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인 밝은세상영농조합법인 대표
세상에 하나뿐인 술이 있다. 차가운 막걸리를 한 모금 물고 있으면, 입안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그만, 목으로 사르르 넘어간다. 달짝지근한 듯, 슴슴한 듯, 자꾸만 생각나는 그 맛에는 긴 여운이 있다. 술맛에 반한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서 양조장을 찾았다가,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드는지’ 알고서 두 번 반하게 된다는, 아주 특별한 술이다.
지역을 담은 막걸리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즐비하게 늘어선 공업단지를 지나 꾸불꾸불 좁은 고갯길을 넘다 보면 ‘호랑이배꼽’이라는 노란 간판이 보인다. 너른 마당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1942년에 지어진 고택을 개조한 토담집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평택이 품 안에 꼭꼭 감싸고 있는 듯한, 아늑한 시골집이다.
밝은세상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혜인씨는 “지역의 색을 담은,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술을 빚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곳의 대표 상품인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이혜인 씨의 아버지이자, 지역이 배출한 화백인 이계송 씨가 고향을 위해서 만든 특산주다. 한반도 배꼽자리에서 빚는 술이라, 기상하는 호랑이 형상을 생각하며 이름을 ‘호랑이배꼽’이라 지었다.
“아버지는 평택을 ‘균형의 땅’이라고 표현하세요. ‘평平’이라는 것이 밸런스, 즉 균형을 맞추는 거잖아요. 저희 가족은 평택에서 자연재해를 겪은 적이 없어요. 가뭄에도 지하수가 풍부했고, 바다가 있으니 홍수 걱정도 없었죠. 균형의 땅에서 나는 좋은 물, 좋은 쌀로 술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막걸리 한 잔에 평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달뱅이논(다랑논)에서 자란 삼광三光 쌀, 화강암 지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천연암반수를 ‘와인 기법’으로 숙성시키는데, 원재료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그마치 100일이 걸린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술
“아버지가 술을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마니아가 메이커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게, 아버지는 해외에 다니시면서 지역에서 제일 좋은 술을 대접받으신 거예요. 최고급의 술을 드시던 분이 직접 술을 만들기 시작하신 거죠.”
그런 아버지의 눈에 딸이 들어왔다. 포토그래퍼로 미국에서 한국인 메이저리거를 전담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이혜인 씨가 잠시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왔을 때였다. 당시 술을 빚기 시작한 아버지가 양조장에서 자꾸 그를 불렀다.
“아버지가 잠깐만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술 빚는 과정이 신기하거든요. 뽀글뽀글 거품도 나고, 갑자기 회오리도 치고요.”
술이 익어가는 동안, 아버지와 딸은 대화를 통해 우리 술의 가치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함께 술을 빚게 되었다.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이혜인 씨가 양조장에 찾아온 이들과 그 철학을 나눈다.
“우리 술보다 싸구려 위스키 향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위스키는 위스키가 지향하는 바가 있고, 우리 술은 우리 술이 지향하는 바가 있죠. 서양 술은 원재료를 강조하는 경우가 없어요. 오크통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자랑하죠. 오크통에서 술 안으로 맛과 향을 끌어오는 거예요. 반면 우리는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밖으로 끌어내요. 술을 마셨을 때, 밖에서 끌어온 맛과 안에서 끌어낸 맛은 차이가 나요. 양조장에 오신 분들께 이렇게 말하면 많이들 공감해 주세요.”
이계송 씨는 “사실, 사람들은 술 얘기를 듣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이제껏 남의 기준에 익숙해져 있던 거죠. 혜인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게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요. 가치 기준이 180도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계송 씨는 딸이 빚는 술이 ‘세계 최고의 술’이라고 자부한다. 좋은 물, 좋은 재료를 쓰고, 무엇보다 좋은 철학을 담아서 사람의 마음마저 움직인다는 것이다.
술에 담은 가치를 나눕니다
와인잔에 마시는 막걸리,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흐르는 양조장, 도심에서 펼치는 전통주 쇼케이스 등. 이혜인 씨와 디자이너 출신인 언니 이혜범 씨는 우리 술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며 젊은 층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저희가 작은 브랜드로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몸집이 작으니까 변화무쌍한 시대에 맞춰서 빨리 변할 수 있는 거죠. 다행인 건, 저희 같은 작은 브랜드를 응원해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되었어요.”
가치를 소비하는 시대다. 지역과 철학이 녹아든 술에, 트렌드를 반영한 신선한 마케팅에 사람들이 반응한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팬이라는 의미의 ‘찐팬’도 늘고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낸 결과가 아니다. 한때는 빚은 술을 가족끼리 다 마시는 날도 있었다.
“기업을 대상으로 해야 산업이 크는데, 저희는 처음부터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생각이었어요. 사람들이 식당이나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는데, 내가 먹고 싶은 술을 집으로 시켜서 먹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그걸 10년 전에 시작했으니, 그때는 잘 안 팔렸죠.”
그럼에도, 이혜인 씨 가족은 꾸준히 술을 빚었다. 양조장을 알리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시나브로, 세상은 바뀌었다.
“아버지가 장사하려고 만든 술은 아니에요. 우리만의 철학을 담아서 만들기 시작한 술이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힘든 와중에,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요소인 것 같아요.”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혜인 씨와 그의 가족은 앞으로도, 술에 담은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세상 하나뿐인 술’을 정성껏 빚어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