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거기서 만나!’ 얼굴있는 농부시장

홍천기 도농문화콘텐츠연구회 대표

농촌과 먹거리를 상징하는 삽, 숟가락, 젓가락에 알록달록 색을 입혔다. 홍천기 대표(왼쪽부터), 홍서웅 팀장, 장은비 씨.
농촌과 먹거리를 상징하는 삽, 숟가락, 젓가락에 알록달록 색을 입혔다. 홍천기 대표(왼쪽부터), 홍서웅 팀장, 장은비 씨.

“제가 농사지은 쌀이에요. 맛보고 가세요”
 농부는 애지중지 기른 농작물을 꺼내고, 지나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춘다. 농부와 소비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어 당신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 건강하고 맛있는 농산물을 만들기 위해 농부가 얼마나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지. ‘아는 농부’가 하나 생기는 특별한 순간이다. 놀랍게도, 이 만남은 도심 한복판에서 이뤄진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이하 DDP)에서 열리는 ‘얼굴있는 농부시장’(이하 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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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도시민의 맛이 있는 만남
지난 16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사무실에서 2019년 얼장을 준비하는 핵심 인물들을 만났다. 홍천기 도농문화콘텐츠연구회 대표, 홍서웅 운영팀장, 청년농부 장은비·정진욱 씨가 함께했다. 2016년부터 얼장과 함께한 장은비 씨는 ‘얼장이 좋은 이유’를 묻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얼장은 제 농산물을 가장 가치 있게 팔 수 있는 곳이에요. 버섯 하나를 팔더라도, 제가 농사짓는 과정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서 재밌어요. 지금은 단골도 많이 생겼어요. 저희를 기다리는 소비자들도 많고요.”

얼장은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와 건강함을 맛볼 수 있다. ⓒ 얼굴있는 농부시장
얼장은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와 건강함을 맛볼 수 있다. ⓒ 얼굴있는 농부시장

 얼장은 말 그대로 농부가 자신의 얼굴을 내걸고 장사하는 곳이다. 소농, 가족농, 청년농부가 정직하게 키운 1차 농작물과 손수 만든 2차 가공품 등을 판다. 단순히 물건과 돈만 오가지 않는다. 농부와 소비자는 대화를 통해 농촌의 가치를 공유한다. 홍천기 대표는 농부와 도시민의 맛이 있는 만남을 꿈꿨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농업이 식량 공급 이상의 순기능을 하려면 농부와 소비자가 관계를 맺어야 해요. 농부가 올라가든, 도시민이 내려가든 해야죠. 제도권 밖에 있는 농부들이 하루 정도 시간 내서 도시로 소풍 온 것처럼 장터를 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경험하고 성장하는 청년과 농부
얼장의 중심에는 청년이 있다. 청년기획단이 장터를 기획하고 운영하면, 청년농부는 물건을 팔며 시장을 활기차게 한다. 도시청년과 청년농부가 어울리는 새로운 판이 짜인 것이다. 디자이너 출신인 홍천기 대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청년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그렸고, 어느새 청년은 얼장의 상징이 됐다.

청년얼장에서 청년농부와 청년기획단이 함께 문을 연 ‘과일가게’ 모습. ⓒ얼굴있는 농부시장
청년얼장에서 청년농부와 청년기획단이 함께 문을 연 ‘과일가게’ 모습.  ⓒ얼굴있는 농부시장

 “청년농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겠다 싶었어요. 도심 한가운데서 청년농부와 농업에 관심 있는 도시청년이 어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서웅 팀장은 얼장을 “청년과 농부를 인큐베이팅하는 마켓”이라고 소개했다. 청년농부의 경우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 소비자를 만날 수 있고, 판매자끼리 소통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나누고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청년기획단의 경우 농업에 관한 새로운 시야가 탁 트인다. 색다른 경험은 사회 진출에도 요긴하게 쓰인다. ‘경험하고 성장하자’는 얼장의 슬로건과 딱 맞는 결과다.

장터를 운영하고 기획하는 청년기획단 ⓒ얼굴있는 농부시장
장터를 운영하고 기획하는 청년기획단  ⓒ얼굴있는 농부시장

지역, 전국을 품다
홍천기 대표는 얼장의 최대 성과를 두 가지로 뽑는다. 하나는 청년기획단을 구축한 것, 하나는 청년농부가 지역에서 성장하게 된 사례다.
 작년 7월부터 경기 용인시에서도 청년얼장이 열린다. 작년까지 얼장의 운영진이 주축이었다면, 올해부터는 지역의 청년농부들이 직접 장터를 운영한다. 나아가서, 홍천기 대표는 청년농부들이 협동조합, 공유텃밭 등을 만들어 지역에 완전히 안착하길 바란다.
 용인 청년얼장의 주축인 장은비 씨는 “제가 나고 자란 곳에서 장터를 운영할 수 있는 건 정말 좋은 기회”라며 “판로, 동료가 없는 외로운 청년농부들이 모여 함께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진욱 씨는 “저처럼 귀농해서 혼자 고생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판매자들이 모이면 각자의 경영 노하우를 배우고 공감하는 동지가 되는 것”이라며 “농부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얼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얼장의 핵심 인물이 모였다. 홍서웅 팀장(왼쪽부터), 장은비 씨, 정진욱 씨, 홍천기 대표.
얼장의 핵심 인물이 모였다. 홍서웅 팀장(왼쪽부터), 장은비 씨, 정진욱 씨, 홍천기 대표.

더 튼튼하게,
더 깊이 있게
얼장이 시작된 지 3년, 홍천기 대표는 올해를 ‘재도약의 해’로 본다. 장터 운영의 원칙을 바로잡고, 청년기획단을 대외적으로 출범시켜 체계적으로 운영할 생각이다. 지금은 운영진이 확인하고 있는 판매 품목도, 청년기획단이 직접 지역을 찾아 물건의 품질을 확인하고 관리하게 될 것이다.
 “파머스마켓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적인 콘텐츠가 앞으로도 건강하게 발전해야겠죠. 지속 가능도 중요하지만 ‘진화’해야 합니다.”
 2019년부터 DDP 청년얼장은 서울 밤도깨비 야시장 푸드트럭과 손을 잡고 야간에도 장터를 연다. 서울 종로구 상생상회에는 ‘공유마켓’이 생긴다. 청년농부, 지역단체, 활동가, 공유텃밭 등 소수의 선별된 팀이 매장의 일부 공간을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로 꾸밀 수 있게 된다.

그렇게 2019년 얼장도 진화한다. 봄이 되면, “거기서 만나자”는 약속도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얼장으로 놀러오세요~”
“얼장으로 놀러오세요~”

<‘얼장’ 운영 장소·시간>
•DDP 얼장: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3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토요일에 진행된다. 청년농부들이 중심이 되는 ‘DDP 청년얼장’은 셋째 주 토요일에 만날 수 있다.
•용인 청년얼장: 경기 용인시 ‘e편한세상 용인 한숲시티’에서 3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넷째 주 일요일에 진행된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