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미끄러진다
언어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언제나 무엇인가 흘러넘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난다. 선택과 배제, 언어를 사용해 개념을 정의定義할 때마다 태어나는 쌍둥이다. 농사짓는 사람을 ‘농업인’이라고 법률이 호명呼名할 때, 그 뜻이 ‘농민’이라는 말의 뜻과 일치할 수 없다. 농업에 관한 최상위 심급審級의 법률인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은 “ ‘농업’이란 농작물재배업, 축산업, 임업 및 이들과 관련된 산업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1)라고, 그리고 “ ‘농업인’이란 농업을 경영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2)고 규정한다. ‘농업인’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법률적으로) 탄생했다. 이때 법의 무대에서 퇴장한 단어는 ‘농민’과 ‘가족농’이다.3) 법률에 규정된 ‘농업인’이라는 말에 함의되지 않은 것 중에 한국 농업·농촌의 미래를 밝힐 논의의 실마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불충분한 제도,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률
농업인 지위를 인정받으면 그에 따르는 특권과 혜택이 적지 않은데, 법률상의 농업인 정의가 아주 단순해서 법적 의미의 농업인 되기가 아주 쉬운 게 문제라는 비판이 있다. 반면에, 처음으로 영농을 시작하려는 도시 출신 청년이나 농가의 여성 입장에서는 법률상 농업인 되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청년 신규 취농자나 농가 여성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현행 법제에서는 1000㎡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거나 임차해 영농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농업인 되기’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토지 가격이 비싸서 매입하기 어렵고, 한국농어촌공사 농지은행을 통해 계약서를 작성하는 합법적 임차의 기회는 아주 적다. 자본이 부족해 임차농으로 농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청년들은 법률이 인정하는 농업인 되기가 쉽지 않다. 농지 소유자 명의를 남성 가장의 몫으로 돌려놓는 가부장제 문화 때문에, 농사짓는 여성이 사실상 가족 농업노동의 절반을 수행하면서도 법률적 의미의 농업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농정을 수립하고 규율하는 법제와 관련해 제기되는 문제 외에, 농민(또는 농업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인정social recognition 문제도 있다. 가령, 최근에 농촌 지방자치단체 여러 곳에서 검토하거나 추진 중인 농민수당 제도를 둘러싼 논쟁에서 농민(또는 농업인)과 관련된 정체성 문제의 일단一端이 드러난다. 또 다른 예로, 사회가 농업․농촌에 바라는 것이 먹거리 생산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점도 농민(또는 농업인)의 정체성 문제와 큰 연관이 있다. 오늘날에는 먹거리 생산뿐만 아니라 환경적․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농업, 즉 다기능 농업multifunctional agriculture이 요청된다. 정부의 농정 또한 다기능 농업을 촉진하려는 방향으로 전환될 기미를 보인다.
법률상 농업인 규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법률이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법률이 정한 ‘농업인’ 개념과 관련 제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농민’이라는 개념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농민’ 개념이 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농업인’은 철저하게 ‘직업 범주’로서 인식되지만, ‘농민’은 ‘직업 범주’가 아닌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현실에서는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 규정된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누가 보더라도 ‘농민’이라 불러 마땅할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거꾸로 ‘농업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과연 ‘농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경우도 있다.
가상이지만, 개연성 높은 예를 들어보자. ‘돌봄농장’에서 실무자로 일하며 어울려 사는 A씨(50세, 여)는 수도권의 대도시에 살다가 15년 전에 ○○군으로 이사 왔다. 이런저런 원예 및 조경 관련 일을 하다가, 4년 전부터 비닐하우스 4동을 갖춘 협동조합 형식의 농장에서 실무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유기농 허브, 꽃모종 등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일이 주된 업무다. 이 농장은 지역의 정신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에게 농사를 가르쳐 직업 재활을 도모하거나 직접 고용하는 ‘돌봄농장’으로 제법 알려진 곳이다. 좋은 일을 한다고 지역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역에서 15년을 거주한 A씨는 농장일 외에도 지역사회의 여러 활동과 마을 대소사에 참여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려 산다. 1년에 몇 차례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풀을 깎거나 저수지 주변을 청소하는 ‘마을 부역’에 불참하는 일도 없다. 누가 보아도 ‘농민’이다. 그러나 A씨는 법률적 의미에서는 농업인이 아니다. 소속된 농장이 농업법인이 아니며, 개인 명의로 농지를 소유하거나 임차한 것도 없으며, 농산물 판매액이나 농업 노동시간을 근거로 농업인 자격 확인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양돈업에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마을과 유리된 B씨(39세)는 모돈 1000두의 적지 않은 사육 규모를 유지하는, 법률적으로 자격이 확실히 증명되는 ‘농업인’이다. 심지어는 한 달에 100만 원씩 현금을 지원한다는 청년창업농 영농정착지원사업에 신청할 자격도 된다. 그러나 축사에서 직접 농작업을 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고용한 캄보디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의 축사 일(농작업)을 맡아서 한다. B씨는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농협 등 금융기관에 출입하는 경영활동에 시간을 주로 할애한다. 거주지도 축사가 있는 △△리가 아니다. B씨의 부모는 △△리에 거주했지만 사망했고, B씨는 △△리에서 12km 떨어진 충청남도 도청이 있는 지역의 아파트에 거주한다. B씨는 최근에 축사를 확장했는데, △△리에서는 악취와 수질오염이 심해진다며 주민들이 강하게 반대한 바 있다. B씨는 이미 한동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로부터 반대의 목소리가 쉽게 나온다.
