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준 경산복숭아영농조합법인 대표
어릴 적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 때문이었을까.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7월의 경산으로 향하면서 손오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천상의 반도원에서 손오공이 불로장생의 명약인 천도복숭아를 몰래 따먹고 괴력을 발휘했듯, 그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무덥고 지치는 시절인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농산물 유통, 농민이 주도한다
5월부터 8월까지, 천도복숭아 주산지인 경산시의 복숭아 30%가 모이는 경산복숭아영농조합법인(이하 복숭아조합)은 농민들이 모여 만든 유통조직이다. 조합이 있기 전 농민들은 복숭아를 재배하면 직접 팔거나 농협에 계통출하를 했고, 농민이 주도적으로 가격 결정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우리가 해보자”고 12명이 뜻을 모은 때가 1997년. 3천만 원이 채 안 되는 출자금으로 시작했다. 2015년 현재, 복숭아조합은 조합원이 440여 명에 이르고 자산은 50억 원, 연 매출 104억 원(2014년 기준) 규모로 커졌고, 조합원 배당금이 10%에 이르는 건실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철저한 품질관리로 경쟁력을
초기부터 복숭아조합을 이끌어온 제2대 조합장 신영준(66) 씨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초창기에) 출자금이 있어야 경영을 하는데, 뭐 신뢰가 없으니 출자를 안 할려고 하는 기라, 이사들이 200만 원씩 내서 겨우 했는데 그걸로 버틸 수가 있능교. 그때 생각했어. 같이 가려면 공신력이 있어야 된다, 뭐라케도 믿을 수 있겠다 하는 거,”
농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경영진 덕분에 조합원들이 점차 늘었고, 선별장과 저장창고 등 차근차근 조금씩 산지유통센터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품질 관리를 위해 ‘신선’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조합에서 생산한 복숭아에만 사용할 수 있게 하고, 팩, 봉지, 박스 등 한두 개부터 한 박스까지 다양한 소포장 방식을 선보여 가격 경쟁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신뢰를 받는 최우선 조건은 복숭아조합의 품질관리 시스템이다. 복숭아조합은선별이 끝난 복숭아를 포장하기 전 오존수로 세척, 살균하여 안전성을 높였다. 세척할 때 가라앉는 복숭아는 상품과 분리하여 관리한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하루 이틀 지나면 품질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복숭아조합의 엄격한 품질 관리는 농민이 직접 선별해서 조합에 납품하던 초기부터 해왔던일이다.
“(예전에) 연세 많은 농민이 많다 보니 집에서 눈으로 선별하는 건 한계가 있는 데다가 자기 거니까 아까운기라. 그래서 안 좋은 것들이 섞이는데 하루 이틀 지나면 전체 품질이 안 좋아져. 또 상자에 개수 표기를 하는데, 큰 거에 돈을 더 쳐주니까 76개 들어가도 69개 이래 쓰는 기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신뢰가 최우선이라 생각하고, 농가에 직접 직원을 파견해 일일이 개수를 확인했다. 처음엔 ‘느그들은 뭐 그리 까다롭노’ 하는 원성도 들었지만 점차 무게와 수량이 정확해지고 품질도 나아지면서 시장의 신뢰도 두터워졌다.
공동선별, 공동계산제로 공평하게
2002년, 복숭아 산업 최초로 공동선별, 공동계산제를 도입했다. 농민이 복숭아를 가져오면 선별해 등급을 매기고, 그 상품이 어느 곳으로 나가든지 등급의 평균값으로계산하여 농민에게 주는방식이다. 등급외 판정을 받은 과일은 선별만 하고 공동 계산은 하지 않는다. 품질 관리를 위해서다.
“복숭아 나가는 곳이 다 달라요. 대형유통도 있고 공판장도 있고…. 어떤 데는 3만 원 받는데 어떤 데는 2만5천 원이래 받으면 못 받은 사람은 억울하잖아. 그래서 공동계산을 한 겁니다.”
처음에는 공동 계산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공평하게 이익을 나누는 상생의 제도로 인식되어 농협이나 다른 영농조합법인에서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농가에 도움이 되어야
“같이 간다카는(간다는) 거가 중요하지만 다른 데보다 가격이 떨어지면 안 됩니더. 알맞게 배분 잘하고 안정적으로 납품하고 전국 도매시장을 파악해가 적정하게 잘 보내야 하고요, 최상품도 중요하지만 가장 많이 나오는 중품 가격을 적정하게 잘 받도록 해야 합니더.”
조합원들이 출하한 복숭아 20킬로 상자 하나에 100원씩 적립해 자조금을 조성하고 이것으로 시세가 안 좋을 때 생산비를 보전해준다. 농사에 필요한 농자재는 조합에서 공동으로 구매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고령 농민은 수확만 해놓으면 운반 작업까지 조합에서 해준다. 이렇다 보니 농민들 사이에서 복숭아 조합은 꼭 필요한 존재이고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
지난 4월, 복숭아조합은 조합원들의 숙원이던 현대식 제조 가공 유통센터와 저온창고의 문을 새롭게 열었고, 복숭아뿐 아니라 포도, 청도반시 같은 다른 지역 농산물 유통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또한 새롭게 마련한 가공공장에서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비품과일 가공과 딸기, 감귤, 사과 등 주변의 농산물을 이용한 가공상품 개발도 전문가와 함께 진행하여 지역 농민들의 소득과 편의를 함께 높일 예정이다.
마음을 모으는 것, 리더에 달렸다
신영준 조합장은 4천 평에 복숭아 농사를 짓는다. 40년간 해온 일이다. 예전에는 7~8월이 되어야 복숭아를 수확했는데 조생종이 나오면서 5월 말로 그 시기가 빨라지고 수확 기간도 길어져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워졌다. “땅은 정성을 들인 만큼 돌려줍니다. 가지치기를 하고 난 다음 톱밥처럼 잘게 잘라 발효시켜 다시땅으로 나무에 줍니다. 건강한 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리면 친척이나 친구들 불러서 먹여요. ‘정말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게 농사의 기쁨이죠.”
영락없는 농부. 신영준 조합장은 비상근 명예직 조합장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처음부터 거대한 자본으로 시작한 게 아니에요. 시작은 미미했지만 한마음으로 조합을 키워왔어요. 농사짓고 녹초가 돼 조합사무실로 와가 밤새 복숭아 상자를 접었던 시간, 어려울 때 손을 내밀고 어깨를 두드려준 농민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경산복숭아조합도 없었겠지요.”
440여 명의 농민이 똘똘 뭉친 조직. 그 흔치 않은 그림 속엔, 특별한 비결이나 재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협동의 힘’을 경험한 이들의 우직한 믿음과 그 믿음을 키우고 굳게 한 희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함께하면, 길이 보인다.
글 신수경 편집장 / 사진 김병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