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빨간 맛
지역에 출장이 잡히면 가는 날이 장날인 경우도 있고 아닌 날도 많다. 출장 날짜가 잡히면 그 지역 오일장이 언제인지를 찾아본다. 농촌 장날 구경은 누구나 좋아한다. 근래에 너무 잦다 싶을 정도로 방송사마다 전통시장 콘텐츠를 내보내면서 ‘인심과 맛’이 살아있다는 전형성을 만들기는 하지만 여전히 농촌의 오일장은 고장의 핫플레이스다. 다만 요즘 농촌 오일장의 상인도 조직화되어 엇비슷한 물목으로 장날을 좇아 동시다발로 움직이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점점 덜하다. 그래서 오일장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렴, 할머니들의 난전이다. ‘딸기 다라이’라 부르는 빨간 플라스틱 함지박에 내오는 다채로운 물목들은 눈길을 낚아챈다.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에도 채소를 팔러 나오는 할머니들이 꽤 있다. 워낙 소량 판매여서 인근 슈퍼마켓들도 노점 단속을 해달라 신고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텃밭에서 기른 듯한 채소도 있고 인근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떼다 팔기도 하는 눈치다. 할머니들은 손님을 기다리면서 호박잎이나 쪽파를 가지런히 다듬어 놓는다. 나도 종종 이 채마들을 사 들고 오는데 오종종한 모양새지만 슈퍼마켓에서는 살 수 없는 제철 채소들이다. 얼마 전에는 호박꽃을 파는 할머니도 보았다. 저걸 왜 파나 했을 텐데 호박꽃 만두를 해 먹을 줄 아는 이가 ‘옳다구나!’ 하며 사 갔을 것이다. 가끔은 박 몇 덩이도 나온다. 박속국이나 박나물을 해 먹을 줄 아는 이들이 들여갔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채소 난전은 이런 잔재미가 있다. 오히려 안전과 친환경의 이름으로 내놓는 생협이나 농협 로컬푸드 매장의 채소들보다 아기자기한 사연을 가진 이 채소들이 내 눈을 오래도록 잡아두곤 한다.
국토가 아무리 좁다 해도 꽃 소식은 아랫녘에서 먼저 들려오지만 눈 소식은 윗녘에서부터 내려온다. 그래서 이맘때 가을의 강원도 장터는 마음이 급하다. 오대쌀부터 메밀과 깨, 콩대까지 달려온 콩들, 약초들과 버섯이 지천이다. 그래도 가을 장날에 전국구 스타는 알밤과 생대추, 건고추와 고구마다. 명절에 떠밀려 출하하느라 겉모양만 반질반질한 사과가 아닌, ‘울퉁불퉁 멋진 몸매에 빨간 옷을 입고 새콤달콤 향기 풍기는’ 사과들이 쏟아져 나온다. 산천이 붉어지기 시작하면 가을 장터도 붉어지니 가을은 ‘빨간 맛’이다. 농촌 출신이 아닌 다음에야 알아보기 힘든 으름이나 다래, 고욤도 종종 만난다. 먹어본 이들의 눈이나 낚아챌 그 물목들을 보면서 종종 사람들에게 뻐기고 싶다. 나는 으름도 알고 고욤도 아는 사람입니다!
장날이 아니어도 좋은 날
그렇다고 장날만 좋은 것은 아니다. 장날이 아닐 때에는 농촌의 공설시장 같은 곳들을 천천히 걸어본다. 그러면 고장의 삶을 관통하는 기분이다. 생물 생선도 없는 건어물 가게나 식료품점 같은 상설 상점을 지나면 상인들은 밖에 나와 느긋하게 부채로 파리를 쫓고 있다, 나처럼 외지인이 지나가면 짧은 시간 안에 나를 살펴본다. 입성이야 늘 평범한 편이지만 외지인 특유의 냄새를 단박에 맡는 이들이 바로 고장 사람들이다. 그런 외지인이 장을 보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 날파리에나 관심을 둔다. 제일 성한 날은 오일장날이지만 주민들이 매번 장날 맞춰 나올 수도 없고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들이 있으니 느릿하게나마 장터는 돌아간다. 특산물 주산지는 조금 다르다. 수확 철에는 장날과 상관없이 전이 펼쳐지는데 특히 주말에는 제법 물건을 펼친 이들이 많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뜸해도 관광객들이 사 들고 가는 것들이 특산물이기 때문이다. 담양의 죽순 같은 것들 말이다.
장날이 아닐 때에는 천천히 그 고장의 뼈대를 구경할 수 있어서 좋다. 장날에 빡빡하게 펼쳐진 파라솔과 인파에 가려져 있던 고장의 골조가 쓸쓸하게 드러난다. 농촌사회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에는 마을에 들어가서 농민들의 말을 직접 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앞에 두고 노트북을 켜고 타자를 치는 모자란 짓도 많이 했다. 물론 지금도 현장 연구의 가장 기본은 마을 주민들 취재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 공부에 뜻을 둔 후배들에게 권컨대, 우선 농촌의 차부(터미널)에 한참 앉아있어 보라 하겠다. 겨울이면 더 낫겠다. 해는 일찍 떨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띄엄띄엄, 차부의 버스도 띄엄띄엄하다. 터미널 앞에서 구워내는 붕어빵은 다 식어가도록 팔리지 않는다. 가끔은 안쓰런 마음이 넘쳐 식은 붕어빵과 자꾸 끓여대 불어터진 어묵 꼬치를 사서 먹기도 한다.
