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김누리
돗자리, 여름의 대삼각형, 그리고 천체망원경
2024년 8월, 밤하늘에 유성우가 쏟아진다는 소식에 마을 청년들이 한곳에 모이기로 했다. 마당은 넓고 준비하는 손길은 부산했다. 청년들이 도착하기 전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당을 내어준 집주인이 출타 중이라 인가의 불빛이 없어 별 보기에는 마침 딱 맞았다. 평소라면 이 집의 자랑은 눈높이처럼 가까이 펼쳐지는 천왕봉 풍경이었겠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늠름한 산봉우리가 아니라 훨씬 더 멀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었다.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라는 세 개의 별로 이루어진 ‘여름의 대삼각형’을 배경으로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비처럼 내린다는 밤이다. 청년들은 하나둘 돗자리를 들고 나타나 자리를 깔고 누웠다. 두께가 얇아서 바닥에 깔고 눕기에는 등이 배길 것 같은 돗자리는 이불처럼 살포시 덮었다. 그래도 충분할 정도로 선선해진 여름밤이었다.
마을에서 마당발로 이름난 ‘별자리 선생님’이 유성우를 보자고 마을 청년들을 소집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들 가운데에는 서로 인사도 나눠본 적 없는 사람도 많았다. 뱀사골 카페 주인도, 용한 침술로 이름난 한의사도 너나없이 하늘을 보고 누웠다.
별자리 선생님은 들뜬 목소리로 청년들에게 신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신화 속 인물 페르세포네가 안고 있는 별의 이름은 ‘스피카’로 밀 이삭을 상징한다. 그래서 처녀자리가 등장하는 시기가 되면 파종을 했다는 옛날 사람들의 지혜를 배웠다. 유성우라는 말처럼 유성은 소나기만큼은 아니더라도 똑, 똑, 연이어 떨어졌는데 어둠을 가로지르는 별 꼬리를 볼 때마다 ‘어?’ 하는 소리와 ‘와!’ 하는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반달의 분화구를 들여다보려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마을 청년들을 바라보며 별자리 선생님은 뿌듯하게 말했다.
“이 천체망원경은 제 돈으로 산 게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산 망원경이라, 이걸 들고 초등학교 가서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이렇게 오늘 같은 모임을 하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도 이 동네 사세요?”
나는 남원시 산내면이라는 지리산 자락의 인구 1900명 남짓한 동네에 있는 사회적협동조합에 다닌다.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은 이 마을을 베이스캠프 삼아 전국의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을 한다. 비영리 영역에서 일하는 활동가, 뭔가 해보고자 하는 공무원, 비수도권 지역에서 분투하는 사람 등을 모두 포괄해서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추상적인 ‘연결’이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형태는 다양하다.
해마다 100명 이상이 함께 만들어온 ‘지리산포럼’은 올해로 10회를 맞이한다. 이른바 ‘축제형’ 지리산포럼 기간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산내면에 모여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쉰다. 지리산권의 공익활동과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지원조직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를 협력사업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마을을 기반으로 이웃들과 다양한 작당을 벌이기도 하고, “지리산에 이런 분야, 이런 활동에 관심 있는 분은 없나요?”하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아, 그 분야라면 말이죠······.”라며 나서는 소소한 역할까지 ‘연결’이라는 단어에 모두 담긴다.
