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소명

1995년 1월 1일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상징인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다. 이전의 GATT 체제와는 달리 WTO 체제하에서는 농산물마저도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 한-미 FTA, 한-EU FTA, 한-중 FTA 등 양자 협상이 일반화되어 2021년 현재 57개국 17건의 FTA를 맺고 있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추진 중에 있고,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15개국이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알셉)은 국회 비준만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자유무역의 파고 속에서 우리나라의 농업과 농촌은 경쟁력 없는 산업과 지역으로 폄훼되었고, 농업·농촌의 본질적 가치와 공익적 기능은 훼손되고 있다.
  이를 예측이나 한 듯 교보생명은 WTO가 출범하기 5년 전인 1991년에 기업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농 관련 공익재단인 대산농촌재단을 설립하였다. 설립 동기를 보면 ‘어려움에 처한 우리 농촌을 지원하기 위해 교보생명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농촌 지원 공익재단으로서, “농촌은 우리 삶의 뿌리요, 농업은 생명을 지켜주는 산업”이라는 대산 신용호 선생의 뜻을 이어 우리 농업과 농촌의 가치를 드높이는 다양한 공익사업을 펼치기 위함(대산농촌재단 홈페이지)’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렇듯 대산농촌재단은 30여 년 전에 이미 개방화 시대에 농업·농촌·농민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음을 예견하고, 그 가치와 중요성을 우리 사회와 미래세대에게 알리고자 했다. 이는 대산 신용호 선생의 선지자적 안목과 뜨거운 민족애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우려한 대로 신자유주의에 의한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은 소위 경쟁력을 갖춘 수출 대기업들에 유리해졌다. 그러나 가격경쟁력이라는 잣대만으로 판단한다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외국산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고, 결국 농업·농촌의 몰락으로 이어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시장개방으로 이익을 보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이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농업·농촌·농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보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그 어떤 기업도 직접적으로 조치한 바가 없고, 취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반면, 교보생명은 자유무역으로 이득을 보는 기업도 아니고, 농업·농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며, 농민·농촌·농업 부문이 교보생명을 도와주는 것도 없음에도 대산농촌재단을 설립하였고, 그것도 벌써 30여 년 되었다는 것은 농업계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산농촌상의 현장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농촌 현장에서 농업과 농촌 공동체를 지키려는 농민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근자에는 재단 이사로서 재단 운영에도 참여하면서 대산농촌재단이 그 본연의 역할과 창립 정신을 이어 나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지켜보기도 했다.
  이제 서른 살이 되는 대산농촌재단이 신자유주의 개방화 시대에 그 본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농업·농촌·농민과 함께 아파하고 웃고 울며 동행하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그 시대적 소명을 영원히 다 할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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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양양로뎀농원 농부.
중앙대 산업과학대 학장, 한국농업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쌀은 주권이다」(2016, 콩나물시루), 「농업문명의 전환」(2011, 교우사), 「농산물 시장 개방의 정치경제론」(2008, 한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