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나는 바다 건너 제주로 이주했다. ‘육지와는 이제 끝’이라 생각했지만 제주는 여러 이유로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게 해주었다. 제주를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섬으로 유배 간다’는 말이 곧 무색해졌다.
7년간 일했던 무릉외갓집은 내게 농촌과 농부, 농산물을 정기적으로 받는 도시민을 만나게 해주었고 사업이 꾸러미, 체험, 직거래 등으로 다양해지자 방문객도 많아졌다. 대산과의 첫 인연도 이렇게 찾아왔다. 2015년 정기석 마을연구소장이 연구보고서 작성차 제주를 방문해 내게 ‘대산농촌재단의 유럽농업연수’를 추천했다.
1년을 기다려 연수 지원서를 썼다. “40대 늦은 나이에 생업으로서 농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농업·농촌·농민으로부터 더 배우고 싶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지원서지만 내겐 전환이 필요했다. 연수자로 확정되었을 때 나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2016년 5월 유럽연수를 다녀오며 타국의 농업정책과 농부의 삶, 농촌경관과 국민 삶의 조화에 대해 배우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연수도 연수였지만 함께했던 연수팀이 진국이었다. 전국 농업·농촌의 진주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한 세트로 묶어놓을 수 있는지, 이것은 재단의 큰 그림이 틀림없었다.
40대 초반, 제주 농촌에서 길을 잃은 나에게 이들은 북두칠성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전국 농업·농촌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배이자 동료들이 있다는 점이 든든했다.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었구나’로 시작된 동질감은 ‘내가 힘들 때 도움 받을 수 있는 멘토들이 되겠구나’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2016년 연수 이후 매년 공식모임을 연 2회 이상 가지며 교감을 이어가고 있다.
제주, 농업, 또 다른 도전
연수 후 그만두려던 마을 기업일은 그 후 2년 더 지속되었다. 동료들이 만류하기도 했지만 농사경험도 토지와 자본도 없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는 제주에서 결혼이주여성들과 함께 그들이 고향에서 먹던 채소를 가꿔서 판매한다면 지역에도 좋고 이주민들의 정착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작년 하반기부터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제주형 사회혁신 아이디어로 선정되었다. 이 아이디어가 과연 지역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혹은 결혼이주여성에 도움이 될지를 검증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내게는 더 큰 숙제가 있었다. ‘내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자연스레 연수동기들 단톡방에 고민을 털어놓았고 조언과 지지를 많이 받았다.
지난 봄에는 정상진 충남친환경농업인연합회 대표의 도움으로 홍성의 다양한 농업·농촌 모델을 둘러보았다. 홍성을 방문한다고 하니 정 대표가 지역의 다양한 농업모델을 경험시켜준다고 한 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짜놓았다. 눈이 확 뜨이는 것 같았다. 7년간 마을에서 일하며 갈증 났던 부분이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가 뚜렷해졌다. 농촌 구성원 간의 연결을 통해 상생의 기회를 만들고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방향과 고민을 정하려면 촉진자와 푸근한 고향선배가 필요했다.
송용석 두월노을마을 운영위원장과 유은미 함해국 대표는 청년들이 밑천 없이 농사짓는 게 더 어려워질 거라 입을 모았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이제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고민이라는 한 청년농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농업기반이 없어진 나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는 형태의 농업모델이었고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법인을 만들 수 있었다.
공심채空心菜, 함께 마음을 모으면 빛이 난다
나는 창업 기업명을 내가 농사짓는 작물 이름과 동일하지만 속뜻은 다른 이름의 공심채共心彩로 지었다. ‘농사경험도 부족한데 초기에 농사일로 수익을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공심채 법인의 사업영역이 아열대채소를 재배하는 생산 분야, 결혼이주여성들과 취약계층 농산물을 판매하고 부가가치를 높이는 유통·가공 분야, 그리고 사람과 농산물, 지역 이야기를 담아낼 콘텐츠분야 등 3가지로 다양해졌다.
지난 3월 우리 연수단의 제주 워크숍에서 한태영 진안마을 실장은 내가 가지고 있는 홍보와 콘텐츠분야의 역량을 공심채 사업과 직접 연결해볼 것을 제안했고, 공심채 법인에서 사용할 중고 트럭을 구해주기도 했다.
윤용병 ㈔한생명 운영위원장, 박현주 파머스힐 대표, 박은주 상주공동체 총무, 강기원 갈계교회 목사, 곽상수 고령 포2리 이장, 박경철 충남연구원 박사, 윤인숙 비폭력대화 강사, 이선희 제주 종달리 삼촌PD, 송호진 한겨레신문 기자를 비롯해 많은 분이 법인 운영에 관한 조언과 지지를 해주었고 신지호 전주우리밀영농조합법인 대표와 최병조 세종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처장은 법인의 주주가 되기를 약속했다.
나는 공심채 법인을 연구하고 혁신하는 농업회사로 키우고 싶다. 새로운 작물이 이 땅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초보의 능력과 경험미숙은 한계가 되겠지만 다르게 볼 수 있는 유연성과 창의성은 앞으로 또 다른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 농부이자 연구자로서 이미 이름을 높인 이동현 박사는 곡성에서 설립한 미실란을 통해 발아현미를 상품화하는 한편 밥카페 ‘반하다’로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아이디어와 기술을 통해 혁신하고 소비자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우리 농업도 미래를 논할 수 있지 않을까.
10년 전 아무 연고도 없이 제주에 올 땐 내가 농업 분야에서 일하게 되리란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올해 8월 창업한 공심채농업회사법인이 10년 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필자 홍창욱: 공심채농업회사법인을 올해 창업했다.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저자이자 칼럼니스트, 육아하는 아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