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희망을 일구고 있습니다”

이해극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

강원 평창군 육백마지기농장 ‘잡초공적비’ 앞에서 이해극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과 부인 윤금순 씨가 손을 맞잡았다.
강원 평창군 육백마지기농장 ‘잡초공적비’ 앞에서 이해극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과 부인 윤금순 씨가 손을 맞잡았다.

  “태초에 이 땅에 주인으로 태어나 잡초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뽑혀져도 그 질긴 생명력으로 생채기 난 흙을 품고 보듬어 생명에 터전을 치유하는 위대함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다.”
  지난해 8월, 이해극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69, 제22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기술 부문 수상자)이 강원 평창군 청옥산 육백마지기농장에 ‘잡초공적비’를 세웠다. 자칭, 타칭 ‘황당무계당 당수’의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에,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설마” 했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역시, 이해극”이라고 했다.
  이해극 회장은 45년간 유기농업 외길을 걸어오면서, 우리나라 유기농업 발전의 산증인으로서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10만 명이 넘는 농민에게 전파했다. 이 회장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DC 24V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30여 개국에서 크게 호평받고 있다. 최근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에 연임되며 여전히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그를 찾았다.
  인터뷰는 지난 4월 13일 이해극 회장을 제천 한가지골농장에서 만나 강원 평창 육백마지기농장을 함께 오가며 이뤄졌다. 최근에 생긴 육백마지기 카페에서 이 회장은 “여기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격세지감이다”라고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너른 청옥산 육백마지기(해발 1256m). 왼쪽으로 보이는 육백마지기농장에 파릇파릇한 호밀 싹이 자라고 있다.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너른 청옥산 육백마지기(해발 1256m). 왼쪽으로 보이는 육백마지기농장에 파릇파릇한 호밀 싹이 자라고 있다.

국민 건강 챙기는 ‘천상 농부’
> 45년간 안심 농산물 생산
> 2017년부터 임신부 꾸러미 사업 추진

– 최근 근황이 궁금하다.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으로 최근 연임됐다. 한국유기농업협회는 40년 전통을 가진 농업계 터줏대감이다. 자연경관 보존, 안전한 농산물 생산으로 애국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소비자가 안전한 농산물을 먹으면 몸이 건강해진다. 친환경농산물 소비가 늘면 친환경농민은 더 많아질 것이다. 농약과 비료를 덜 쓰면 땅이 좋아지니, 결국에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 행복해지는 방향이다.”

– 협회에서 임신부 친환경농산물 꾸러미 지원 사업을 계속 추진해왔다고 들었다.
“정부에서 청년들에게 아기 낳으라고 독려하는데, 지금 같은 환경에서 출산하라는 것은 ‘고생하라’는 이야기다. 태어난 아이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2억 원이 든다는데, 그 돈을 벌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결국 아기 낳는 사람이 애국자다. 임신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다가, 2017년부터 ‘임신부 친환경농산물 꾸러미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또 우리나라 기형아 출산율이 점점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토피, 천식과 같은 환경성 질환을 앓는 아이들도 많다. 가정이 돌보든 사회가 돌보든, 아기가 태어나 숨 떨어질 때까지 국가의 비용이 발생한다. 태아 형성기에 임신부가 잘 먹어야 국가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자는 것이다.”

캡션
지난해 8월 강원 평창군 육백마지기농장에서 열린 잡초공적비 제막식.

상농上農은 땅을 가꾼다
> 잡초는 지구촌의 살갗
> 하늘은 속여도, 땅은 못 속인다

– 지난해 육백마지기농장에 ‘잡초공적비’를 세운 것이 화제였다.
“농민들이 ‘잡초와의 전쟁’을 벌이는데, 사실 잡초는 고마운 존재다. 30년 전, 내가 육백마지기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땅에서 풀 한 포기 찾기 힘들었다. 농약과 비료, 특히 제초제를 어찌나 많이 뿌렸는지 흙이 빨갛게 보일 정도였다. 땅은 거짓말을 안 한다. 다 티가 난다. 장마철만 되면 농토는 휩쓸려 내려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직 잡초만이 흙을 온전히 붙들고 있었다. 누가 잡초를 쓸모없고 성가시다고 했는가? 잡초는 지구촌의 살갗이다. 그러니까 너 죽고 나만 살자, 이러면 안 된다. 공존공영(共存共榮). 함께 살며 함께 번영해야 한다.”

