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것”

–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대표 인터뷰

상주시 외서면 봉강공동체 작업장 앞에 선 김정열. 이곳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다. 여성농민들이 꾸러미사업 회의를 하고 가끔씩 영화도 보고 수다를 떠는,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공동체 공간이다.
상주시 외서면 봉강공동체 작업장 앞에 선 김정열. 이곳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다. 여성농민들이 꾸러미사업 회의를 하고 가끔씩 영화도 보고 수다를 떠는,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공동체 공간이다.

‘미투(#Me Too)’의 외침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성농민의 처지가 도시여성보다 낫지는 않을 텐데,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여성농민으로, 농촌 세 아이의 엄마로, 여성농민운동가로, 30년 가까이 시골 마을을 지킨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의 김정열(52) 씨와 ‘농촌의 미투’ 이야기를 나눈다.
  김 씨는 1990년 상주여성농민회 모태인 한마음회 총무를 시작으로, 한눈팔지 않고 여성농민운동 현장의 일꾼 역할을 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사무총장도 지냈고, 지난해엔 세계 최대 농민단체인 ‘비아캄페시나(농민의 길)’의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대표로 선출됐다.

– 미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여성농민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세요.
= 미투라는 걸 보면서, 이런 게 진정한 혁명이란 생각이 들어요. 여성에게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서열이나 나이 같은 걸 앞세워 사람이 사람을 힘으로 누를 수 없는 세상이 온다는 거예요. 너무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세상은 계속 좋은 쪽으로 변할 것 같아요.

봉강공동체의 최고참인 문달님(79) 할머니가 즐거운 표정으로 꾸러미를 포장하고 있다. 1990년 24살의 김정열은 봉강리와 처음 인연을 맺고, 문 할머니 댁에 머물면서 여성농민의 삶을 시작했다.
봉강공동체의 최고참인 문달님(79) 할머니가 즐거운 표정으로 꾸러미를 포장하고 있다. 1990년 24살의 김정열은 봉강리와 처음 인연을 맺고, 문 할머니 댁에 머물면서 여성농민의 삶을 시작했다.

– 농촌은 여전히 여성들에 대해 봉건적인 요소가 더 많이 남아 있잖아요. 도시보다 미투 목소리가 더 클 수 있을 텐데, 오히려 더 조용해요.
= 허허. 우리 세대는 그런 일이 있어도 침묵했고, 세상에 드러낼 용기도 없었잖아요.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있어도 문제로 인식조차 못 했고요. 게다가, 내 주위엔 나보다 나이 적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다들 연세 드신 분들이라 마을에서는 미투 얘기를 나누지도 못해요. 스물네 살 때 농촌으로 들어왔는데, 만약에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그냥 넘겼을 것 같아요. 시대가 그랬으니까요.

가장 불평등한 공간에서 사는 농촌여성들

– 지난해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여성농민의 페미니즘은 일반 페미니즘과 다르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지요.
= 사상이나 운동이란 게 책의 이론처럼 딱 정해져 있지 않잖아요. 각자 삶의 위치에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사상이고 운동이지요. 그렇게 보면 페미니즘이라는 게 여성을 자유롭게 하고 여성을 구속하는 틀을 깨는 것이겠죠. 농촌과 도시의 가부장이 다르잖아요. 상대적으로 도시 여성들은 비교적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하는 데 자유롭지만, 농촌 여성들은 여전히 가부장적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가장 불평등한 공간에서 살고 있어요. 농촌 여성과 도시 여성의 삶이 다르니까, 페미니즘도 같을 수는 없는 거지요.

– 예를 들어 쉽게 말씀해주세요.
= 시골에서 1년에 한 차례 여는 마을 동회 자리에 가보세요. 가구당 1명이 참석하는데 거의 남성이에요. 여성은 발언할 권리가 없고, 발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스스로 발언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관습적으로 그렇게 해왔어요. 면 단위 시골로 내려가면 마을 유지有志의 거의 100%가 남성이에요. 여성이 시골 마을에서 지도력을 갖는 것은 아주 예외적이지요. 마을 이장 중에 여성이 얼마나 될까요. 열에 하나도 안될 거예요.

꾸러미 박스 포장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식사를 하는 봉강 공동체 여성농민들. 전체 회원 13명중 11명이 모였다.
꾸러미 박스 포장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식사를 하는 봉강 공동체 여성농민들. 전체 회원 13명중 11명이 모였다.

 

여성농민의 자존감
내 이름, 내 권리를 찾아야

– 말씀 나눌수록 답답한 느낌이 드는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 여성농민이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져야 해요. 나 자신이 굉장히 소중하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특히 농업에서 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게 출발점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서로 많이 나눠야해요. 여성농민들이 내 이름, 내 권리를 찾아야 해요.