포럼이나 워크숍 같은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서울 등지에서 찾아온 참가자가 “그런데 선생님도 이 동네 사세요?”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네, 회사까지 느린 걸음으로 15분 걸립니다.” 익숙한 질문을 들으면 내가 귀촌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손가락을 들어 세어본다. 대충 20년이 넘었다. IMF를 거치며 한창 산내에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2002년 월드컵쯤 들어와서 가족과 오순도순 잘 살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잠시 마을을 떠났고, 대학 4년을 포함해 짧고 고된 서울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이 극단적으로 요약된 나의 U턴 귀촌 서사인데, 그렇게 귀향한 지도 어느새 제법 오래되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대학 시절 방학을 보내러 돌아온 마을은 반년 단위로도 휙휙 바뀌었다. 어느 순간에는 호프집 있던 자리에 번듯한 마을 카페가 생겨서 커피를 팔았고, (이 마을 카페가 지금 일하는 지리산이음의 시작점이다.) 어느 순간에는 그 카페 뒤편의 가건물에 사람들이 모여서 희곡을 읽는 문화적인 동아리를 하기도, 동네 소식을 널리 알리는 마을신문을 만들자는 대담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도 했다. 또 어느 때부터는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이름과 호칭을 붙여 부르는, 이를테면 ‘무슨 무슨 언니’ 대신에 활동명으로 별명을 쓰는 문화가 슬며시 자리 잡았다. 나는 이제 와서 별명을 새로 만드는 것이 쑥스럽기도 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성만 빼고 ‘누리’라고 나를 소개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마을 어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누리야’에서 ‘누리쌤’으로 대대적으로 개편되었고, 나 역시 휴대전화 주소록의 호칭을 ‘이모’에서 ‘쌤’으로 바꾸어놓았다.
2017년, 나는 취직과 함께 고향에 눌러앉았다. 가족과 함께 농사짓는 것 말고도 고향에서 직업을 갖고 살 여지가 있다는 상상을 못 하던 때였다. 지리산이음이 아름다운재단과 함께하는‘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지리산권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히려면 사람 손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쉬러 온 김에 앞서 언급한 ‘번듯한 마을 카페’ 토닥에서 잠시 소일거리를 하려고 면접을 본나는 1년 동안의 아르바이트 기간을 지나 지리산이음의 활동가가 되었다.
시와 군의 경계를 넘어서 이웃되는 삶
지리산은 남한 내륙에서 가장 큰 산으로, 내가 사는 전북 남원시, 차로 5분이면 넘어가는 옆 동네인 경남 함양군, 그 옆의 산청군과 하동군, 빙 둘러서 전남 구례군까지 행정구역의 경계를 넘어서 5개의 시와 군에 걸쳐 있다.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가 자연에게는 무슨 의미이겠는가. 거기 사는 사람들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산내면은 남원 시내의 도서관보다 함양읍의 함양도서관에 가는 편이 가깝다. 마을 바로 앞까지 오는 버스도 남원 버스가 아니라 같은 길을 지나는 함양 버스다. 나 역시 그렇게 자연스럽게 함양 도서관에 가고, 함양 버스를 타며 자랐다. 사전에서 ‘이웃’이라는 명사를 찾아본다. ‘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치 지리산을 둘러싼 5개의 지역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경계를 넘으며 생활하고, 경계를 넘어서 각자가 인식하는 ‘이웃’의 범위를 확장해 나간다.
지리산이음에서 활동하면서 만난 지리산 사람들은 우선, 따뜻하다. 주말이면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린다. 나 보기에 좋은 날짜는 남들 보기에도 좋은 날짜인지 재밌어 보이는 이벤트는 항상 날짜가 겹치는데, 그중에 고심해서 하나를 고른다. 함양에서 매달 열리는 문화장터 ‘문화놀이장날’에 가면 부스에 앉아 있는 판매자 중에도, 무대를 세팅하는 기획자 중에도 아는 얼굴들이 가득하다. 햇볕이 하루 종일 뜨거운 날이었는데도 이웃들의 분투를 응원하러 의리로 찾아온 이들도 종종 보였다. 이날은 장터 기획을 맡은 활동가에게 팥빙수 한 그릇과 과일꼬치를 얻어먹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어서 ‘우리가 먹을 게 아니라 저 사람을 먹여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바람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렇게 만나는 지리산 사람들은 정신이 없다. 이 중에는 이른바 ‘도시적인 삶’의 대안을 찾아 귀촌한 사람도 있고, 원래 삶터가 지리산 자락이었던 사람들도 있다. 내가 만난 지리산 사람들은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1등을 쟁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돌보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더 나은 삶을 일구는 실험을 하는 중이다. 농촌은 도시보다 사람이 적고, 우리 사는 지역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뛰는 사람들의 수도 그와 비례하여 적다. 하지만 도시에 비해 농촌에 생기는 문제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적은 수의 사람들이 여기 발을 담그고, 저기 발을 담그느라 항상 정신없이 뛰고 있다.
