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린 자녀들이나 젊은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에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래는 여러분의 것이니 희망을 잃지 말 것과,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막연하게나마 지금보다는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의 가치관·세계관도 바뀔 것이니 너무 현실의 절망과 좌절감에 함몰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농민들이나 농업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 그리고 대다수 농민에게 미래의 농업과 농촌은 희망이 있고 비전이 있으니 농업에 승부를 걸어보라고 덕담으로라도 권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농업·농촌의 현실과 미래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어디 녹록한 분야가 있겠냐마는 특히 농업·농촌 부문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농민이 농사로 먹고살 수 없는 시대
최근 2~3년만 보더라도 거의 모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있다. 알려진 품목만 아로니아, 블루베리, 사과, 배, 포도, 마늘, 양파, 고추, 대파, 고랭지 배추·무 등 주작목 대부분 가격이 폭락했다. 뭘 심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현장 농민들이 아우성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좋아질 기미는 별로 보이질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아만 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산 농산물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소비자들의 국산 농산물에 대한 소비 충 성도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수입산 체리나 망고가 1t 트럭에 실려 농촌 구석구석까지도 누비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듣도 보도 못한 열대과일이 대형마트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반면, 도리어 국산 배는 유통기한을 지나 절반 값에 판매하는 세일 코너에 몰려있기 일쑤다.
소득 측면에서도 농민들의 농업소득은 수년간 1000만 원 내외로 정체되어 있고, 전체 농가소득 4200여만 원의 25% 내외에 불과하다. 그나마 농사지어 연간 500만 원도 못 버는 농민이 3분의 2가 넘는다.(2018년 통계청 조사) 이는 결국 대부분의 농민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더욱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농업과 농촌을 지키며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농민에 대한 이해 부족과 무관심이다. 우리의 농민들은 농업소득만으로는 살 수 없어 건설 현장이나 서비스업종에서 일용직으로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하고, 잘사는 농민과 못사는 농민의 괴리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농민으로서의 자긍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을 농사만 지어 먹고사는 개념이 내포된 ‘농업인’이라는 용어로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농업·농촌의 본질적 가치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24년 전 WTO 체제가 출범하고, 12년 전 한-미 FTA가 출범할 당시부터 끊임없이 예견된 일이었다. 세계화·개방화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념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1등만 살아남으라는 경쟁력 지상주의와 물질 즉 돈만을 추구하는 물신주의이며, 이는 결국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인간소외현상으로 귀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농업·농촌·농민 문제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본질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돈만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와 정책당국은 돈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수십 년간 농업·농촌의 본질적 가치 제고 정책보다는 규모화와 경쟁력 제고 정책으로 일관되게 추진해 왔고 지금도 그 정책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규모화로 생산비를 낮추고 가격 경쟁력을 높이면 수입농산물과 경쟁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가격하락으로 경쟁력이 생겨서 수입농산물이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들어오고 있다. 결국 가격경쟁력으로는 수입농산물을 이길 수 없음이 자명해지고 있다.
규모화도 필요하고 경쟁력 제고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농업·농촌은 버티기 어렵고, 중소농의 몰락은 불을 보듯 뻔하며, 이는 결국 농촌지역의 공동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나는 수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정책당국과 관변학자들은 이러한 경고를 경청하기는커녕 그들만의 출세제일주의와 한건주의, 그리고 상호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무시하거나 귀찮은 주장으로 폄하했다.
대부분의 농민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 수 없는 지경이다. 우리의 농민들은 농업소득만으로는 살 수 없어 건설 현장이나 서비스 업종에서 일용직으로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하고, 잘사는 농민과 못사는 농민의 괴리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농민으로서의 자긍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을 농사만 지어 먹고사는 개념이 내포된 ‘농업인’이라는 용어로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농정의 큰 이슈, ‘공익형 직불제 도입’과 ‘청년농 육성’
어쨌든 최근 농정의 큰 이슈는 ‘공익형 직불제 도입’과 ‘청년농 육성’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정책의 추진 과정과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책당국은 아직도 농업·농촌·농민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공익형 직불제 개편 방향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로 구분되어 운영되는 직불제를 통합하여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강화하고, 쌀에 집중된 직불금을 줄이되 논과 밭에 대한 고정직불금을 다소 높여 동일하게 지급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쌀소득보전직불제 중 변동직불금을 없애고 고정직불금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변동직불금을 없애면 당연히 목표가격을 설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목표가격을 설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국회의 간섭을 배제하고 관료들 마음대로 쌀 정책을 펴겠다는 꼼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적폐의 대상으로까지 지목되는 관료들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는 없다. 국회가 시원치 않다고 하더라도 국회의 기능까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관료들의 논리는 쌀 목표가격을 설정하지 않고 시장기능에 맡기되 수요량을 초과하는 물량은 수매를 통해 시장과 격리하면 시장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맞다면 현행 변동직불제와 목표가격제를 유지하면서 초과물량을 격리하면 시장가격이 내려가지 않으니 변동직불제를 유지한다고 해도 정부로서는 직불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더 나아가 수요초과 물량을 시장에서 격리하는 품목을 쌀에 국한하지 않고 사과, 배, 고추, 양파 등 주요품목으로 확대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청년농 육성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공감한다. 그러나 기왕에 추진하려면 좀 더 확실한 비전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생활이 되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스마트팜을 운영하게 하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 같으나 이 또한 투자 비용과 판로 확보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뻔하다. 농산물의 생산·가공·판매가 그리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대부분 농민처럼 이들 또한 농사 이외의 소득에 의존해 이일 저일 해야만 살 수 있다면 의미가 없고 좌절만 남게 될 우려가 크다.
개도국 지위 포기, 피해는 농민의 몫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WTO 체제하에서 개도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알아서 기는 당국의 태도에 화가 난다. 수십 년간 이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왜 당당하게 맞설 생각은 하지 않고 내줄 생각부터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업·농촌·농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WTO나 FTA 추진으로 모든 산업 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하고 있다. 한-미 FTA나 한-EU FTA 등 수많은 FTA를 맺으면서 그나마 농산물 분야도 전면개방되고 있다. 다만 1995년에 출범한 WTO 체제하에서 우리는 농업 부문에 한하여 스스로 개도국 지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2015년 쌀시장을 개방하면서도 513%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었으며, 농업보조총액(AMS)도 1조5000억 원 수준으로 책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선진국임을 선언하게 되어 WTO 협상이 재개된다면 쌀 관세 수준과 보조금마저도 절반 이하로 대폭 줄어들게 되어 있다.
미국의 압력 때문에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려는 거라면 미국에는 이미 한-미 FTA에서 농산물의 99% 완전 개방을 약속했고 미국산 쌀도 사주고 있음을 상기시키면 된다.
몇 가지 현안 과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았으나 농업·농촌·농민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고 복잡한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난국을 극복하고 농업·농촌·농민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농민이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라고 방치하지 말고, 우리 사회와 정책당국이 먼저 제 할 일을 다 해야 한다. 관료들의 보여주기식 한건주의와 무책임한 일부 학자들의 나열식 제안 등 현장과 괴리된 엉뚱한 정책에 더는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바란다.
※필자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양양로뎀농원 농부. 중앙대 산업과학대 학장, 한국농업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쌀은 주권이다」(2016, 콩나물시루), 「농업문명의 전환」(2011, 교우사), 「농산물 시장 개방의 정치경제론」(2008, 한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