지역먹을거리운동 속에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유기농
다시 우리 농업으로 돌아가 보자. 조상들의 농사는 사람과 사람이 나누고, 사람과 자연이 나누는 농사였다. 그들은 논이나 밭에 남겨진 나락이나 채소를 지금처럼 싸그리 걷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겨우내 먹을 것을 찾아 헤맬지도 모르는 많은 산짐승의 몫으로 남겨 주었다. 그리고 산짐승들은 그 대가로 그 논이나 밭에 똥이나 오줌을 싸고 가고 그건 겨우내 땅에서 얼다가 녹다가 볏단이나 잎과 함께 자연스럽게 퇴비로 변해 갔다. 이듬해 봄이면 그것은 이미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는 그래서 또 그렇게 건강하게 자랐다. 뭐 하나 버릴 것 없었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유기농은 너와 나라는 개체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니 유기농업을 상업적 논리에서 나오는 그런 명품으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유기농은 생명존중 사상을 실천하는 철학이다. 생명존중은 단지 인간의 생명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허수아비가 아무리 무서워도 날아오는 새들을 다 막아주지는 못한다. 사람 손이 아무리 부지런해도 달려드는 벌레들을 다 잡아주지는 못한다. 매일같이 논이며 밭이며 돌아다니며 보이는 대로 풀을 뽑아도 우연히 날아들어 그 살기 좋은 땅에 뿌리내린 그 많은 씨앗들을 고스란히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이 유기농이다.
유기농은 이렇듯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정을 나누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유기농은 너와 나라는 개체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니 유기농업을 상업적 논리에서 나오는 그런 명품으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유기농은 생명존중 사상을 실천하는 철학이다. 생명존중은 단지 인간의 생명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생물다양성(biodiversity), 생물학적 활성(biological activity), 생물학적 순환(biological cycle)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농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일 수도 있겠다. 특히 모든 것을 상품가치로 평가하고, 초등학생에게까지 돈 버는 법을 가르치려고 안달이 난 이 사회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그렇겠다. 하지만 유기농은 더불어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아니, 유기농 그 자체가 바로 더불어 사는 것이다. 더 이상 유기농을 돈으로 환산하는 명품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유기농은 살아 숨쉬는 자연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필자 김은진: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88년부터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국내 농업문제를 꾸준히 연구하고 고민했으며, 현재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다. 환경농업단체연합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에서 자문·정책위원으로 일하며 농촌진흥청 유전자변형농산물 전문가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GMO 유전자조작 밥상을 치워라』(2009, 도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