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알고이, ‘농가에서의 휴가’
지난봄, 독일 연수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지도교수로부터 방문 장소의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를 받았는데, 링크와 함께 보내온 ‘건초더미’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건 뭐지? 호기심에 사이트를 이곳저곳 살펴보다가, 건초더미에서 잠을 자는 것이 농가에서 누리는 ‘특별 코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 목동들이 헛간에서 잠을 잔 것같이 말이다.
평범하고 소박한 독일 농가민박
‘건초더미라니!’ 라이쉬Reisch 농장은 가기 전부터 흥미로웠다. 독일 남부 알고이Allgäu 미센missen은 더군다나 요즘 우리나라에서 ‘치유농업’ 붐을 타고 관심을 끄는 ‘크나이프요법 발상지’로 유명하기도 하여, 새로운 ‘농가에서의 휴가’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농가는 평범해 보였다. 바로 전날까지 멋진 풍광이 펼쳐지는 그림 같은 집에서 민박을 했던 탓일까, 풍광도 그보다는 못한 것 같고, 세련된 미소도 없이 우리를 맞이하는 마리아의 태도도 투박하게 느껴졌다. 감탄사가 나온 것은 소박해 보이는 집 2층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아담하고 개성 있는 방들이 복층구조로 늘어서 있고, 넉넉한 응접실과 숙박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리도구와 가구, 가전제품은 물론 식기도 넉넉히 갖추어 놓았다.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가 정감 있고 고풍스러웠으며, 농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멋진 장식품으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화려하진 않지만 의외로 포근한 잠자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제2의 다리가’ 필요한 농민
이 농가의 주인은 안드레아스Andreas Reisch와 마리아Maria Reisch 부부다. 1988년 유기농을 시작한 두 사람은 해발 700-1200m 경사진 초지 33㏊에서 젖소 16마리를 키우면서 우유와 치즈를 생산한다. 소를 더 많이 키워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소에게 먹일 풀이 모자라 외부에서 사 와야 하고 농장 내 순환이 깨지기 때문에 이 규모를 유지한다. 정원 텃밭에서 채소를 키워 자급자족하고, 태양광과 태양열, 그리고 우드칩을 이용해 전기와 난방을 해결한다.
라이쉬 부부는 우유 1ℓ에 53센트를 받는다. 유기농이고 고산지 목초우유라 일반 우유(약 30센트)보다 많이 받지만, 이것으로 넉넉히 먹고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치즈를 만들고 농가 민박을 한다. EU와 국가, 주정부가 주는 다양한 명목의 농업직불금은 전체 소득의 약 30%, 그러나 보조금에만 의존할 수 없고 그렇다고 농업소득만으로 살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농민들이 부업을 한다. 농가 민박이나 치즈, 술, 잼, 빵 등을 만들어 직접 팔거나 농업직업학교에서 배운 목공이나 철공 기술로 별도 직업을 갖기도 한다. 알프스 지역 은 겨울에 스키장에서 일하는 농민도 많다. 이것을 이들은 ‘제2의 다리’라고 부른다. 하나의 다리(농업)로 서 있기 불안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또 다른 다리라는 뜻이다.
건초더미같이 투박함, 농을 지키는 사람들
농장을 둘러보는 중에 농장 홈페이지에도 있는 ‘크나이프’ 프로그램에 대해 묻자, 안드레아스는 “아내가 관심이 있어서 크나이프 치유 시설을 만들어 놨지만 대중의 관심도가 낮아서 일 년에 한두 팀 정도만 운영한다”고 했다.
대신 이 집에서 인기 있는 것이 건초더미다. 햇볕에 잘 말려 좋은 냄새가 나는 건초를 푹신하게 깔아주고 그 위에 베개를 두면, 건초더미 침대가 완성된다. 2층 다락방에는 놀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놀다가 그대로 잠이 들면, 아침 햇살이 창가에 넉넉히 머물며 깨워준다. ‘농가에서의 휴가’를 제대로 만끽하고 싶은 가족 단위 숙박객을 중심으로 6월에서 10월까지, 1년에 평균 175일, 방이 찬다.
농사는 힘들어도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
“민박을 하지 않았다면 다섯 아이를 키우기 어려웠을 거예요.” 라이쉬 부부는 딸 셋에 아들 둘, 5남매를 두었다. 농업소득과 민박으로 얻는 소득은 거의 비슷하다. 2020년이면 안드레아스가 65세. 농민으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지만 다섯 명의 자녀 중 농업을 잇겠다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에게 권하기가 어려워요. 하루에 두 번 젖을 짜야 하니 자유롭지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않아요. 일도 많고 이곳은 경사도 심해 힘들기도 하고요. 로봇착유기? 전기 요금이 더 많이 나올걸요.”
저녁 착유를 마치고 시작해서 어둑어둑할 때까지 농장 곳곳을 안내해 준 부부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 좋아요. 제가 제 삶을 주도할 수도 있고요.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아껴서 살면 되지요. 3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농사지을 겁니다.”
처음 만난 날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천진난만하게 웃는 마리아, 큰 나무처럼 든든한 안드레아스를 바라보며 마음이 푸근하면서도 한편 무거웠다. EU와 독일의 이상적인 철학과 농업정책에 박수치다가 소농의 현실에 맞닥뜨리니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속 가능한 농農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성찰하는 시민의 힘’일까, ‘국가의 철학’일까 아님, 어떠한 경우에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는 ‘농민의 사명감’일까.
글 신수경 · 사진 이진선
*라이쉬농가 www.reisch-hof.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