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섭 지산농원 대표
연산 화악리의 오계는 생기가 넘친다. 청잣빛 맴도는 까만 깃털 옷을 걸치고, 힘껏 치솟은 볏을 앞세워 마당 곳곳을 누빈다. 야무진 부리로 먹이를 찾고, 단단한 발톱으로 땅을 파서 흙 목욕을 즐긴다. 충남 논산시 지산농원은 사람을 위한 효율적인 공간이 아니다. 닭이 자연의 섭리대로 살 수 있는 곳, 오랫동안 이어 내려온 닭의 공간이다.
오계를 지키는 사람들
천연기념물 265호로 지정된 연산오계는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한 토종닭이다. 허준 선생은 동의보감에 오계를 ‘약재’로 특별히 기록하고, 그 약효를 상세히 다뤘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 진상하던 특산품이었으며, 연산군의 경우 백성은 물론 정승까지 못 먹게 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2013년에는 국제슬로푸드협회가 지정한 전 세계 멸종위기 동식물 리스트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이름을 올려 국제적인 보호 대상이 됐다.
김종섭 지산농원 대표는 오계와 오골계가 유전적으로 완전히 다른 품종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흔히 오골계烏骨鷄라 부르는 닭은 뼈만 검고 털은 하얀 실키오골계다. 일본의 천연기념물이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한국의 오계烏鷄는 말 그대로 까마귀처럼 검은 닭이다. 뼈는 물론 깃털, 피부, 눈동자, 눈자위, 발톱까지 모두 검다.
“오계는 특별한 닭이죠.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주고,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소중한 자산이에요.”
김 대표가 오계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오계의 가치를 알리는 ‘오계 아빠’가 된 지 어느덧 10년이다. 패션업에 종사하던 김 대표는 마라톤 동호회에서 만난 이승숙 연산오계재단 이사장을 통해 오계를 알게 됐다. 이 이사장은 오계를 약으로 쓰고, 가보家寶로 여기며 종을 지킨 조상의 뜻을 이어 6대째 오계를 관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오계를 지키는 외롭고 험난한 길을 함께 뛰는 소중한 ‘러닝메이트’다.
닭의 원형을 지킨다
지산농원은 오계의 혈통을 지키는 곳이다. 문화재 보호는 원형 보존의 원칙을 따른다. 몸이 작고 날렵하며, 때에 맞춰 알을 낳고 품는 닭의 원래 모습을 지키는 것이다.
“닭은 사람에게 고기를 주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 개량改良을 해요. 개량은 더 좋게 고친다는 뜻인데, 닭이 아닌 사람 의 목적에 맞게 바꾸는 거죠. 육계는 30일만 길러도 장정이 먹을 수 있고, 산란계는 알을 하루에 2개씩 낳아요. 이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에요.”
종계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선발한다. 표준 체형 20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하고, 수컷은 암컷 여덟 마리와 한 조를 이뤄 번식하며 종을 보존한다.
“이곳 논산에서 600마리, 경북 상주에서 400마리를 키워요. AI (조류인플루엔자)나 다른 위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죠.”
최근 충남대 동물자원과학부 연구팀에서 오계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연산 화악리의 오계는 다른 곳의 오계와 달리 원형에 거의 가까운 유전 성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계의 가치를 널리, 더 널리
오계는 살아서 혈통 보존의 임무를 맡고, 죽으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약재가 된다. 지산농원에서는 종계 심사에서 탈락하거나, 종계로서 역할을 다해 도태된 오계는 식자재로 쓴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보고 향유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이승숙 이사장은 오계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사람들이 오계에 관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산농원을 복합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계는 1년을 키워도 평균 1.3kg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이중에 상대적으로 큰 닭들로 개량을 해서 분양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지역 농민의 소득을 높이고, 오계의 상징성을 잘 이어 나갈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연산오계재단은 오계의 원형을 보존하는 데 주력하고, 지산농원은 오계를 활용해 더 많은 이들에게 가치를 알릴 예정이다. 오계의 약성을 이용한 기업과의 협업도 모색하고 있다.
멸종위기의 오계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이사장은 오계 달걀 보관실을 보여줬다. 종란種卵은 이곳에서 한 달을 보낸다. “한 달이 지나면 부화율은 50% 가량 떨어져요. AI가 주변에 퍼지면 천연기념물이고 뭐고 예외 없이 살처분해야 합니다. 그런 때를 대비해야 하는 거죠.”
토종 종자를 지켜 우리 생태계를 보존하는 길, 오계를 보존하는 일도 그러하다. 김 대표와 이 이사장과 함께 뛸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닭 우는 소리가 새벽을 열 듯, 생명을 지키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열 것이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