서너 시가 넘으면 학교를 마친 중고등학생들이 잠시 터미널 근처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카페에 모여 재잘대다 시간 맞춰 흩어진다. 누군가는 버스 끊기기 전에 군내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이내 읍내도 조용해진다. 군청 소재지와 터미널 주변은 농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고 번화한 곳이어도 대체로 한산하고 고요하다. 이런 적막을 먼저 느껴보고 공부의 행로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라떼 선배’의 충언이기도 하다. 오일장의 북적거림에 대해서는 쓸 사람도 많고 하다못해 ‘6시 내고향’이나 ‘다큐 3일’에 차고 넘친다. 하지만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들을 어떻게 쓰고 말할지 궁리하는 것이 농촌 공부다.
할머니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어
그래도 이 길로 들어서겠다면 동료로서 하나 알려줄 ‘꿀팁’은 오로지 하나. 농촌에서 실패하지 않는 밥집 찾기 비법뿐이다. 일단 장날이든 장날이 아니든 우리의 맛 스승들은 할머니들이다. 할아버지들은 술추렴을 하러 가실 공산이 크므로 일단 후순위로 미뤄두자. 물론 농촌 시장에는 잔술을 파는 곳이 있다. 안주는 계란후라이 하나에 오백 원, 두어 장 시켜서 잔술을 마셔보는 것도 추천한다. 하지만 술도 식후경. 할머니들은 날짜 맞춰 함께 ‘빠마’를 말러 나오시기 때문에 ‘서울미용실’이나 ‘중앙미용실’, 혹은 ‘귀빈미용실’ 앞에서 어슬렁대보자. 그러면 파마 롯드(로드)를 만 채 화려한 스카프를 쓰고 나오시는 할머니들 꽁무니를 따라가야 한다. 아마 중국집으로 향할 것이다. 허구헌날 드시는 밥보다 별식으로 드시기엔 짜장면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간짜장도 짬뽕도 아닌 짜장면으로 통일을 하는데 일단 그 중국집은 합격이다. 속이 약한 노인들이 수월하게 드시고 소화를 시킬 수 있는 집이라면 면 반죽에 소다를 덜 넣거나 넣지 않고 반죽을 할 터. 그런 집은 단무지만 주는 것이 아니라 김치도 꼭 함께 나온다. 서울에서는 사라졌지만 삶거나 부친 계란이나 메추리알이 살포시 올라가 있다. 후식으로 요구르트도 나온다. 할머니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어!
하지만 중식이 당기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까. 이때도 방법이 있다. 상인들에게 밥 배달을 해주는 배달원의 오토바이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놓치지 않고 봐야 한다. 상인들이 매일 시켜 먹는 밥집이 ‘찐’이다. 열에 한두 번은 맵짜고 육덕진 음식을 먹겠지만 매 끼니로는 역시 백반이다. 오륙천 원 내외의 시장 백반집 반찬에는 나름 육해공의 격식을 갖춘다. 디포리(밴댕이)보다 조금 크겠다 싶은 구운 조기 한 마리가 올라오거나 고등어조림 한 토막이 올라오기도 한다. 시판용 도시락김도 필수다. 직접 김을 구워 내놓는 곳도 있지만, 백반집 주인장들도 나이 들었고 김은 생각보다 관리가 어려워 시판용 김을 많이 내온다. 먹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뜯지 않는 것도 센스! 제육볶음이나 계란말이를 깔아주고, 나머지 반찬은 철철이 바뀐다. 반찬을 보면 비벼 먹기 맞춤하여 꼭 ‘스뎅 대접’과 비빔장도 함께 내준다. 비벼 먹을 자 비벼 먹고 집어 먹을 자 집어 먹으란 뜻이다. 나는 그 반찬에 안주 삼아 그 동네 양조장에서 나오는 막걸리 마시는 일을 좋아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팁. 좀 있어 보이려면 막걸리는 이렇게 시켜야 한다. “여기 은자골 한 병이요!”라고 외치면 좋다. 상주에서 유명한 은자골 탁배기를 시킬 때, 이 동네 술 좀 마셔봤노라, 포스를 괜스레 뿜어보는 것이다. 그러니 백반집 가기 전에 우리가 검색해야 할 것은 맛집이 아니라 그 동네의 막걸리다. 여기에 살균막걸리인지 아닌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 나처럼 도회 사람들은 동네 막걸리를 찾지만 농촌 어르신들은 소주를 좋아한다. 백반집 업주들도 관리가 까다로운 막걸리보다 소주나 맥주가 낫고 가끔 유통기한이 긴 살균막걸리가 낫다.
그렇게 한 군데 정해놓은 백반집을 계절마다 찾다 보면 반찬의 변화와 주인 할머니의 변한 손맛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간도 안 맞고 비빔장을 만들 힘도 없는지 시판용 비빔장이 테이블마다 병째 세워져 있기도 하다. 그래도 오늘 먹는 이 백반이 어쩌면 저 사장 할머니께 받는 마지막 밥상이 될지도 모르니 열심히 먹는다. 어느 날 빠마를 만 채 짜장면을 잡수러 몰려가는 할머니들이 마주쳐지지 않는다면 그때가 묵념을 할 시간이다. 고맙고 또 고마웠노라. 계절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맛있는 짜장면을 먹게 해주신 깊고도 슬픈 은혜에 대해서 일동 묵념.
※ 필자 정은정: 농촌사회학연구자.
저서로 「대한민국 치킨展」(2014), 백남기 농민 투쟁기록을 담은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2018), 「그렇게 치킨이 된다」(2020),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2021) 등이 있다. 농촌과 사람, 음식에 대해 신문에 쓰고 라디오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