– 농민에게 땅은 어떤 의미인가.
“건강한 농지에서 건강한 작물이 나온다. 하느님은 속여도, 땅은 속일 수 없다. 거름 한 줌 줘놓고 열줌 줬다고 하면, 땅이 속겠는가? 농민은 정직해야 한다. 예부터 ‘하농下農은 풀을 기르고, 중농中農은 곡식을 기르고, 상농上農은 땅심을 기른다’고 했다. 10년, 20년 뒤 농토가 유실되고 자갈밭만 남았을 때는 후회해도 늦는다. 결과적으로 후손에게 죄짓는 일이다.”

충북 제천시 한가지골농장에서 브로콜리순을 따는 이해극 회장. 그는 “작물 기르는 것은 자식 키우는 것과 똑같다. 대견하고, 감사하다”며 웃었다.
충북 제천시 한가지골농장에서 브로콜리순을 따는 이해극 회장. 그는 “작물 기르는 것은 자식 키우는 것과 똑같다. 대견하고, 감사하다”며 웃었다.

농사로 성공하기까지
> 농민의 경쟁력은 기술력
> 농업에 애정을 가져야 성공한다

– 45년간 유기농업에 전념하여 지금은 ‘성공한 농부’가 되었다.
“내게 갑자기 500억 원짜리 점보여객기가 생긴다 한들, 직접 운전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기술력이 경쟁력이다. 최근 한 후배가 땅을 사서 토마토 농사를 짓는다길래, 먼저 다른 농가에서 일을 배우고 오라고 용돈을 쥐여줬다. 모쪼록 실패하지 말아야지, 의욕만 가져서 되겠나. 나의 경우에는 자동화, 기계화, 생력화 덕분에 취미처럼 즐기는 영농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 온도 경보기, 변온 씨앗 발아기, 자동 파종기 등 소농에게 꼭 필요한 발명이 농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캡션
이해극 회장은 “종자를 잘 고르고, 생육 적온에 맞춰 육묘를 관리하면서 차근차근 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 농사는 어떻게 지어야 할까.
“농사는 종합응용과학이다. 농민은 식물의 생리부터 토양, 기상 등 자연과학을 알아야 한다. 가뭄 때 홍수 생각하고, 홍수 때 가뭄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 앞에 겸손하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물론, 농업에 애정을 가진 국민이 있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이다. 농사에 애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은 무조건 성공한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딱 맞다. 밤에도 달빛 아래서 일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정말 달빛 아래서 일하는가?) 그렇다. 달빛에 비친 농작물은 더 예뻐 보인다. 하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농사를 지을 것이다.”

꼭 이루고 싶은 꿈
> 남북이 함께 지키는 한반도 식량 안보
> 개방의 시대에 우리 농촌이 살길은 유기농

– 통일농업에 뜻이 큰 걸로 알고 있다.
“동료들과 함께 남북공동농업을 진행해 한반도의 식량 주권을 지키고 싶다. 남북이 정치적인 문제로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먹고사는 문제는 함께 해결하면 좋겠다. 남북의 농민이 농사를 같이 짓고 함께 풍년가를 부르며 신뢰를 구축하면, 그게 바로 통일이 아니겠나. 수십 년 전 우루과이라운드 시절에 ‘개방의 시대에 우리 농촌이 살길은 유기농’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나는 여전히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며 우리 농업을 지키고 싶다.”

글·사진 이진선

2020 봄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