사회 안에서 ‘농민’은 이미 정의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누가 정의하는가? 농민 자신이다. 농민 스스로 ‘새로운 농민’을 정의하면서, 농민 스스로 ‘새로운 농민층’을 구성해야 한다. 오늘날 그 새로움의 열쇳말은 무엇일까? ‘자율성’, ‘협동’, ‘지속 가능성’이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현행의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이 규정하는 ‘농업인’이라는 말은 사회가 원하는 ‘농민’의 이미지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현재 법률은 단순히 ‘농지 경작’ 또는 ‘가축 사육’만을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회적 인정과 관련한 거시적인 사회 변화의 흐름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농업인 또는 농민이란 누구이며, 그 정체성을 법제에 타당하게 반영하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답하려면, 훨씬 더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새로운 농민’, 농민 스스로 만들어야
‘농업인’이라는 말의 법률상 정의는 이미 현실에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이 상황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마도 ‘농민=농업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게 된 것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농민≠농업인’이라고 할 때, 그 차이점은 마을 또는 지역사회에서 여럿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회적 차원에서 유래하는 것 아닐까? 농업계 고등학교인 풀무학교 3학년 학생들의 ‘농진로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농민이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이 나름의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농민이란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농촌 마을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를 말한다.”
지구적 차원의 먹거리 체계가 형성되면서 농민이 살아가는 방식에 큰 변화가 왔고,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농민의 자율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농업 자원을 형성·관리하며, 시장을 피할 수는 없으나 예속되지는 않는 농사를 지으며, 농촌 환경과 지역사회를 이웃과 함께 돌보고 가꾸면서, 보람과 긍지를 찾는 새로운 농민”을 기다린다.
농민을 ‘직업 범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농민은 땅 그리고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농민이 농촌에서 농사짓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생활은 커먼즈4)를 만들어낸다. 그런 커먼즈가 전체 사회에 환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를 제공한다. 즉, 집합적collective 차원이 필연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농산물 가격에 반영되지 않는 특정한 사회적·환경적 가치를 창출하려면, 농민들의 집합적 실천을 촉진해야 한다. 그런 촉진 수단 중에서 현금 지원이라는 수단은 가급적 농민들의 집합적 단위, 가령 농업환경보전을 목적으로 농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협동조합이나 마을 조직 등에 제공될 때 실효가 높아질 테다.
법률이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온전히 규정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오히려, 법률이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제대로 규정하도록, 제도와 정치의 환경을 바꾸려는 사회적 인정 투쟁이 필요하다. 한편, 사회 안에서 ‘농민’은 이미 정의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누가 정의하는가? 농민 자신이다. 농민 스스로 ‘새로운 농민’을 정의하면서, 농민들 스스로 ‘새로운 농민층’을 구성해야 한다. 오늘날 그 새로움의 열쇳말은 무엇일까? ‘자율성’, ‘협동’, ‘지속 가능성’이라고 단언한다. 전 세계의 농업이 현대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면서, 현재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먹거리 체계global food system가 형성되었다. 농민이 농사짓고 살아가는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고, 농업·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위기가 도래했고, 농민의 자율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농업 자원을 형성·관리하며, 시장을 피할 수는 없으나 예속되지는 않는 농사를 지으며, 농촌 환경과 지역사회를 이웃과 함께 돌보고 가꾸면서, 보람과 긍지를 찾는 새로운 농민”의 출현을, 나는 기다린다.
※필자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마을학회 일소공도’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화두 삼아 공부한다. 적게 먹고, 삼천 권의 책을 읽고, 산책하며 살고 싶지만 삶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며 산다. jskkjs@krei.re.kr
1)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제3조의 1. 이 법률은 1999년 2월 5일에 「농업·농촌기본법」이라는 명칭으로 제정되었고, 이후 개정되어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2)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제3조의 2.
3) 뜻이 자명하다고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1967년 1월 16일에 제정된 「농업기본법」에는 법률적 용어 정의 없이 ‘농민’, ‘가족농’ 등의 단어가 나온다. 동법 제12조에 “정부는 농업지도요원의 양성, 시험연구사업, 농민의 교육 및 기술의 보급을 위하여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동법 제17조에서 “정부는 경영능률의 향상과 가족경영의 정상적인 노동보수 및 타산업종사자와의 소유균형이 실현될 수 있도록 자립가족농을 육성함에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라고 언명하였다.
4)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나 자연 자원 따위를 넓은 의미의 커먼즈commons라고 한다. 공기, 물, 야생 동식물 따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개인적·집합적 편익을 위해 사람들이 집단(지역사회, 이용자 집단 등)을 이루어 관리하는 자원을 일러 커먼즈라고도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는 없고 특정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경우(가령, 어촌계원들만 어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유수면이나 갯벌, 지역의 농민들이 함께 이용하는 관개배수 시설)로 한정하는 것인데, 이런 유형의 커먼즈를 따로 일러 ‘공유자원common pool resource’이라고도 한다. 좁은 의미든 넓은 의미든, 커먼즈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보유하고 이용하지만 사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을 말한다. 커먼즈를 관리하는 메커니즘에는 다양한 비공식적 규범, 가치관 등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 농촌 마을에서는 일 년에 여러 차례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안팎의 길이나 수로 주변 잡초를 제거하는 ‘풀 깎기’ 관행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데, 법률 같은 공식적 규범이 그런 공동체 활동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자원을 집합적으로 관리함에 있어, 국가나 시장이 아니라 한 지역사회가 또는 이용자 공동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를 통해 규율하는 사회적 실천까지도 커먼즈라고 정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