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고문
경북 성주군, 윤금순 씨(63, 제29회 대산농촌상 농촌발전 부문 수상자)를 따라 들어간 참외 하우스에서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이 났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볕에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 냄새였다. 고요한 밭에서 이따금 윙, 윙,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살피니, 참외꽃에 얼굴을 파묻은 꿀벌이 보였다. 벌들이 부지런히 다녀간 자리에는 튼실한 열매가 맺혀 있었다.
전국 최초 유기농 참외, 그 이름 뒤에는
윤금순 씨가 참외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내게 건넸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유기농 참외였다. 아삭, 하고 한 입 베어 물자 입안에 단물이 번졌다. 내가 입에 있는 참외를 삼키기도 전에 “와, 진짜 달아요!”라고 감탄하자 그가 빙긋이 웃었다.
1990년, 윤금순 씨는 결혼 후 성주군에 터를 잡고 남편과 함께 참외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입에도 몸에도 좋은 참외를 기르기 위해서, 그는 “맨땅에 헤딩을 했다”고 표현했다.
“참외 씨가 탱글탱글해야 하는데, 씨는 없고 하얀 형체만 남은 것들이 있어요. 호르몬제로 참외 크기만 키워놔서 그래요. 마치 뻥튀기처럼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무농약으로 농사를 지었어요. 토양학에, 미생물학에,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안 했던 공부를 밤새워서 했다니까요.”
윤금순 씨 부부는 괴산미생물연구소(흙살림 전신)에서 발효 퇴비와 미생물을 얻어 작물 재배에 사용했다. 1992년에는 지역 내 연구회를 만들어 친환경 농사법을 연구하고 지역 농민들에게 공유했다. 꿀벌을 이용한 참외 수정법은 지역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옛날에는 벌이 수정한 열매를 다 따버렸어요. 모양이 울퉁불퉁하다고요. 그래도 벌이 수정한 참외가 맛도, 향도 훨씬 좋아요. 우리 방식이 조금씩 퍼지더니 지금은 다 그렇게 해요. 성주에 있는 참외 하우스 앞에 대부분 벌통이 놓여 있어요.”
2004년, 윤금순 씨 부부를 중심으로 친환경 농업을 하는 농민회 회원들이 모여 ‘참살이공동체’를 결성했다. 참살이공동체는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실천하는 농민 중심의 협업 조직이다. 현재 여덟 농가가 한 해 참외의 생산 계획, 씨앗 및 자재 구매 등을 같이하고, 수확 시기에는 매일 공동 작업, 선별 포장, 출하 및 정산, 평가를 함께한다.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있었죠. 그 과정에서 판로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어요. 초반에는 서울에 있는 생협에 참외 한두 상자를 보내려고 성주에서 김천으로 넘어가 고속버스로 물건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소비자도, 생산자도 점차 늘어난 거예요.”
여성농민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 ‘진짜 이유’
윤금순 씨는 어릴 적부터 ‘농민’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공무원 시험이나 보라”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뭘 배우는지도 모르고 지원한 환경공학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서 사회와 농업, 농촌을 공부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땅은 정직하니까, 농민은 땅만 열심히 일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 농업이 처한 현실을 알면 알수록 그냥 농사만 지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1984년, 윤금순 씨는 충북 중원군(충주시)으로 귀농하여 농촌보육시설을 설립하고 3년간 운영했다. 농촌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여성농민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역에서 농민, 청년, 여성이 중심이 되는 크고 작은 조직을 만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원·충주 농민회를 세울 때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특히 여성들의 조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성농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농업,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거든요. 우리 사회가 농업을 손해 봐도 되는 분야, 희생시켜도 되는 분야라고 생각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농촌에서 여성이 그렇게 위계화되어 있어요. 이 문제를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윤금순 씨는 1994년부터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에서 정책위원장, 사무총장, 부회장, 회장 등을 맡으며 여성농민의 권리를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뼛골 빠지게 일하라는 건지, 여성농민회 사람들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고 농담을 했다.
긴 세월 속에서 변화는 서서히 이뤄졌다. 여성농민 중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내걸어 농산물을 판매하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통장으로 돈을 받으며, 농가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농협 조합원이 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동안 정부는 여성농어업인 육성법을 마련하였고, 농림축산식품부에 여성농민 전담부서를 설치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윤금순 씨는 2004년부터 2017년까지 국제농민단체 비아 캄페시나(La Via Campesina, 농민의 길) 동남·동아시아 대표 국제조정위원(ICC)으로 활동했다. 비아 캄페시나는 81개국 182개 조직이 소농의 권익을 위해 연대한 조직으로, 2018년 12월 유엔UN이 농민권리선언을 채택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저는 아시아 여성농민을 조직하는 데 많은 지원을 했어요. 여성농민 활동과 관련해서는 전여농이 굉장히 앞서있거든요. 제가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내용을 더 많이 전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윤금순 씨는 14년의 세월을 손으로 직접 꼽으면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다양한 국적, 인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누구든 사람이라면 귀하게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더욱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굉장한 굴레라고 여겼어요. 엄마한테 ‘왜 나를 딸로 낳았냐’고 물은 적도 있어요. 엄마가 원했던 것도 아닐 텐데, 하하.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자로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거든요. 약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약자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생각하게 돼요. 내가 여성이어서, 또 농민이어서 다행이에요.”
40년 가까이 국내외에서 농민을 위한 목소리를 내온 윤금순 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농업, 농촌의 영역을 넘어 여성, 생태, 통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농업, 농촌 문제는 농민만 잘 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윤금순 씨가 더 넓고 깊은 세상으로 성큼 들어갈 모습이, 그 안에서 이룰 새로운 연대와 화합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글·사진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