– 언니네텃밭 사업이 그런 점에서 큰일을 한 것 같네요.
= 그렇죠. 2009년에 언니네텃밭을 시작하면서 봉강 공동체를 만들었어요. 여성농민 스스로 생산자의 권리를 찾자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죠. 여성농민이 ‘내 계획과 의지대로 생산하고, 내가 판매하고, 내가 그 권리를 갖자’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농촌에서 여성들이 많은 일을 하는데도 그게 잘 안 드러나요. 농사는 남자들이 다 짓고 여자는 허드렛일 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농산물 판매하는 일을 남자가 하고, 남편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 언니네텃밭을 잠깐 소개해주세요.
= 여성농민들이 공동체를 꾸리고 자투리 텃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매주 꾸러미로 포장해 도시 식탁으로 보내는 사업이에요. 이제 전국의 공동체가 15곳으로 늘어났고, 봉강공동체에서는 13명 여성이 월평균 60~70만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어요. 100만 원 이상 버는 분도 있고요.

– 봉강 공동체에서 언니네텃밭 사업을 한 뒤로, 어떤 게 달라지던가요?
= 꼬박꼬박 내 명의 통장으로 수입이 생기잖아요. 시골에서 월 60~70만 원 현금수입이면 적은 돈이 아니에요. 남편들이 처음엔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아내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부부관계에서 경제적 권한이 있는지 없는지가 참 중요하다는 걸 모두 느끼게 됐어요. 내 통장 갖게 되니까 자신감이 생기잖아요. 내 나름대로 뭔가를 계획할 수 있고요. 남편 돈 타서 쓰는 것하고, 나 스스로 계획하는 것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4월 17일~21일, 서울 도봉산숲속마을에서 비아캄페시나의 25개국 대표 30여 명이 모여 국제조정위원 회의를 열었다.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잘 반영한다는 비아캄페시나. 이번 회의에서도 남녀 참석자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다. ⓒ김정열
4월 17일~21일, 서울 도봉산숲속마을에서 비아캄페시나의 25개국 대표 30여 명이 모여 국제조정위원 회의를 열었다.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잘 반영한다는 비아캄페시나. 이번 회의에서도 남녀 참석자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다. ⓒ김정열

– 여성농민, 여성농민 소리가 참 듣기 좋은데요.
= 다른 농민단체에서는 여성농민이란 말조차 안 써요. 저희 전여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만 여성농민을 외치고 있죠. 농촌진흥청에서는 여성농민들의 전국조직 이름을 생활개선회라 부르고, 농협에서는 여성농업인 육성모임을 농가주부모임이라고 해요. 그거는 아니잖아요. 농업에서 여성농민들이 충분한 역할을 하는데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바꿔야지요.

김 씨는 28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봉강리로 들어왔다. 사람이 마을을 닮아갔을까, 마을이 사람을 바꿔놓았을까? 봉강리 마을엔 늘 온기가 퍼져 있고, 김 씨는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편안하게 사람을 맞이한다. 봉강리와 김 씨가 전생에 쌍둥이였나,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봉강리가 저를 품어 안았지요. 우리 마을 사람들이 돈은 없어도 자부심은 대단해요.” 1988년 서울 여의도 농민시위 때는 봉강리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맨 앞에 섰고, 상주농민회가 봉강리에서 시작됐다. 상주에서 유기농을 처음 시작한 곳도 봉강리다. “다들 비슷하게 가난하니까 서로 도우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돈 더 벌자고 비닐하우스 세우는 집도 없어요.”

– 농촌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농민의 길을 걷게 됐나요.
= 1990년 대학 졸업하고 24살 때 농민운동 하겠다고 봉강리로 들어왔어요. 그때 상주농민회가 만들어지면서 초대간사가 되었죠. 학생운동 하다 우리 마을로 도피 중이던 남편을 만나 1년 뒤에 결혼했고요. 아마도 전생에 농부였던 모양이에요. 대학 1학년 때 농촌활동 가서 처음 호미질했는데 일을 너무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거든요. 농민으로, 농촌에서 산다는 게 정말 좋아요.

그는 “농사일이 천성에 맞고, 농촌 사람들 정서가 너무 좋다”고 했다. 즐겁게 농사를 지어서 그런가, “농사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래도, 그는 천생 농사꾼이고 여성농민이다. “봉강리에서 아이 셋을 낳아 대학 보냈어요. 큰딸이 7살부터 소아 당뇨를 앓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집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매일 주사를 놔주고 곁에서 돌봐야 했거든요. 이제 28살 고등학교 선생님이 됐네요. 그 아이가 대학 간 뒤로 여성농민운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자가와 임대를 합쳐 3~4㏊ 농사도 열심히 지었어요.”