산청에서는 올해 광복절에 세 번째 ‘함께평화영화제’를 열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으로 시작되어 지역의 일상에서도 평화 감수성을 키워나가자는 목표로 만나고 있는 ‘함께평화’ 모임에서 주최하는 영화제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노련해지는 기획과 큐레이션에 감탄한다. 이 영화제를 만든 사람들도 지역 어디 가든 보이는 ‘문어발식’ 활동가들이다. 기념사진을 찍어주느라, 감상 포스트잇 부착을 독려하느라 바빠 보이는 활동가들 뒤에 멀찍이 서서 언제 인사를 건네면 좋을지 타이밍을 보고 있으면, 다른 동네에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과 내가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희한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냥 아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들인데 좋은 사람들이라니!
본명을 잊은 사람들의 마을살이
지리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배우고, 때로는 인터뷰를 하면서, 나도 내가 사는 마을인 산내면에서 주체가 되어 벌일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여성주의 모임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작은도서관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그동안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임시거처인 것처럼 여겨왔던 마을을 지근거리에서 보았다. 일을 시작하고 몇 해 동안은 오히려 ‘지리산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시간을 경유하여 뒤늦게 ‘마을 사람’이 더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내 방식의 마을살이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2024년 현재 나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문화공간 토닥(전 ‘마을 카페’ 토닥)의 문을 열고 커피 한 잔을 내린다. 밤사이 문과 유리창에 달라붙은 거미줄을 슬슬 걷는다. 거미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손님들에게 보이는 앞면만 대강 치우기로 한다. 불, 에어컨, 조명, 커피머신을 세팅하고 입간판을 밖으로 내어놓고, 의자에 앉아 이번 주 열리는 이야기 모임을 마지막으로 알리는 문자를 보내며, 빼꼼히 문을 여는 발소리가 들리길 기다린다. 토닥은 기본적으로 무인 시스템이지만 처음 오는 이들에게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접객할 마음의 준비도 해둔다. 토닥에서는 종종 새로운 얼굴들을 만난다.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물으면 보통 바깥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의외로 “저 이 동네 살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물어본 사람도, 대답한 사람도 머쓱해지기도 한다. 같은 마을에 살더라도 연령대와 행동반경이 다르면 서로 잘 모른다는 걸 마을 일에 뛰어들고 나서부터 더 자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이웃이 되면 되니까.
최근 마을에서 소소하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의 서문에서 저자는 ‘각자 별명을 짓고,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접속할 기회’를 통해 얻은 경험에 관하여 이렇게 서술한다.
“이러한 집단적 실천은 강고해 보이는 사회문화적·물적 배치를 바꾸고 우리가 서로와 다르게 접속하고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탈주선을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늘 별명으로 부르느라 본명이 가물가물한 이웃들에게 기꺼이 토닥의 문단속을 맡기고, 우리의 노후가 단단해지려면 오늘 산내면이 어떤 마을을 지향해야 하는지 상상하고,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함께 모여서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삶 속에서 이 음악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이야기 나눈다. 벌써 이번 주의 선곡도 골라놨다. 닳을까 봐 아껴가며 듣는 곡을 오늘은 꺼내어놓아야겠다. 좋은 것을 나누면 어김없이 더 좋아지니까.
필자 김누리: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 활동가
농촌 마을에서 함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요즘 들어서야 체감하고 있는 8년 차 활동가. 뱀사골 가까이 자리 잡은 지리산이음에서 산내, 지리산, 전국의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들을 거든다.