– 여성농민으로 농사짓고, 아이 셋 대학 보내고, 농민운동 끌어가고, 흡사 ‘농촌 알파걸’ 같은 느낌이 드네요.
= 남편을 잘 만났어요(웃음). 그래도,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지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것 말고는 힘든 거 잘 모르겠어요. 제가 복이 많은 거죠. 저는 농민운동 하면서 두 가지 신조가 있어요. 하나는 지역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거예요. 비아캄페시나라는 국제농민단체 활동을 하지만, 상주시 여성농민회와 경북 여성농민회 일도 여전히 맡고 있어요. 지역 사람들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지역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농사를 놓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모름지기 농민운동가라면, 농사로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 비아캄페시나에서도 여성농민의 참여가 활발하다면서요.
= 회의장에 가보면 느껴요. 여성농민들 목소리가 커요. 예를 들면, 유엔인권이사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UNHRC에서 ‘농민과 농촌지역민 권리선언(농민권리선언)’ 초안을 만들고 있는데, 4조가 ‘여성농민과 여성지역민의 권리’예요. 올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초안을 검토하는 유엔인권이사회 실무그룹이 열렸어요. 그 자리에서도 다른 초안 부분은 이견이 갈렸으나, 4조에 대해서는 만장일치로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어요. 올 6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선언문을 채택하고 올 9월 총회에 상정할 것 같아요.

비아캄페시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농업개방에 맞서 1993년 발족한 세계 최대 농민단체로, 73개국 164여 개 단체가 가입해 있다. 비아캄페시나가 채택을 주도하는 농민권리선언문(초안) 4조는 “국가는 여성농민과 여성농촌지역민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근절하도록 모든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야 하며, 이를 통해 남녀평등의 원칙에 따라 여성농민과 여성농촌지역민이 근본적인 자유를 완전하고 동등하게 누리고, 농촌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발전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참여하여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여성농민에 대한 모든 단계의 발전계획 수립 및 실행 참여, 보건과 사회보장 및 연수교육 혜택 보장, 동등한 경제적 기회를 뒷받침하는 자조 단체와 협동조합 조직, 농업금융과 판매시설 및 기술에 접근할 동등한 권리 보장, 토지와 천연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사용·관리 보장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그는 여성농민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세대가 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안타까운 바람을 털어놓았다.    
  “우리만 해도 구세대잖아요. 젊은이들이 들어오면 서로 싸우든지 충돌하면서 변화를 가져올 텐데, 계속 고이고 또 고이고만 있어요.”

두려워 말고 마음을 다하면, 행복해진다

– 젊은 여성농민이나 농촌에 들어오려는 예비 여성농민에게 어떤 말을 해주시나요.
= 주위에 귀농한 여성농민들이 많아요. 두려움이 큰 것 같아요.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줘요. 내가 농촌 처음 들어올 때가 4월이었는데, 쑥이 뭔지도 모르고 쑥을 뜯었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잖아요. 경제적인 걱정도 많던데, 남편도 나도 봉강리에 아무 기반 없고 돈 한 푼 없이 들어왔어요.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고요. 아이들 셋도 대학 보냈고요.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다, 그러면서 농촌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해줘요.

– 어떨 때가 행복했나요.
= 저는 촌에 사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아요. 농사짓는 것, 농촌에서 일하는 것도 좋아요. 직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보다, 밭에서 일하는 게 좋아요. 내 손으로 내가 먹을 걸 가꾼다는 것, 내가 씨앗 뿌리고 내 손으로 수확한다는 것, 사시사철 자연이 변한다는 것이 너무 좋아요.

“살아보니 살아지더라.” 28년 농촌살이에서 배어 나오는 편안한 울림의 소리다. “귀농한 젊은 여성이 우리 봉강공동체 총무를 맡고 있어요. 월 60만 원 월급 줘요. 이런 일자리를 더 많은 사람한테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젊은 여성들이 더 많이 농촌으로 들어올 수 있잖아요. 총무 일 하면서 자기 농사를 지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세월을 이어가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아가고 싶어요.”

30※필자 김현대: <한겨레21> 선임기자. 1988년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겨레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발로 뛰며, 농촌과 협동조합 현장, 정책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 한다. 한국농업기자포럼, 사회적경제언론인포럼을 창립했으며, 『협동조합 참 좋다』(2012,푸른지식)를 후배 기자들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